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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남자
하라 코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담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무거운 어깨를 맨 가장들의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떨군 고개는 쉽게 들릴줄 모르고,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한숨은 짙은 안개처럼 드리워진다. 다만 그런 모습은 남자들뿐만이 아니다. 요즘처럼 장기 침체, 불경기에 어쩌면 남자들보다 더 힘겨운 사람들은 여성들일 수도 있다. 직장 생활에서도 그렇고 가정 생활 속에서도 그렇다. 그 누구하나 힘겹지 않은 삶이 있겠는가 만은 <마루밑 남자>라는 작은 일본 단편집 하나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초상을 쓴 웃음속에 담아낸다.
표제작인 '마루밑 남자'를 비롯해 다섯편의 단편이 수록된 하라 코이치의 이 작품은 '아 재미있다, 하는 감탄사와 같이 나오는 건 깊은 한숨!' 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웃음속에 드리워진 현실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마루밑 남자'는 결혼 6년만에 단독주택을 구입한 한남자의 이야기이다. 어느날인가 아내에게 누군가 집에 있는것 같다는 말도 않되는 이야기를 듣지만 무심히 지나쳐 버린다. 그러던 중 아내가 말하던 유령의 정체를 알게 되버리고 예상치도 못한 변화를 맞게 되는 독특한 소재를 이야기속에 담는다.
'튀김사원'은 한 신흥 상사에서 영업 실적 부진으로 고민하는 한 남자와 다른 곳에서 전근을 온 다도코씨의 기묘한 이야기를 그린다. 전근 온지 이주일만에 말단에서 계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고 새로운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결정된 다도코씨. 회사의 실권자인 소네자키 전무를 실각시키고 회사를 파산으로 몰겠다고 자신에게 말하는 다도코씨의 비밀이 바로 '튀김사원'이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전쟁관리조합'은 여성들이 주도하는 네코가자카 레지던스 관리조합이 경직화된 남자 사회에 대한 선전포고에 관한 이야기이다. 경기 불황으로 여성 종합직이 정리해고 일순위로 떠오르자 그에 대해 사회에 전쟁을 선포한 그녀들의 모습을 담는다. '파견사장'은 우리 사회에도 만연해있는 파견 근로 제도에 대한 모순에 대해서 실랄한 풍자를 담고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은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슈샤인 갱'이다. '가족에서 버려진 아저씨와 가족을 버린 아가씨'의 유쾌 상쾌한 웃음이 있는 작품이다. 쉰 넘어 겨우 과장이 되었지만 결국 정리해고를 당한 시마자키, 아내와는 가정 내 별거 상태이고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다. 어느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그에게 다가온 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다짜고짜 구두를 닦기 시작하고 구두를 다 닦은 후 천엔을 달라고 한다. 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인가? 소녀와 대화를 나누게 된 시마자키는 소녀가 가출 했으며 이 구두닦이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소녀는 그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올백 머리와 선그라스로 무장한 시마자키와 구두닦이 소녀의 기막힌 동거는 그렇게 시작된다.

'난 어릴때 아버지는 구두라고 생각했어요.' 라고 말하는 소녀! 회사일로 바쁜 아빠가 벗어두고 나간 지저분한 구두, 오로지 그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가죽구두를 통해 아빠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는 소녀의 말에 가슴이 아릿해진다. 유쾌하면서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쉽게 웃을 수 만은 없는 이야기들이 이 작품을 비롯해 모든 이야기들 속에 담겨져있다. 마루밑 남자들에게 집을 빼앗기게 된 열 한명의 남자들! 땅에 떨어진 기업윤리를 꼬집는 튀김사원! 경제불황과 여성들의 위치를 생각케하고, 파견 사장이라는 웃지못할 아이디어가 현실에 쓴 웃음을 자아내게 된다.
기발한 상상력과 소재를 블랙 유머속에 담고 있는 하라 코이치의 이 작품은 일본에서 독자들의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기발함에 츠츠이 야스타카의 블랙유머를 더했다!'는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오쿠다 히데오와 츠츠이 야스타카를 만나본 독자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할 그런 즐거움과 씁쓸함을 갖게 만들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린 결혼한 거야? 무엇 때문에 가족이 된 거야? 함께 있고 싶어서 가족이 되었는데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함께 있지 못한다니,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모순된 말이 어째서 통용되는 거야?' - [마루밑 남자] P. 51 중에서 -
'마루밑 남자'에서 아내의 이런 외침에 현실속 남편들은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하지 못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댓글을 양산할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서,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서 ... 가족을 소홀히 한다. 수많은 대답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 누구도 쉽게 Yes!를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남편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 질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를일이다.
<마루밑 남자>는 한참을 웃고 나서 한참 동안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슈샤인 갱'의 주인공인 가족에게 버려진 아저씨와 가족을 버린 아가씨, 가장에게 버림받은? 아내들과 경제 불황이라는 허울아래 희생당해야하는 여성들, 회사에 외면당하는 비정한 현실을 살아가는 직장인들... 현재를 살아가는 고독한 모든 이들에게 이 작품은 잠시 잠깐 기분 좋은 웃음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즐거움의 감탄사와 함께 나오는 깊은 한숨이 기분 좋은 미래를 만들어갈 또 다른 감탄사로 이어질 수 있길 희망해보며 춥고 힘겨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마루밑 남자>를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