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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연금술
캐럴 맥클리어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2008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인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18세기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다. 드라마속에서는 신윤복이 여성이었으며 단원이 바로 그의 스승이라는 설정으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고, 서점가에서는 일본의 대표화가 도슈사이 샤라쿠라는 인물과 김홍도 신윤복이라는 인물의 연관성을 소재로 소설화한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전해주기도 했다. 미쳐 알지 못했던 단원과 혜원이 동시대 인물이었고, 같은 시기 일본에서 홀연이 나타났다 수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진 샤라쿠라는 인물의 비밀을 다룬 이 작품들은 색다른 즐거움과 호기심을 전해주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인물들의 숨겨진 비밀을 들추고, 그들간의 관계를 쫓는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친숙함과 깊이 있는 재미를 선물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캐럴 맥클리어리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연금술> 은 더욱 특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게 된다.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로 유명한 프랑스의 대표 SF소설가 쥘 베른, 이름만으로도 익숙한 루이 파스퇴르, 소설가겸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19세기 영국을 비롯해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연쇄 살인범 잭 더 리퍼, 그리고 조셉 퓰리처를 비롯한 이 익숙한 인물들이 한 작품속에서 한 여인의 손과 발이 되고, 쫓고 쫓기는 관계속에 묶여진다니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검은 옷을 걸친 사내를 두려워했다. 그 사내는 가스등이 켜진 길거리와 이름 모를 골목길의 어두컴컴한 곳에서 피를 찾아 헤매는 악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납을 황금으로 변환시키거나 불로장생의 영약을 찾으려고 애쓰는 중세의 화학자처럼 과학에 살인과 광기를 뒤섞어 지식의 어두운 면만을 열렬히 추구하는 연금술사였다.' - 넬리 블라이의 일지, 1889년 10월 27일 -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정받고 영향력을 가진 '뉴욕 월드지'에 입사한 '넬리 블라이'라는 여성이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했던 당시 남자들의 시선에 정면 도전한 그녀, '블랙웰스'라는 섬에서 환자들에 대한 인권유린에 대한 취재를 하려는 그녀는 정신병자로 위장해 섬에 잠입한다. 그곳에서 환자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넬리는 독일의사라 불리는 한 의사를 의심하게 되고 그를 뒤쫓지만 결국 놓쳐버리고 만다. 어렵사리 섬을 탈출한 그녀는 당시 미치광이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그 의사라고 확신하게 되고 또 다시 그를 쫓아 유럽으로 향한다. 하지만...
연쇄 살인자 잭 더 리퍼를 쫓으며 쥘 베른과 오스카 와일드라는 매력적인 두 인물을 품에 안은 그녀, 넬리 블라이의 활약속에 두툼한 책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진다. 퓰리처의 회사에서 일하고, 파스퇴르와 사건을 나누며, 애드거 앨런 포로 이어지는 탐정소설이야기 등 작품속에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한 이야기 '꺼리'들로 가득채워져 있다. 매력적인 인물들의 향연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역시 주인공인 넬리 블라이이다. 다른 등장인물과는 대조적으로 조금은 낯선 그녀이지만, 냉정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터프하기까지한 그녀, 최초의 여성 탐사보도 기자였던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매혹되고 만다.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정말 색다르고 즐거운 일이다. 19세기 낭만의 시대, 매혹의 도시 뉴욕과 런던, 파리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연쇄살인마와의 쫓고 쫓기는 치열하고 치밀한 대결! 작가 캐럴 맥클리어는 매혹으로 가득찬 그 시간속에 매력 넘치는 인물들을 가득 채워, 정말 특별하고 색다른 이야기를 창조해내고 있다. 역사적 시간의 틀안에 가만히 앉아 있던 인물이라는 평범한 돌을, 상상과 허구로 창조해낸 사건과 관계로 묶어, 캐럴 맥클리어리 특유의 연금술로, 멋지고 특별한 황금을 빚어낸 것이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모든 악과 불행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깜짝 놀란 그녀는 희망의 여신이 탈출하기도 전에 뚜껑을 닫아 버렸소. 희망은 상자에서 풀려나면 자신의 마법을 사용할 준비태세를 갖추고 여진히 그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오.' - P. 523 -
역사적 사실과 인물, 과학과 심리, 미스터리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탄탄한 구성과 세련되고 세밀한 묘사로 <살인자의 연금술>은 작가 캐럴 맥클리어리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19세기 뉴욕과 유럽의 풍경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그 시대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19세기에 강한 동경을 느꼈다는 캐럴 맥클리어리, '넬리 블라이'라는 확신한 의지를 가진 여기자에 매료되었다는 작가는 자신의 뜨거운 열정을 담아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현재 작가는 넬리 블라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차기작을 준비중이라고 하니 그녀에 대한 작가의 애끊는 외사랑을 느낄 수 있을듯하다.
치밀하고 세련된 미스터리, 살인 연금술사와 매력적인 시대의 영웅들의 대결,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신비로운 구성, 과학과 미스터리의 절묘한 조화... 두툼한 소설 한권이 아쉬움속에 사라져가는 가을의 끝자락을 설레이게 만든다. 서울에서 태어나 아시아 곳곳을 돌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작가의 독특한 이력이 눈에 띈다. 넬리 블라이와 만나는 다음 작품속에서는 19세기 우리나라와 아시아의 모습도 함께 할 수 있기를 조심스레 희망해본다. 책의 앞부분에 놓여있는 '난 항상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당찬 그녀, 넬리 블라이의 또 다른 특별한 만남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