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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ㅣ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소영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오리하라 이치의 서술 트릭이 빛나다!
이 가을, '놈놈놈 시리즈'의 오리하라 이치를 다시금 만난다. 불과 한달여전 만났던 이 시리즈의 하나인 [실종자]에 이어 만난 <도망자>는 전작과 함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사용했다는 공통점을 가진 작품이다. 후쿠다 가즈오라는 동료 호스티스를 살해하고 도주했다 공소시효를 21일 남기고 체포된 여성의 실제 이야기가 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 그녀는 '일곱 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라고 불리기도 했다는데... 이 작품속 '도모타케 지에코'의 모습속에서 일곱 개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지도 새삼 관심이 간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프롤로그에는 네가지 이야기가 짤막하게 그려진다. 도모타케 지에코가 도주를 시도한지 2년, 그리고 남아 있는 13년에 대한 절망이 있는가 하면... 도모타케 지에코를 놓쳐버린 은퇴한 '야스오카 형사'의 분노... 어떤 여인의 성형 수술하는 메스를 든 의사... 그리고 마지막 법정에 선 한 여인과 기소장을 낭독하는 검찰관. 처음 프롤로그를 만날때 드는 느낌은 망막함이다. 도망치는 여인, 그리고 마지막 법정... 그렇다면 도코타케 지에코가 붙잡히고 형을 언도받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정도의 추측만 가능할뿐이다. 정말 그런 것일까?
쫓기는 자, 도모타케 지에코의 목소리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진 그녀는 할머니와 함께 성장하게 되고, 그런 그녀가 호스티스로 일할 때 동료였던 '료코'의 남편을 죽인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 료코의 남편 하야시다 히로유키를 죽인 것이다. 살인 현장에는 그녀의 운전면허증이 떨어져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과 지문도 남아있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범인으로 지목 받고 경찰서에 불려와 취조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순순히 범행을 시인하는데...
하지만 그녀의 취조를 담당한 형사 야스오카에게 그녀는 자신에게 살인을 의뢰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히로유키의 아내 료코라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서로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지에코와 료코는 구두로 '교환 살인'을 약속했다고 하는데... 조울증과 정서불안 증세가 있는 지에코의 말은 사실일까? 사건은 사실관계 확인 만으로 쉽게 해결될 듯도 보였지만 영양실조로 지에코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지에코는 병원에서 탈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15년이란 기나긴 지에코의 도주생활이 시작된다.
도모타케 지에코의 도주생활은 니가타의 환락가에서 아오모리, 오사카, 쇼바라로 이어지는 15년이란 예상치 못한 기나긴 시간동안 이어진다. 호스티스로, 양품점 점원으로,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을 바꾸지만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고, 노래방 스낵바에서 일하기도 한다. 지에코를 취조했다 놓쳐버린 야스오카 형사는 정년을 5년 남긴 상태였다. 그렇게 억울하게 은퇴를 하게 된 야스오카 형사는 책의 뒷부분에서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그녀의 뒤를 쫓는 경찰, 하지만 경찰 말고도 그녀를 붙잡으려는 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에코의 남편 도모타케 요지였다. 그녀의 살인으로 자신의 사업에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는 요지는 때론 경찰보다 집요하게 그녀의 뒤를 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구성된다!
<도망자>는 도모타케 지에코와 야스오카 형사, 그리고 그녀의 도주와 관련한 주변인물들이 누군가와 '인터뷰'하는 형식을 띈다. 누구와의 인터뷰인지도, 시공간적인 구성도 가끔은 불확실하고, 중간 중간 들어있는 막간은 누구의 이야기인지, 누구의 시점이지 도통 종잡을 수 없이 혼란스럽다. 하지만 독자들은 작가가 준비해 놓은 흐름에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서술 트릭의 대가답게 독자에게 그 어떤 딴?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의 펜 끝에 시선을 머무르게 할 수 밖에 없다.
도망치는 지에코와 그녀를 쫓는 경찰과 남편 요지의 숨막힐듯한 추격전은 스릴과 재미를 전해준다. 잡힐듯 말듯, 알듯 모를듯 숨겨진 이야기들이 서서히 고개들 내밀고... 책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며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또 다른 등장인물들과 예기치 못했던 이야기 구성과 반전이 느슨해질 수 있는 책의 마지막을 팽팽하게 끌어당긴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 것, 너무 돌아다니지 말 것, 되도록 같은 장소에 자리 잡고 살 것. 그리고 마지막 방심하지 말 것!' 이것이 바로 도망자 지에코의 성공 비결? 이다. 실제 사건의 모델 후쿠다 가즈오의 일곱 개의 얼굴이 지에코에게도 그려진다. 쫓는자보다 치밀하고 섬세한 쫓기는 자의 활약이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지에코의 활약상과 더불어 누구도 예상치못한 반전이 주는 묘미는 오리하라 매직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을 선물한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 <도망자>는 전작 <실종자>에서 다루었던 '소년 범죄와 소년법 문제'같이 '살인과 공소시효'에 대한 물음표를 제기하고 있다. 공소시효가 지나고 나면 정말 그 범죄에 대해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인가? 체포되지 않는다면 그 이후 시간은 그녀에게 행복하게 될까? 아니 공소시효는 정말 필요한 것인가? <도망자>는 이런 수많은 질문을 우리에게 하는듯 보인다.
또한 <도망자>는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선물한다. 가정 폭력, 사생아나 이혼 등 가정 환경 문제, 성폭력 등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가족을 지켜주지 못하는 불완전한 가정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전해준다. 하지만 반대로 지에코의 엄마 기요코의 모습에서 가족이란 따스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딸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도망치는 딸의 머리를 잘라주고, 옷가지와 현금카드를 챙겨주는 기요코의 모습은 전작 <실종자>에서 소년A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아들이 살인자이냐 피해자이냐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살인자를 택하겠다는, 그래도 어딘가에 살아있는 편이 낫다는 소년A의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그런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침묵자], [조난자], [표류자]... 또 다른 오리하라 이치의 '놈놈놈 시리즈'를 기대해본다. 매력적인 캐릭터, 탄탄하고 독특한 구성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반전, 독자의 시선과 추리를 분산시키는 서술트릭... 오리하라 매직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런 매력들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기대해본다. 숨가쁘게 이어지는 '마법같은 문장'이라는 표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도망자>, 그리고 또 다른 오리하라 이치의 '者시리즈'. 마법처럼 이어질 오리하라 이치의 펜끝을 또 다시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