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32살, 광고 회사 마케터로 일하다 현재는 백수, 사설 탐정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은, 아버지가 사용하던 사무실겸 맨션에 기거하는 그녀. 남편 히로오의 갑작스런 죽음(자살)으로 최근 1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 그녀의 이름은 '무라노 미로'이다. 매혹적인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는 그렇게 탄생한다. 전화벨이 울리던 그 날도 미로는 꿈속에서 남편과 안타까운 재회를 하고 있었다. 전화벨 소리에 깨었다가 전화를 받는 대신 자동 응답기를 돌려 놓고 다시 잠자리에 든 미로. 그렇게 아침 10시가 넘은 시간이 되서야 눈을 뜬 그녀에게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

 

'그제야 비로소 그게 클랙슨이 아니라 전화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오전 3시 조금 전이었다. 심장 고동이 가라앉자 땀이 쭉 솟았다. 그 사이에도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 P. 7 -

 

자동응답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이 침묵만 이어지고, 불쾌한 기분과 더불어 왠지모를 불길한 예감이 미로를 휘감는다. 다시 울리는 전화 벨소리. 자신을 '나루세'라고 소개하는 한 남자. 전화 건너편의 이 남자는 미로의 절친이며 르포라이터이기도 한 '우사가와 요코'가 푹 빠져버린 바로 그 남자다. 다짜고짜 요코가 사라졌다며 그녀의 행방을 묻는 나루세. 전화를 끊고 '요코가 어디에 갔을까' 생각을 하던 미로의 집으로 불쑥 나루세와 야쿠자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가 나루세가 맡겨둔 1억엔을 들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요코의 사무실에서 어시스트로 일하는 유카리와 함께 야쿠자에게 끌려가 일주일안으로 요코와 사라진 돈을 찾아오라는 협박을 받게 되는데...

 

유난히 많은 일본 미스터리 추리 소설들과의 만남이 잦았던 이번 여름이다. 이제 더위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여름의 불청객 태풍이 온 나라를 휘감고 지나가 아직도 그 상처가 깊게 남아있는 요즘이다. '기리노 나쓰오'라는 작가의 작품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바로 그렇게 굵은 빗방울이 흩날리고 거센 바람이 쏟아지는 그런 날 만난 작품이다. 탐정소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매혹적인 표지가 압권이다. 파란 카네이션 한송이와 그 꽃을 바라보는 듯한 한 여인, 그리고 감성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제목에 이르기까지... '이게 탐정소설이야?' 하는 질문을 당연히 한번쯤 던져야 할 것 같은... '매혹'을 넘어서는 향기가 넘쳐 흐른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그렇게 표지만으로도 시선을 머무르게 만든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데뷔작(1993년)이기도 한 이 작품은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서막이기도 하다. 2007년 비채를 통해 소개되었던 블랙&화이트 두번째 시리즈인 '다크'는 바로 그녀의 작품이자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완결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아직 '다크'를 만나보지 않았으니 이 작품 이후 만날 작품은 이미 정해진 셈이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일본 하드보일러의 전설'로 추앙받는 그녀, 기리노 나쓰오의 데뷔작이니 만큼 조금더 신선한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그런 작품이다.

 



 

작가는 초반 나루세와 짧은 대화만으로 '무라노 미로'가 어떤 일을 하고 그녀의 가정사는 어떤지... 독자들이 알아야 할 주인공에 대한 정보나 사건 정황을 쉽게 전달한다. 이처럼 작가는 기존 일본 미스터리에서 보여지는 분위기나 사건에 대한 장황하고 거창한 묘사보다 짧지만 간결한 대화로부터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켜 나간다. 하드보일드라는 조금은 무겁고 어두운 장르의 특성을 여성 특유의 느낌으로 창조해 낸 기리노 나쓰오. 신주쿠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흥미진진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은 기존 하드보일드 소설과는 차별화되는 색다른 느낌이 전해진다.

 

섬세한 펜끝과 굵은 붓터치가 조화로운 작품!

요코와 돈의 행방을 찾아 떠나는 숨가쁜 추리와 여정이 이어진다. 매력적인 여성 탐정 '무라노 미로'의 탄생을 위해 아직은 서툴고 순수하기만한 그녀를 작가는 좀더 비정하고 냉정한 세상속으로 내던진다.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사건속에 치졸하고 추악한 사회의 모습, 무겁고 어둡기만한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이 들어있다. 씁쓸하기만한 이런 사회속에 내던져진 아직은 여리고 순수한 '무라노 미로'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씩 탐정이라는 이름의 옷에 어울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날 밤 그 전화를 받았더라면, 이 모든 일은 시작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역자 후기에 보면 소설가 마쓰우라 리에코는 기리노 나쓰오를 '아름답고 영리한 언어의 야수'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언어적 야수성, 그녀가 말한 기리노 나쓰오의 야수성을 이 한작품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계속 만난다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 별 무리가 없을 줄 믿는다. 기리노 나쓰오는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도시락'에 비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누군가에겐 하찮은 물건으로 비춰질 수 있는 도시락의 의미는 그만큼 온갖 정성을 담고 담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요코가 남겨둔 작은 단서들을 뒤쫓으며, 4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무게를 독자들은 손 끝으로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다. 매혹적인 표지 디자인, 매력적인 캐릭터의 향연, 반전이 던져주는 충격, 어느것 하나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다. 앞으로도 비채를 통해 '미로 시리즈'가 소개된다고 하니 너무 반갑고 행복한 기다림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늦게 만났지만 오히려 그게 더 즐거웠던 기리노 나쓰오의 <얼굴에 흩날리는 비> 그리고 무라노 미로. 매혹적인 향기가 그녀에게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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