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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합
타지마 토시유키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노년을 바라보는 현재, 이야기는 과거 열네살 스스무의 시선속에 시간을 담아낸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지나지 않은 1952년, 아이들이 그려내는 풋풋하고 설레임 가득한 첫사랑의 시간들이 추억이 되어 되살아 난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아사기 아저씨의 오사카 롯코산 별장을 찾게 된 스스무. 동갑내기 친구인 아저씨의 아들 카즈히코와 함께 표주박 연못에서 놀던 스스무는 자신을 그 연못의 요정이라고 말하는 한 소녀와 만나게 된다. 두 소년의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카오루, 근처의 쿠라사와 별장의 딸이라는 연못 요정 소녀와 두 소년이 함께한 한 여름밤의 추억은 순수함과 풋풋함 그 자체다. 갈벤 연못에서 수영을 하고, 카오루의 초대로 그녀의 별장에 놀러가기도 하고... 한소녀를 사랑하는 두 소년의 질투 혹은 대결?조차도 너무 수줍고 순수해서 우리를 미소짓게 만든다. 이런 소년 소녀들의 순수한 사랑과 대조적으로 이야기는 빛바래고 일그러진, 회색빛 어른들의 모습도 그려낸다. 1952년의 아이들의 이야기와, 1935년에서 45년으로 이어지는 스스무, 카즈히코, 카오루 이 세 아이들과 관계된 어른들의 추악한 과거가 이야기 중간 중간 뒤섞인다.
추억의 시점인 1952년, 그 이전의 시간속에 있는 아이다 마치코, 쿠라사와 히토미 라는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구성이 초반 각각의 이야기들 서로간의 연관성의 결여로 독자들의 혼란이 가중된다. 스스무와 카즈히코의 아버지, 카오루의 출생의 비밀과 그녀의 고모, 고모부, 앞서 언급한 마치코와 히토미, 롯코의 여왕 사이의 관계... 순수한 성장소설 사이에 미스터리 추리소설 형식이 뒤섞여 퍼즐을 맞추듯 과거와 현재의 추억속에서 독자들은 한동안 허우적 거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충격속에 빠져들게 된다.
백합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백합에 대해 알아보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백합의 '백'이란 글자가 하얗다는 '白'이 아니라 숫자의 '百'이라는 것이다. 백합의 꽃말은 '순수한 사랑, 순결, 깨끗한사랑' 을 의미한다. 이 책의 제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새하얀 백합이 아닌 <흑백합> 이다. 순수 혹은 순결 과는 대비되는 '검은 백합'. 아이들의 순수함, 그리고 그와 대조적인 어른들이 보여주는 추악하고 잔인한 모습을 검은 백합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책속에서도 이런 흑백합이 등장한다. 도쿄 여학생들이 만든 불량서클 이름인 '흑백합파' 그리고 서클리더 '흑백합치'... 잠시 잠깐 등장하는 이름이지만 작가가 의도한 정교한 복선이 그 이름과 더불어, 곳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것이다.

사랑고백 하나에도 얼굴이 붉어지던 그 순수의 시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악한 어른들의 모습이 있다. 시동생과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고, 남편이 있는 여자와 밀회를 갖기도 한다. 과거를 미끼로 돈을 요구하는 사람에, 과거를 묻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이도 있다. 순수한 사랑을 검게 물들이는 어른들의 이기심과 추악한 마음, 흰백합을 검게 물들이고도 남을 만큼의 비열함과 역겨움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과거와 현재, 과거속 현재를 넘나들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뒤엉키지만 어느덧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 이야기는 서로간의 연관성과 숨겨져 있던 비밀을 드러내게 된다. 작가가 곳곳에 설치해둔 복선과 트릭을 따라 걷던 독자들은 마지막에 작가가 날린 펀치 한방에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 맞고 잠시동안 어리둥절해 하며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크지 않은 책, 그리 많지 않은 페이지속에 담긴 이야기는 오래도록 여운이 되고 강력한 느낌이 되어 가슴속에 자리할 것 같다.
'과거는 순식간에 사라져 환상이 돼 버리지만, 이렇게 사진이 있으면 어쩌다 한 번씩 지난 추억을 떠올려 볼 수 있잖아.' - P 211 -
가끔 꺼내는 오래전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왠지 웃음이 난다.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시간의 추억과 이야기들이 언제나 같은 모습, 같은 목소리로 들려오는 듯하기 때문이다. 모습은 변했지만 마음은 여전하다는 생각, 누구나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우리의 모습은 어른이라는 이름속에 우리에게서 순수와 순결을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얻게 된 검게 그을린 마음과 양심... 작가는 그런 현실속 우리들의 모습을 성장소설과 미스터리소설의 경계속에 적절히 녹여놓고 있다. 그런 '순수함'과 '긴장감'의 적절한 어울림이 바로 <흑백합>이 지닌 특별한 매력이다.
하얀 화선지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먹물! 그 어느것보다 선명한 그 검은색처럼, <흑백합>은 아이들의 순수함과 대비된 어른들의 추악함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에게 확실히 인식시키고 있다. 그리고 트릭과 복선속에 감추어둔 마지막 반전, 작가의 의도적 한방에 독자들은 당혹감을 감출수가 없다.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선물해준 대단한 미스터리 <흑백합>, 올해 만났던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과 더불어 2010년을 기억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같다. 타지마 토시유키, 그를 만나기전 꼭 해야할 다짐들... 절대 트릭에 속지 말것, 절대 놀라지 말것, 뒤통수 조심할 것... 절대 쉽지 않을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