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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빛 - 검은 그림자의 전설 ㅣ 안개 3부작 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평점 :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2009년 국내에 소개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천사의 게임]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그가 몽환적인 느낌으로 불멸의 사랑을 담아낸 작품을 통해 또 다시 우리 곁은 찾아왔다. 이전 작품속에서 책과 사랑이라는,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어둠과 그림자라는 독특한 구성과 설정으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던 그는 이번에도 그런 그만의 이미지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느낌의 작품으로 우리를 이끈다. 일본, 미국 등의 작가들이 문장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사폰은 유럽문학의 또 다른 매력을 전해줄 것이다.
<9월의 빛> 검은 그림자의 전설이라는 부제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표지에서부터 조금은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야기는 소벨가족의 시선을 따라간다. 6개월간의 고통끝에 가장인 아르망 소벨이 죽음에 이르게되고 하루아침에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갈길을 잃어버린 아내 시몬, 열네살의 이레네, 그리고 막내 도리안에게 다가온 우울한, 아니 악몽에 가까운 시간들을 시선은 따라간다. 가장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소벨가족은 돈 많은 장난감 발명가인 라자루스 얀이란 사람의 도움으로 파리를 떠나 조그만 해안 마을인 파란만으로 특별한 여행을 떠나오게 된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그림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알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를 살아 숨 쉬게 만드는 힘, 즉 증오다.' -P. 101 -
원인 모를 병에 걸려 20년 넘게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얀의 아내 알렉산드라가 살고 있는 대저택 크래븐무어. 소벨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시몬에게 얀은 가정관리인과 비슷한 업무를 맡기게 된다. 라자루스 얀은 아내의 침실이 있는 집의 서쪽 날개를 비롯한 몇곳의 출입이 안된다는 말과 다니엘 호프만에게 온 편지는 얀에게 직접 전달해줄 것을 요구하는 주의사항을 이야기한다. 이레네는 크래븐무어에서 일을 돕고 있는 그녀 또래의 한나의 사촌인 이스마엘에게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싹틔우게 된다.
이스마엘은 이레네에게 등대섬과 연관된 9월의 빛에 대한 전설을 들려준다. 알마 말티스, 9월의 어느밤 등대섬을 향했던 그녀의 배는 폭풍우로 산산조각 나게되고 이스마엘은 그 배의 잔해속에서 발견했다는 이 미스터리한 여인의 일기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이레네에게 빌려주게 되고, 이레네는 그녀의 일기속에서 그녀를 괴롭히던 정체모를 어둠과 그림자의 공포를 마주하게된다. 그러던중 크래븐무어 숲에서 한나가 죽은 채로 발견되고 알마 말티스의 그림자, 베일에 쌓인 인물인 다니엘 호프만, 얀의 아내 알렉산드라의 비밀, 미스터리한 라자루스 얀을 둘러싼 검은 그림자의 전설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데...

<9월의 빛>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전작 [천사의 게임]과 유사한 여러가지 모티브와 이미지들을 바라보게 만든다. 소설의 배경이 된 대저택 크래븐무어는 전작에서 '탑의 집'으로 불리던 버려진 저택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 마음과 영혼을 바꾸어 놓을 힘을 지닌 책에 대한 전작의 이야기는 유리병과 그림자의 전설속에서 보여지는 느낌을 주고 있기도 하다. 안드레아스 코렐리라는 베일에 쌓인 남자는 라자루스 얀과 다니엘 호프만으로 새롭게 태아난듯 보인다. 이사벨라와의 우정과 사랑은 이스마엘과 이레네의 풋풋한 사랑으로 되살아난다.
역시 전작의 느낌은 이 작품이 주는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현실과 환상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계속에서 모험과 낭만, 불멸의 사랑이 빚어낸 검은 그림자의 전설은 오히려 전작에 비해 조금은 더 쉽게 조금더 환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스마엘이 들려준 9월의 빛 전설, 알마 말티스의 일기와 라자루스 얀이 들려주는 평범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들, 라자루스 얀을 둘러싼 죽음과 어둠의 그림자, 그리고 대저택 크래븐무어에 가득한 로봇 인형과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독자들이 쥔 책을 넘기는 손놀림을 빠르게 만든다.
'이스마엘. 세상에는 그림자들이 있어. 너와 내가 그날 밤 크래븐무어에서 싸웠던 그 그림자보다도 훨씬 더 사악한 그림자들이 말이야. 그런 그림자들 옆에 있으면 다니엘 호프만의 그림자는 그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해. 그건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그림자야.' - 이레네의 편지 中 -
'네가 보는 모든 걸 믿어서는 안 돼. 우리의 눈이 보는 현실의 모습은 단지 허상, 그러니까 광학적 효과일 뿐이야' 빛은 아주 훌륭한 거짓말쟁이지...' - P. 31 -
책을 내려놓으면서도 독자들은 어느것이 현실이고 어느것이 환상인지 좀처럼 가늠하기 힘겨울지도 모를것이다. 사폰이 그려낸 몽환적 분위기와 미스터리한 인물들과 그속에서 벌어진 사건은 우리 가슴속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그림자들이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래도록 마음을 흔들고 여운을 남기는 이 작품은 아마도 '불멸의 사랑'을 그려내고 있는 가슴 찡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그 속에 담겨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게하는 몽환적느낌의 이 이야기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라는 이름을 조금더 가까이 우리곁에 붙들게 만든다. 마력처럼 끌리는 <9월의 빛> 그리고 이어질 [안개의 왕자]와 [한밤의 궁전]이 전해줄 사폰만의 색깔있는 미스터리가 더욱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