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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산 자들은 죽은 자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 있었을 때의 추억은 사랑하고 언제까지나 기억에 남기려 하지만, 싸늘하게 썩어가는 시체는 두려워하고 잊으려 합니다.' -P. 108 -
얼마전 [해피엔딩] 이라는 작품을 만났다. 제목과는 사뭇 다르게 공동묘지를 담은 사진들과 '죽음'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삶을, 행복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는데 아직까지도 그의 짧은 글과 사진속에서 느껴지던 여운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삶을 생각한다. 생전에 쓰는 한장의 유서를 통해 앞으로 살아갈 미래와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생각하고 행복의 의미를 꿈꾸기도 한다. 죽음은 이처럼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말 자체로서 삶의 의미를 고찰하게 만들기도 한다.
삶과 죽음! 한편의 미스터리 추리소설이 그 주제에 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드는 시간을 던져주고 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제목만 놓고 봤을때 흡사 종종 미국 소설이나 영화속에 등장하는 좀비나 드라큘라가 가장 먼저 연상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일본작가의 작품이라는 부분에서 작은 물음표가 생겨난다. 조금은 낯선 이름, 야마구치 마사야의 1989년 데뷔작인 이 작품은 미국 뉴잉글랜드 벽지의 툼스빌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죽은 시체들이 되살아난다는 독특한 설정하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움직임을 멈춘 산 자와 움직이기 시작한 죽은 자. 기묘하게도 그 방안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뒤바뀐 것 같았다.'
구형의 핑크색 폰티악 영구차를 타고 질주하는 남녀가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린'과 그의 옆을 지키는 '체셔'가 바로 그들이다. 미국 뉴잉글래드 툼스빌에서 대규모 공동묘지를 운영하는 스마일리 발리콘의 손자인 그들은 할아버지 스마일리의 유언장 재발표 문제로 발리콘에 모여든다. 한편 미국에서는 시체 부활 사건이라는 말도 않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고 여고생 연쇄살인 사건도 일어나게 된다. 유언장 발표 후 가진 만찬회에서 스마일리의 장남 존은 스마일 공동묘지의 개혁을 선언한다. 새로운 사업을 통해 전세계적인 규모로 사업을 키우겠다는 존 발리콘!
그 만찬회 다음날, 그린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게 왠일? 그린 조차도 시체 부활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 시체로 되살아난다. 죽음으로써 육신은 조금씩 부패하게 되지만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범인을 잡으려는 그린, 그를 도와주는 스마일리의 주치의 허스 박사... 하지만 그의 죽음의 비밀을 풀기도 전에 할아버지 스마일리마저 죽음을 맞게되고, 발리콘가에는 이런 연속적인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리고 또 한명 여고생 살인사건을 추적하던 트레이시 경감의 가세로 발리콘 가에서 벌어지는 이 미스터리는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의 무게속에 이야기는 독자들이 마음대로 자유롭게 추리하지 못하도록, 옴짝달싹 못하도록 다양한 사건과 흔적들을 풀어놓는다. 그린과 스마일리를 시작으로 유산 상속에 얽힌 연쇄살인, 할로윈 데이를 즈음한 여고생 연쇄살인, 20년전 할러윈 살인과 제이슨-제임스 사건의 연관성, 죽은 스마일리의 자살설, 노먼 = 제이슨 가설, 스마일리=존 교체설, 그리고 거듭되는 시체 부활 사건... 좀처럼 미스터리가 풀릴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작가는 독자들을 점점더 헤어나올 수 없는 미로속으로 쉴새 없이 등을 떠민다.

'결국 죽은 자보다 산 자가 우선입니다. 이 사회는 역시 산 자를 위해 존재하고, 산 자가 자신들의 형편을 우선시하며 죽은 자를 지배하는 구도인 겁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죽어버리면 산 자들의 지배와 평가를 감수해야만 하죠. 죽음이란 죽은 자들의 자기평가를 누르고 산 자들의 관점이 승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P. 108 존의 말 中에서 -
'최후의 심판이 찾아오는 날, 육신은 영광속에서 부활 하느니라. [다니엘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땅의 티끌 속에 잠든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깨어나리라. 그들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또한 수치와 끝없는 치욕을 받는 이도 있으리라.' - P. 125 모니카의 말 中에서-
'자연계에서 죽음이란 평형상태이자, 생명 활동에 필요한 외부로부터의 보급이 사라졌을때 모든 생명이 도달하는 자연스러운 상태지...논리적으로 말하면 생명의 정의는 '죽음의 결여'가 될게다.' - P. 172 , 허스박사의 말 中에서 -
<살아있는 시체들의 죽음>속에는 죽은자와 산자의 경계가 모호하다. 살아있지만 죽은것과 마찬가지로 삶을 살아가는 과거에 얽매인 제이슨이 있는가 하면, 죽었지만 살아있는 이보다 더 용감하고 과감하게 미스터리의 비밀을 풀어가는 죽은 시체 그린의 모습이 있다. 모니카, 허스박사, 그리고 존 발리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삶과 죽음이라는 모호한 경계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죽음과 삶에 대한 철학과 나름의 정의를 통해 삶과 죽음, 그 가치를 새삼 일깨우게 된다.
또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죽음>에서 빼놓은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웃음의 코드이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이 작품이 무겁지 않고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첫 등장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당하는 굴욕에 이어 '또 다시 시체에게 굴욕을 당해야 하는' 트레이시 경감의 계속된 굴욕, '주인공이 죽은 이야기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하며 등장하자마자 죽어버리는 그린의 굴욕, 핑크색 폰티악 영구차를 얻게 될 때 느꼈던 '뉴욕에서는 건달이나 형사나 똑같이 도요타 영업사원을 이기고 싶어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는 웃음에 이르기까지 무거운 소재속에 다양한 웃음이 감추어 있다.
'실은 나도 살아 있는 시체였어요. 나는 한참 전에 죽고 말았어요. 일단 거기서부터 이야기해야겠지요.' - P. 583 , 그린의 말 中에서 -
작품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매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주인공인 그린이 펑크족이라는 설정은 탁월해 보인다. 죽었지만 죽음을 감추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을 하게되는데 거기에 펑크족이라는 설정은 남자의 화장이라는 어색함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더불어 그린과 함께하는 다소 엉뚱한 체셔를 통해 무거움에서 벗어나 청춘소설이 가질 수 있는 풋풋함을 선물해주고 있다. 리처드 트레이시 경감의 치밀하면서도 약간 부족한 모습, 모니카가 가진 카리스마, 미스터리한 스마일리 발리콘 등 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시체들이 되살아난다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 독특한 세계를 통해 철학과 예술, 종교를 망라하고 그속에서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 특별한 이야기속에 독자들은 마음을 온전히 빼앗기고 만다.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매력인 반전은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 그린의 사건해결을 통해서 중간 중간에 숨겨져 있었던 사건의 복선들을 발견하게 되면 독자들은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주님께서 모든 교회에 하는 말씀을 들으라. 승리를 얻은 자는 두 번째 죽음으로 멸하지 않으리라.' - P. 623 , 요한묵시록 2장 11절 -
죽음이란 무엇인가? 아니 삶이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되살아난 시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쫓다보면 우리의 현실속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와 의식을 되돌아보게 된다.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고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추리소설의 영역을 넘어 깊이있는 철학적 사색을 더해주는 이 작품, 상당히 매력적이다. 웃음이 있고, 복잡한 추리속에 복선과 반전이 살아있다. 무거운 소재를 그리지만 어두운 그림자보다 밝은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느낄수 있을 것도 같다. 조금은 어둡고 무거운 본격 미스터리를 넘어 유쾌함속에 철학적 사색을 가능케 하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죽음> '이 미스터리가 정말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