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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전철
아리카와 히로 지음, 윤성원 옮김 / 이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신문이나 박스를 덮고 있는 노숙자들, 출퇴근 시간의 혼잡함과 그 혼잡을 이용해 음란한 짓을 일삼는 남자들, 장애인들의 구걸과 잡상인들의 위협 판매?, 이어폰을 꽂고 꾸벅 꾸벅 조는 학생들, 뭐가 좋은지 핸드폰 문자에 푹 빠져 있는 대학생, 짧은 시간이 아깝기라도 한지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는 아가씨... 전철의 모습들을 떠올려본다. 개인적으로 전철을 이용하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 이미지 만큼은 모두가 어느정도의 공감을 갖게 할 것 같다.
조금은 오래 전에 경험한 지하철의 모습이기에 그 이미지조차 색깔이 흐릿한지도 모를일이다. 잠시 잠깐 역과 역을 지나치면서 수많은 이들이 머물고 내리는 그 반복되는 시간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잊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눈으로 붙잡는다. 짧은 시간의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어 퍼즐을 맞추어 가듯, 전철이라는 매개체로 이어진 하나의 끈을 붙잡고 사랑은 그렇게 전철에 몸을 싣는다.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하나 둘 그 짧은 시간속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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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전철>은 일본 오사카 지역의 사설 철도인 한큐전철, 이마지 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덟개의 역이 놓인 이마지 선은 10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왕복으로 운행한다. 이 짧고도 한정된 공간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랑과 삶의 모습들이 전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연결된다. 다카라즈카 역을 시작으로 니시노미야키타구치 역까지... 역마다, 전철마다, 그 좁고 짧은 시공간속에서 이어진 이들의 모습과 만남을 담아낸다.
직장생활을 하는 마사시와 도서관에서 책 쟁탈전을 벌였던 미키마우스 가방을 메고 있는 그녀, 유키와의 사랑이 바로 전철속에서 조심스레 시작된다. 한편으로 같은 회사에 다니던 남자친구를 빼앗기고 그의 결혼식에 복수라도 하듯 하얀드레스를 입고 참석했던 쇼코도 이 전철을 타고 있다. 유키와 마사시의 설레는 사랑의 시작을 보고 저주라도 퍼붓고 싶은 것이 지금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이다. 사귄지 1년이 다되어가는 미사와 가쓰야의 모습도 보인다. 미사에게 막대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휘두르는 가쓰야, 이제 미사는 이별을 결심하려 한다.

이런 유키와 마사시, 미사와 가쓰야, 쇼코의 사랑과 아픔, 이별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남편을 잃고 손녀딸고 함께 전철을 기다리던 도키에 할머니가 그 시선의 주인공이다. 유키와 마사시의 사랑의 시작을 흐믓하게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는 쇼코에게 '습격은 성공했나요?'하며 모든걸 알고 있다는듯 위로해주는, 미사에게는 '그만두는게 어때요? 고생할 거예요' 하며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도키에의 삶에 깊이가 느껴지는 시선은 전철이라는 공간에서 보여지는 숫한 만남과 인연의 모습을 소중하게 담아낸다.
이별이 있다면 또 다른 시작이 있다. 미사에게는 친구 마유미의 오빠 겐고가 있고, 쇼코는 도키에의 권유로 내렸던 역으로 이사하고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철안에서 만난 여대생과 친구가 된다. 밀리터리 오타쿠라고 따돌림 당하던 게이이치와 이름때문에 놀림받던 미호짱은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며 사랑을 키워가고 도키에 할머니조차 꼭 키우고 싶었던 개를 갖게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서로의 인연을 붙잡고 행복을 향해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내딛는다.
전철이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니시노미야키타구치에서 다카라즈카로 다시 거슬러가는 전철 안. 승객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 그건 승객들 본인밖에는 알지 못한다. 승객 수만큼의 이야기를 싣고, 전철은 끝없이 이어지지는 않을 선로를 달려간다. - P. 137 -
전철은 우리 생활에서 빼놓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편리한 교통수단이다. 지친 학생들과 직장인들, 무뚝뚝한 표정이 어울릴듯한 이 공간속에서 이제는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것 같다. 한사람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 속마음들, 아픔과 즐거움까지 이제는 그들의 표정을 통해 읽어 나갈 수 있을것 같다. 바로 <사랑, 전철>을 통해서 그런 사람냄새를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심코 지나치던 그 짧은 시간, 좁은 공간의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것같다.
이야기내내 따스함과 친근함이 묻어난다. 도키에 할머니의 시선속에 아픔을 어루만지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따스함이 뿜어져나온다. 지금까지 전철이 무표정과 딱딱함이 연상되었다면 이제부터는 나름의 이야기가 스며나오는 표정이 살아있는 따뜻하고 활기찬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전철이라는 이름속에서 떠올려질것 같다. 제비 둥지가 실제로도 많다는 고바야시역에 가보고싶다. 마사시와 유키가 바라보던 모래톱위의 '生'자는 아직도 남아 있을지, 도키에의 미니어처 닥스훈트 '켄'은 어떻게 생겼는지... 한큐전철 이마즈선을 한번쯤 꼭 타보고 싶다. 그와 그녀들의 사랑 이야기들이, 삶의 표정들이 그 공간속에 고스란이 살아 숨쉴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