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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요즘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惡人> P. 448)
요시다 슈이치. 이젠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다. 낯익지만 설레게하는 이름이다. 예전부터 그의
작품을 만나기는 했지만, 2008년에서야 요시다 슈이치의 최고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악인> 이었다. 한 여성의 죽음, 죽음을 이끈 한 청년, 그리고 주변인들... 그들을 통해 그려지는
현대사회의 문제점과 철학적, 사회적 이슈들을 평범한듯 치밀하고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의 매력
에 사로잡혔던 2008년 초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부터 요시다슈이치와 '악인'은 항상 뇌리속에
같이 의미로 인식되고있다. <악인>이 그려냈던 치열하며 격정적인 사랑을 뒤로하고 <사랑을 말해줘>
는 조금은 더 안정되고 편안함 속에서 사랑의 의미를 일깨우게 만드는것 같다.
요즘들어 차가운 날씨가 계속 이어진다. 사랑의 온도가 차가운 겨울의 기온을 조금은 낯추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사랑은 무엇일까? 이 책을 내려놓은 뒤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정의할 수 있을까?
"'당신은 귀가 들리지만, 그런건 신경 쓰지 않아요.' 라는 말 들어본적 있어?" (P.125)
귀가 불편한 교코와 방송국에서 일하는 슌페이의 우연한 만남과 사랑이 그려진다. 메이지 신궁
외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교코와 슌페이. 슌페이는 교코가 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되고
수첩과 펜으로 이어진 대화를 통해 조금씩 끌림이란 감정을 갖게된다. 그리고 얼마후 주말을 함께
보내는 사이로 발전한다. 조금씩 서로 다른 세계에 익숙했던 이들의 간격은 좁혀지고 부모님께
교코를 소개하기도 하지만 대화의 한계, 익숙치 않은 상황의 반복으로 슌페이는 의도한건 아니
지만 조금씩 교코를 멀리하게 된다. 탈레반의 대불파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게된 슌페이.
교코와의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취재를 다녀오게 된 슌페이에게 교코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를 찾아 헤메지만 그녀의 집도, 그녀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는걸 깨닫게 되는 슌페이.
너무 늦어버린건 아닌지... 슌페이와 교코의 사랑은 이렇게 끝나버리는 건지... 일과 사랑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은 무엇인지... 마지막 쿄코를 찾아 헤매는 슌페이를 보면서 우리는 사랑의
모습을 조금은 찾아낼 수 있을 것 같기도하다.
"폭이 2미터쯤 되는 돌계단을 정확히 3등분한 지점에 두 사람이 앉았다. 가깝지도, 멀지
도 않았다.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것 같은 위치였다." (P. 12)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와 같거나 혹은 나와
다르거나... 단순한 호기심으로 사랑은 시작된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워지고 서로의 삶의 방식이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속에서 그녀와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간격을 인지하게 된다. 가까운 듯
하면서도 멀고, 먼 듯 하면서도 가까운 그와 그녀. 말하고 듣는 것이 일상적이었던 그에게 수첩과 펜
은 또 다른 세상이다. 입모양으로 대화를 나눌때면 그 단어적 한계, 소통의 한계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조금씩 좁힐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간격이 점점더 커다랗게 느껴질때 사랑은 더이상 그 힘을
유지할 수 없게된다. 슌페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처음 교코가 가진 고요로 인해 갖게된
호기심, 드러나지 않았던 동정과 연민이라는 감정이 어느순간 무서움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간에 그 무서움은 둘사이의 조금더 커다란 간격으로 뒤바뀐다.
사랑은 어찌보면 소통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화두로 떠오른것 또한 소통이지만..
탈레반의 대불파괴를 취재하는 슌페이. 200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 또한 어쩌면
원활한 소통의 불가피성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란 생각을 갖게한다. 정단한 아프간의 정부로서
인정받고 싶어했던 탈레반이었지만 일부 소수에게만 그럴뿐 그들의 목소리는 공허한 외침이었을
뿐이었고 대불파괴라는 극단적 방법만이 그들의 소리를 전해주기에 이른다. <사랑을 말해줘>에서
이 대불파괴 취재와 교코와의 일을 매치시킨 상황 또한 이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이번 작품의
테마가 바로 '전달'에 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해 프로그램을 만드는
슌페이, 교코에게 전하고 싶은 메세지에 한계를 느끼는 그의 모습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의
의미와 사랑속에 담겨야하는 소통의 의미 또한 배우게된다.
"도중에 내가 뭘 찾으려 하는지 알 수 없게 됐어." ...... "보고 싶어" (P. 217)
누구나 비슷한 경험이 있을것이다. 호기심에서 시작된 사랑,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던것이 너무나
커다란 차이로 인식되고 서로간에 가졌던 커다란 간격때문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고민하던 모습. 누구나 이렇듯 사랑속에서 커다란 벽에 부딪히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디부터 이렇게 된것인지...하지만 좀처럼 쉽게 그 답을 찾을 길은
없어보인다. 슌페이의 말처럼 도중에 내가 찾으려하던 것이 무엇인지 조차 잊게되는 수도 있다.
하지만 복잡한 마음도 생각도 '보고싶다'는 말 한마디속에 모두 묻혀진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
하고, 서로간의 간격을 메워갈 수 있도록 나름의 소통방법을 찾고, 아직 사랑을 말해줄 수 있는
따스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보고싶다'는 이 말 한마디면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악인>이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들, 우리현실의 안타까움을 이야기했다면 <사랑을 말해줘>는
소중한 사람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과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낸
요시다 슈이치. 이제 <악인>과 함께 <사랑을 말해줘> 또한 기억될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말이자 가장 소중한 말인 '사랑'. 책을 내려놓으면서도 '사랑이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그대신 이렇게 말해보고 싶어진다. 내게 소중한 그 사람이
"너무 '보고싶다'. 너무나 '보고싶어진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