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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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편이 나은 듯. 그래도 마이클 시점으로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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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프 다이어의 <그러나 아름다운>를 반쯤 읽다가 더 이상 흥미가 안 생겨 반납했다. 예전부터 읽으려고 했었던 책 리스트 중에서 첫 번째로 읽게 된 소설은 로맹가리의 <그로칼랭>이다. 분량도 얼마 안 되고 내용도 흥미로워서 금방 읽을 것 같다. 느슨하고 경쾌하게 서술돼 안심하다가 총소리를 들은 것처럼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로칼랭>은 다 읽으면 꼭 나름 서평을 적어보도록 하겠음) 영화 <원데이>를 보았다. 영화는 사전 정보 없이 보자는 게 내 나름의 규칙이다. 감정이입되기를 즐기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놓치는 것도 많지만ㅡ 내 생각은 영화가 좋으면 두 번 보면 되고, 두 번 볼 때는 싫어도 분석하는 시선으로 보게 된다는 거다. 원데이도 그렇게 봤다. (머리 나쁜 나는 그제야 20년간 단 하루씩 허락된 사랑이라는 카피를 이해할 수 있었음. 혼자 감탄..) 영화를 보는 내내 '이렇게 흐르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한 부분이 꽤 많았는데, 그때마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돼서 그게 참 좋았다. 그러니까 빤한 영화는 아니었다.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주는 영화도 아니었고, 그렇다고해서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철저하게 배반하는 영화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 사실이 영화를 현실적으로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좋았던 것은, 사랑을 주제로 두 사람의 인생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거다. 엠마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놓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은 남자랑 허름한 아파트에서 동거를 한다. 덱스터는 TV쇼 사회자로 잘 나가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멀어진다. 한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지만 결국엔 이혼한다. 두 사람의 인생은 그 이후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지만, 엠마는 결국 교통사고로 죽게 되고 덱스터는 혼자 남게 된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인생에서 사랑은 어쩌면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할 테지만 에피소드는 늘 얼굴을 바꾸고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드는 법이니까. 에피소드에 불과한 사건이 삶에 침투해 중대한 사건으로 바뀌는 그 경계가 궁금해졌다. 누군들 쉽게 눈치챌 수 있을까.

 

 

내일은 보통 날보다 조금 더 바쁠 것 같다. 다음주부터는 구상해 논 글을 써야한다. 우선 자료를 모아야 하는데 잘 할 수 있겠지. 걱정 반 기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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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 공제控除의 비망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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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영원하다

 누군가 나를 오해해서 관계가 틀어지더라도 나는 좀처럼 그 오해를 풀려고 하지 않는다. 숱한 이를 겪으면서 얻은 내 나름의 미립인데, 돌이켜보면 나는 그 오해를 모르는 체 방치해서 역시 숱한 이들과 변변한 애도조차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내가 오해를 대접하는 방식이며, 마찬가지로 세속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으니, 마치 상처가 영원하듯이 오해도 영원한 것이다. 오해한 죄, 그것은 최초의 죄이며 가장 중요한 죄다. 오해의 빚은 이해로써 상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결별로써만 그 비용을 지불하는데, 오해는 완벽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오해여 영원하라ㅡ내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279쪽

어느 글에선가, 벤야민은 독서와 아름다운 여인의 몸을 보는 것은 '직관적으로' 동류(同類)의 쾌감이라고 적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썼던 이 고독한 비평가의 비밀은 이렇게 풀려간다.

내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가ㅡ만ㅡ히 바라보는 일보다 더한 쾌락은 없다. 그런데 그 쾌락의 중요한 부분은 솟아오르는 직관을 사냥한 짐승의 모가지를 누르듯 지그시 밟는 일이다. 글(읽기)은 정화된 욕심 곧 의욕이며, 뼈에 가해지는 순결한 고통이다. 오직 지겨운 연극만이 볼만하듯이, 이해할 수 없는 글들만이 내 시간을 연극(게임)처럼 '의심할 수 없이' 가득 채운다.

그러나 아샤(Asja)와의 연애가 난해하게 꼬이자 벤야민의 열정은 하릴없이 텍스트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벤야민의 쾌락은 여인과 문자 사이에서 부침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아샤(=성가신 난해함)같은 독서를 견디지 못한 셈인데, 내 느낌으로는, 독서에서 얻을 수 있는 지고의 쾌락은 곧 아샤 같은 것!
-133쪽

글 쓰는 법, 한 가지



가령 백양사나 천은사 주변을 무엇인가 미안하고 부끄러운 듯 멈칫거리면서, 한순간 지성에 얹힌 표상보다 빠르게 몸을 움직여보면, 어떻게 좋은 글이 써지는지, 환히, 다가온다. 좋은 곳이나 물건을 공대하는 일은 관념의 골수(骨髓)를 바스라뜨려 하아얀 의욕 속으로 들어가는 노릇인데, 그제야 낮아진 글들이 손가락으로 모여 관념을 통하지 않고 저절거린다. 그것은, 사양(斜陽)의 나무를 소리 없이 만지는 심경이다.
-215쪽

J에게

생각이 좋은 사람보다 글(쓰기)이 좋은 사람이 되십시오. 글이 좋은 사람보다 말(대인대물 상호작용)이 좋은 사람이 되면 더 좋지요. 말이 좋은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생활양식이 좋은 사람일겝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좋은 것은 '희망'이 좋은 사람이니, 그런 사람이 되도록 애쓰십시오. 물론 이중에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희망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지 마세요.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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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중, 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것은 나의 유년 시절이다. 바라보고 있어도 폐기된 시간의 회한을 느끼게 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유년기뿐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불가역성이 아닌 환원불가능성이기 때문에. 발작적으로 드러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유년시절에서 나는 나 자신의 어두운 이면, 권태, 상처받기 쉬움, 여러가지 절망들(다행히도 복수Pluriels인)에 대한 소질, 불행하게도 모든 표현으로부터 단절된 내면적 동요를 명확히 읽어낼 수 있다.

 

   동시대인?

 

   나는 걷기 시작했고, 프루스트는 아직 살아있었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집필을 끝내던 중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종종 그리고 많이 권태로워했다. 그 권태는 아주 일찍부터 시작해 나의 일생 동안 간헐적으로 지속됐으며(일과 친구들 덕분에 점차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언제든지 겉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공황처럼 언습하는 권태였으며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까지 진행됐다. 예를 들어 토론회, 강연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낯선 밤 파티, 집단적인 놀이 등을 통해 내가 맛보는 권태. 권태가 드러날 수 있는 여느 장소에서 어김없이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권태는 나의 히스테리인가? 

 

 

   나는 한 번도 이것과 닮은 적이 없다!ㅡ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이것과 닮았다 혹은 닮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이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것을 어디에서 포착할 수 있는가? 어떤 형태학적 혹은 표현적 기준에 근거하는 것일까? 당신의 진짜 육체는 어디 있을까? 영원히 당신을 영상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자는 바로 당신뿐이다. 당신의 눈이 거울이나 대물렌즈에 던지는 시선에 의해 우매해져 버린 모습 이외에 당신은 결코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다. (나의 눈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눈이 너를 보고 있을 때뿐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육체에 관하여, 당신은 상상계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ㅡ『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 그녀는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은 채로 살아 있다. 이 사실은 무얼 말하는 걸까. 그건 내가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 미친 것처럼, 정신이 다 나가버릴 정도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건, 그 불안으로부터 한 발짝도 비켜날 수 없는 건 바로 그때문이리라.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도의 슬픔으로, 마음의 번민으로 내내 시달리면서도 (그것도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결코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지독하게),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거의 막돼먹은 아이처럼) 여전히 잘 돌아가는 습관들이 있다. 욕망의 낄낄거림, 작은 탐닉들, 난-널-사랑해라는 욕망ㅡ 아주 빨리 사라져버리는, 곧 다시 다른 사람에게 방향을 바꾸는ㅡ 그런 욕망으로 가득한 담론의 습관들.

 

 

   FW는 고통스러운 사랑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있다. 그는 괴로움을 당한다. 언제나 침울하고, 메말라 있고,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등등, 하지만 그는 사실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죽지 않았으니까 등등. 그의 곁에서, 그가 말하는 걸 귀 기울여 들으면서, 나는 침착한 표정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만 그의 얘기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마치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 같은 건 내게 일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내게 가능한 길은 둘이다. 그러나 서로 반대되는 두 길:

1. 자유로워지기, 단단해지기, 진실을 따라서 살기

(과거의 나를 뒤집기)

2. 순응하기, 편안함을 사랑하기

(과거의 나를 더 강화하기)

 

 

『애도일기』

 

 

 

1. 오늘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를 읽었다. 배껴 쓴 부분은 책 앞부분에 사진과 함께 실려있는 글들이다. 롤랑바르트의 책을 많이 읽어본 게 아니라서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순 없다. 더구나 구조주의자, 사회학자, 기호학자, 문화비평가의 롤랑바르트가 아닌 에세이스트로서의 그의 글을 즐겨 읽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게 영향력있는 학자이기 전에 유약한 한 인간이다. 인간적이라는 말을 나는 경계하는 편이지만, 그는 정말이지, 인간적이다. <애도일기>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그의 글쓰기가 자신의 감정을 의심한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얼마나 이중적인가. 자신의 슬픔 안에서 자신의 슬픔을 나열/전시하는 데 충실하는 것보다 자신의 슬픔을 마주하며 그 슬픔을 의심/분석하려 애쓰고, 결국엔 실패한다. 그 실패는 슬픔보다 더한 슬픔으로 우리에게 각인된다.   

 

 

 

 

 

 




 

 

2. 오늘은 영화 <팩토리걸>을 보았다. 사진은 영화의 주인공 에디 세즈윅이다.약물중독으로 28살에 죽었다. 내가 여자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일까. 나는 한 여자의 일생을 담은 영화/소설에 관심이 많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담은 영화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한 남자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뮤즈'로서의 그녀들은 근사하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사람들은 고독한 예술가의 자기파괴적인 삶에 쉽게 매료될까? 천재 예술가의 요절은 그를 신화화하고, 그의 작품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 반고흐의 유명한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시절 반고흐를 떠올리게 된다. 귀를 자른 후 요양원에서 고립되어 정신적 혼란을 겪었을 그의 상황은 그림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는 고통의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고통에 대한 나의 생각은, 고통은 오직 멀리서 봤을 때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거다. 고통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말할 나위없고, 고통받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마저도 우리는 고통에게 어떠한 미사여구도 붙여줄 수 없다.(타인의 고통이 자신을 잠식시킬까봐 두려워 피하는 본능적 성향까지) 어쨌거나 나는 그녀의 삶이 안타깝고, 애처롭다. 그녀의 사연은 '고통은 비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3.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가 끝나면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겠지. 오늘 아주 소중한 소포를 받았다. 연필 14자루와 노트, 그리고 편지… 노트엔 빼곡하게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그것도 4월 16일부터 6월 18일까지 적어 내게 선물한 것이다. 나는 어떠한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그녀에게 무엇을 해줘야겠다는 다짐이 아닌, 그녀에게 진실할 수 있도록. 감정에 대한 문제다. '진실'이라는 나약한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최선'이라는 전제를 붙이고 싶다.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진실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감사하고, 슬프고, 다시 감사하고, 또 다시 슬픈, 그런 밤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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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 1일째. 도서관 첫 출근. 나는 인문실로 배정 받았다. 오늘 내가 한 일은 물먹는 하마를 도서관 벽장에 넣어두는 일이었다. 다 쓴 것을 벽장에서 꺼내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기 때문에 칼로 찢어 물을 털어내는 작업도 같이 했는데, 그게 손에 묻었는지 하루종일 손이 쓰렸다. 오늘부터 읽은 책과 영화를 기록하기로 했다.  

 

 

1.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과 로쟈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었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쿤데라의 에세이집이기 때문에 편하게 목차를 보고 골라 읽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영화 비평 부분을 읽었다. 레오 까락스의 사랑이야기 3부작 중 <나쁜 피>에 관한 비평이 인상적이었다. 두 권의 책은 도서관 서랍에 놓고 며칠간 읽을 생각이다. 제프 다이어의『그러나 아름다운』을 빌려서 집으로 왔다. 재즈 아티스트들의 삶을 논픽션 소설 형식으로 쓴 책이다. 한유주 작가가 번역을 맡았다. 찾아 보니까 한유주 작가는 제프 다이어의 다른 소설도 제법 번역을 한 것 같다. 제프 다이어의 『지속의 순간들』도 곧 읽어볼 예정이다.

 

 

2. Life of Pi를 봤다.  워낙 유명해서 굳이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얀 마텔의 <파이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이안 감독이 찍었다는 소식에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가 막 내렸던 영화인데 오늘 학교 DVD실에서 만났다. 보는 내내 영상미에 감탄했다. 3D로 봤으면 정말 환상이었겠다 싶어 아쉬움이 남기도 하고.  중년이 된 파이가 작가에게 '신앙은 믿음의 문제'라고 얘기했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종교적으로 흐를까 걱정 했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우라는 걸 알게 됐다. 이 영화는 상상력과 현실성의 경계에 서 있다고 본다. 파이가 맞닥뜨린 세계는 우리에게 낯선 세계임은 분명하지만 상황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파이의 고뇌는 현실적이다. 이러한 현실성 확보에 한 몫을 했던 게 파이와 리처드바크(호랑이)의 아슬아슬한 관계가 아니었나 싶다. 서로에게 위협을 하고 기선제압을 하려 애쓰며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는 모습은 동물과 인간의 우정이라는 동화적인 훈훈한 결말로 흐르지 않게 했다. 그래서인지 기력이 완전히 쇠해진 리처드 바크의 얼굴을 감싸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파이의 모습이 더욱 진정성있게 다가왔다.

 

3. 운동을 해야겠다. 생활의 지구력을 위해서. 요새는 몸이 무기력증을 호소한다. 자꾸만 지쳐 쓰러져 잠든다. (좌절)

오늘부터 일찍 자려고 했는데, 또 한 시를 넘겨버렸다. 흑.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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