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중, 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것은 나의 유년 시절이다. 바라보고 있어도 폐기된 시간의 회한을 느끼게 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유년기뿐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불가역성이 아닌 환원불가능성이기 때문에. 발작적으로 드러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유년시절에서 나는 나 자신의 어두운 이면, 권태, 상처받기 쉬움, 여러가지 절망들(다행히도 복수Pluriels인)에 대한 소질, 불행하게도 모든 표현으로부터 단절된 내면적 동요를 명확히 읽어낼 수 있다.
동시대인?
나는 걷기 시작했고, 프루스트는 아직 살아있었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집필을 끝내던 중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종종 그리고 많이 권태로워했다. 그 권태는 아주 일찍부터 시작해 나의 일생 동안 간헐적으로 지속됐으며(일과 친구들 덕분에 점차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언제든지 겉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공황처럼 언습하는 권태였으며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까지 진행됐다. 예를 들어 토론회, 강연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낯선 밤 파티, 집단적인 놀이 등을 통해 내가 맛보는 권태. 권태가 드러날 수 있는 여느 장소에서 어김없이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권태는 나의 히스테리인가?
나는 한 번도 이것과 닮은 적이 없다!ㅡ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이것과 닮았다 혹은 닮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이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것을 어디에서 포착할 수 있는가? 어떤 형태학적 혹은 표현적 기준에 근거하는 것일까? 당신의 진짜 육체는 어디 있을까? 영원히 당신을 영상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자는 바로 당신뿐이다. 당신의 눈이 거울이나 대물렌즈에 던지는 시선에 의해 우매해져 버린 모습 이외에 당신은 결코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다. (나의 눈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눈이 너를 보고 있을 때뿐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육체에 관하여, 당신은 상상계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ㅡ『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 그녀는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은 채로 살아 있다. 이 사실은 무얼 말하는 걸까. 그건 내가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 미친 것처럼, 정신이 다 나가버릴 정도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건, 그 불안으로부터 한 발짝도 비켜날 수 없는 건 바로 그때문이리라.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도의 슬픔으로, 마음의 번민으로 내내 시달리면서도 (그것도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결코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지독하게),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거의 막돼먹은 아이처럼) 여전히 잘 돌아가는 습관들이 있다. 욕망의 낄낄거림, 작은 탐닉들, 난-널-사랑해라는 욕망ㅡ 아주 빨리 사라져버리는, 곧 다시 다른 사람에게 방향을 바꾸는ㅡ 그런 욕망으로 가득한 담론의 습관들.
FW는 고통스러운 사랑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있다. 그는 괴로움을 당한다. 언제나 침울하고, 메말라 있고,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등등, 하지만 그는 사실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죽지 않았으니까 등등. 그의 곁에서, 그가 말하는 걸 귀 기울여 들으면서, 나는 침착한 표정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만 그의 얘기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마치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 같은 건 내게 일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내게 가능한 길은 둘이다. 그러나 서로 반대되는 두 길:
1. 자유로워지기, 단단해지기, 진실을 따라서 살기
(과거의 나를 뒤집기)
2. 순응하기, 편안함을 사랑하기
(과거의 나를 더 강화하기)
『애도일기』
1. 오늘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를 읽었다. 배껴 쓴 부분은 책 앞부분에 사진과 함께 실려있는 글들이다. 롤랑바르트의 책을 많이 읽어본 게 아니라서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순 없다. 더구나 구조주의자, 사회학자, 기호학자, 문화비평가의 롤랑바르트가 아닌 에세이스트로서의 그의 글을 즐겨 읽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게 영향력있는 학자이기 전에 유약한 한 인간이다. 인간적이라는 말을 나는 경계하는 편이지만, 그는 정말이지, 인간적이다. <애도일기>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그의 글쓰기가 자신의 감정을 의심한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얼마나 이중적인가. 자신의 슬픔 안에서 자신의 슬픔을 나열/전시하는 데 충실하는 것보다 자신의 슬픔을 마주하며 그 슬픔을 의심/분석하려 애쓰고, 결국엔 실패한다. 그 실패는 슬픔보다 더한 슬픔으로 우리에게 각인된다.
2. 오늘은 영화 <팩토리걸>을 보았다. 사진은 영화의 주인공 에디 세즈윅이다.약물중독으로 28살에 죽었다. 내가 여자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일까. 나는 한 여자의 일생을 담은 영화/소설에 관심이 많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담은 영화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한 남자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뮤즈'로서의 그녀들은 근사하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사람들은 고독한 예술가의 자기파괴적인 삶에 쉽게 매료될까? 천재 예술가의 요절은 그를 신화화하고, 그의 작품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 반고흐의 유명한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시절 반고흐를 떠올리게 된다. 귀를 자른 후 요양원에서 고립되어 정신적 혼란을 겪었을 그의 상황은 그림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는 고통의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고통에 대한 나의 생각은, 고통은 오직 멀리서 봤을 때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거다. 고통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말할 나위없고, 고통받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마저도 우리는 고통에게 어떠한 미사여구도 붙여줄 수 없다.(타인의 고통이 자신을 잠식시킬까봐 두려워 피하는 본능적 성향까지) 어쨌거나 나는 그녀의 삶이 안타깝고, 애처롭다. 그녀의 사연은 '고통은 비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3.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가 끝나면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겠지. 오늘 아주 소중한 소포를 받았다. 연필 14자루와 노트, 그리고 편지… 노트엔 빼곡하게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그것도 4월 16일부터 6월 18일까지 적어 내게 선물한 것이다. 나는 어떠한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그녀에게 무엇을 해줘야겠다는 다짐이 아닌, 그녀에게 진실할 수 있도록. 감정에 대한 문제다. '진실'이라는 나약한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최선'이라는 전제를 붙이고 싶다.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진실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감사하고, 슬프고, 다시 감사하고, 또 다시 슬픈, 그런 밤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잘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