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 입니다

엄청난 보물을 찾아내고,자칫 사라질 뻔한 문명을 밝혀낸 꿈 같은 이야기. 그리스 영웅들의 용맹했던 옛날 이야기 일리아드 를 읽으면서 자라난 일곱살 소년이 품었던 꿈,  일리아드에 매료된 이 소년은 "하인리히 슐리먼" 이라는 독일 소년입니다

일리아드란 ‘일리온에 관한 시’라는 뜻인데,일리온은 소아시아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라는 옛 도시를 말합니다.  이 소년이 성인이 되어 불타버린 트로이 성과 왕의 보물들을 찾겠다던 꿈을 39년 만에 이룬 이야기입니다.

긴글이지만 무척 흥미있는글 입니다.

그럼시작합니다...

1822년 독일 메클렌부르크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목사 집안에 태어난 하인리히 슐리만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영웅들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일리아드’는 오늘날의 서양 문학을 낳았으며,헤브라이즘과 함께 서양 문명을 이끌어온 헬레니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2,700년 동안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하여 ‘일리아드’를 즐겨 읽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그저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전설을 모아 엮은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여왕 헬레네를 유괴함으로써 벌어진 트로이와 그리스의 10년 전쟁 모습을 그린 이 이야기에는,여러 신들이 인간과 어울려 싸움에 끼어들고 심지어는 다치기도 한다.

누가 보아도 이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년은 믿었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같은 천하 무적 용사들은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이며,트로이 성도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가난 때문에 소년의 학교 생활은 열네살에 끝났다.

소년은 작은 도시의 식품점에서 5년 동안 점원일을 한 뒤 배 안에서 심부름꾼 노릇도 하고 작은 도매상을 경영하기도 하면서 돈을 벌어 마침내 큰 무역회사 사장이 되었다.

그 10여년간 슐리만이 이룬 것은 돈만은 아니었다.

그는 난로도 못 피운 다락방에서 덜덜 떨면서 혼자 아홉나라 말(영국,프랑스,네덜란드,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러시아,스웨덴,폴란드)을 배웠다.

어찌나 정신을 쏟아 공부했는지,그는 한나라 말을 6주일 만에 터득하곤 했다.

1856년 돈을 많이 번 슐리만은 드디어 그리스 말을 공부했다.

역시 6주 만에 그리스 말을 다 익힌 슐리만은,다시 석달 동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두루 꿸 만큼 공부했다.

그가 그리스 말을 제일 나중에 배운 까닭은 트로이 성을 찾는 데 드는 돈을 벌 때까지는 절대 그 일에 뛰어들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다.

1864년 슐리만은 견문을 넓히고자 세계 여행을 했다.

그는 그때 라틴 말과 아라비아 말도 배웠는데,일기는 언제나 자기가 머물고 있는 나라 말로 썼다.

1868년 마흔여섯살 때 백만장자 슐리만은 트로이를 찾아 나섰다.

그가 처음 찾은 곳은 부나르바시.

그 무렵 학자들은 만약 트로이가 실제로 있었던 도시라면 부나르바시 마을 근처에 있었으리라고 추측했다.

‘ 일리아드’의 스물두번째 시에 더운물이 솟는 샘과 찬물이 솟는 샘 이야기가 나오는데,부나르바시 마을에도 비슷한 샘 두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나르바시를 둘러본 슐리만은 그곳은 절대로 트로이가 아니라고 단정했다.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큰 성을 쌓을 만한 큰 언덕이 없었다.

‘ 일리아드’에는 그리스군이 배와 트로이 성 사이를 하루에 몇 번이나 오갔으며,트로이 성은 방이 62개나 되는 큰 성이라고 묘사되어 있었다.

슐리만은 ‘일리아드’에 나오는 전투 장면을 떠올리면서 바닷가를 누볐다. 그리고 마침내 부나르바시에서 북쪽으로 두시간 반 거리에 있는 뉴 일리엄 마을을 찾아냈다.

그곳은 바닷가에서 한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었으며,언덕 위가 가로 세로 각각 235m쯤 되는 널찍한 네모꼴 터였다.

‘일리아드’에는 헥토르와 아킬레우스가 비탈에서 성을 세바퀴 돌면서 싸웠다고 되어 있다.

부나르바시 언덕은 비탈이 너무 심해 달리면서 싸우기가 어렵지만 뉴 일리엄의 언덕은 밋밋해서 뛰면서도 너끈히 싸울 수 있어 보였다.

뉴 일리엄,

오늘날에는 히사를리크(궁전)라고 불리는 언덕을 자세히 살펴본 슐리만은 그곳이야말로 3,000년 전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용사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10년 동안 싸운 트로이 성터라고 굳게 믿었다.

“누구든지 이곳에 발을 디디면 이 히사를리크 언덕은 자연이 만든 위대한 성이라고 느끼게 된다. 성을 튼튼히 쌓으면 이곳에서 트로이 벌판 전체를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이곳과 견줄 만한 성터는 어디에도 없다. 히사를리크에서는 이다산이 보이는데 주피터는 그 꼭대기에서 트로이 성을 내려다보았다고 하지 않는가.”

평생을 별러온 일이 눈앞에 닥치자 슐리만은 온몸을 내던져 트로이 찾는 일에 매달렸다.

1869년 그는 꿈에 본 헬레네처럼 아름다운 그리스 처녀 소피 엥가스트로노메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이 바라는 대로 아름답고 가난하고 헌신적이며,‘일리아드’를 아주 잘 아는 여자였다.

1870년 4월,슐리만과 그의 아내는 히사를리크 언덕에서 첫 삽을 떴다.

그 뒤로 1873년 6월15일까지 3년여 동안 그들은 일꾼 100여명을 데리고 37m 높이 언덕에서 1톤 트럭 25만 대분이나 되는 흙을 파냈다.

슐리만은 열병과 좋지 않은 물,다루기 어려운 일꾼과 싸웠다. 힘든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슐리만이 트로이 발굴에 나선 뒤로 그가 죽은 뒤에까지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유는 슐리만이 학자가 아니라는 단 한 가지. 그들은 처음에는 전설 따위를 믿고 무턱대고 땅을 파헤친다고 비웃었고,나중에는 그가 비과학적이고 비도덕적으로 트로이 유적을 망가뜨렸다고 헐뜯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슐리만이 수십년 동안 품어온 꿈,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의 꿈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신들린 듯이 발굴에 매달렸고,소피도 남편과 함께 모든 어려움을 나누었다.

일리아드’에는 아테네 신전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신전은 언덕 한가운데 있을 터이고 둘레의 평평한 땅에는 성벽이 있었을 것이다.

슐리만은 자기가 추리한 대로 곧바로 언덕을 파들어갔다.

얼마 안되어 그곳에 화려한 도시가 있었다는 증거가 하나둘 나타났다.

무기·가재도구·장식물·그릇이 나오고,언덕은 마치 거대한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파들어갈수록 층층이 다른 유적지를 드러냈다.

층마다 다른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듯이 전혀 다른 유물과 집터가 한꺼풀씩 벗겨졌다.

폐허를 파면 그 밑에 또 다른 폐허. 그 곳을 파면 그 아래 또 하나의 폐허. 슐리만은 무려 일곱 개나 되는 도시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쇠붙이를 쓸 줄 몰랐던 원시 시대의 두 취락지까지 합하여,히사를리크 언덕에 층층이 파묻힌 도시는 모두 아홉 개나 되었다.

맨 위 층(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이 제물을 바쳤던 2200년 전 도시로 밝혀졌다)에서부터 맨 아래 층 도시 가운데 어느 것이 트로이인가?

슐리만은 양파 껍질을 벗길 때마다 온갖 지식과 자료를 끌어내 트로이를 찾으려고 애썼다.

맨 끝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층에서 그는 불에 탄 자취와 튼튼한 성벽,거대한 성문터를 발굴했다.

그는 이 성벽이야말로 프리아모스왕의 궁전을 빙 둘러쌌던 벽이며,성문터는 저 유명한 스카에아 문이라고 믿었다.

1873년 6월 어느 더운 날 아침,슐리만은 그가 평생 꿈꾸어 온 트로이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일꾼들은 슐리만이 프리아모스 궁전이라고 믿는 돌 건물 8.5m 아래에서 흙을 파내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일꾼들의 삽 끝을 지켜보던 슐리만의 눈이 갑자기 빛을 뿜었다.

“여보,얼른 저 사람들을 돌려보내!”

그가 아내의 팔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말해. 나머지 시간은 쉬어도 좋다고 말이야. 빨리!”

일꾼들은 좋아라고 자리를 떴다.

“당신의 빨간 숄을 가져와요!” 슐리만은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자 주머니칼로 어느 한 곳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구덩이 위의 무거운 성벽이 언제 무너져내릴지 몰랐지만,보물상자를 놓고 앞뒤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슐리만이 찾아낸 유물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팔찌,브로치,목걸이,접시,단추 등 금으로 만든 온갖 것이 쏟아져 나왔다. 자그마치 8,700여점이나 되는 금붙이 가운데서도 가장 눈부신 것은,순금 조각 1만6,000개로 이루어진 금관이었다.

“누군가가 프리아모스 궁전에서 이것들을 급히 상자에 넣은 뒤 자물쇠에서 열쇠를 뺄 틈도 없이 가지고 나온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성벽 위에서 적의 손에 죽었거나 화살에 맞았으리라.”

슐리만이 회고한 말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그 보물들이 트로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야 그것이 트로이보다 1,000년 앞선 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그때 그는 보물을 집으로 옮긴 뒤 갖은 모험을 무릅쓰고 터키 국경선 밖으로 빼돌렸다

(나중에 이 보물들은 슐리만의 유언에 따라 베를린의 선사시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탈취돼 지금은 러시아가 보관하고 있다).

슐리만은 트로이에만 너무 열중했던 탓에 다른 시대 건물들을 무너뜨리거나,중요한 실마리가 될 벽들을 깨뜨리며 깊이 파들어갔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 덕분에 밑바닥에서 여섯번째 층에 묻힌 트로이가 드러난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슐리만이 새로운 유적을 발굴할 때마다 전세계 신문에 발표하면 고고학을 모르는 사람들도 열광했다.

1873년에는 집에서나 거리에서나,우편마차에서나 기차 안에서나 전세계 어디에서고 트로이 이야기가 넘쳐 흘렀다.

마침내 트로이 성의 실체를 발견하다 트로이를 비롯하여 미케네와 티린스의 유적을 발굴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슐리만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이 있었다.

그가 히살리크 언덕에서 트로이 유적을 발견했다고는 하지만, 히살리크의 유적은 시대에 따라 여러 층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이 정확하게 어디서 전개되었는지 확정짓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호머의 트로이 전쟁에서 발굴의 계기를 얻은 슐리만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아직도 해명되지 못했다는 것은 그동안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히살리크 언덕에서 트리이 전쟁 시대의 유적을 확정짓겠다고 결심한 슐리만은 1889년에 히살리크로 돌아가 다시 발굴을 시작했다.

물론 이때는 공동 발굴자로 고고학의 전문가와 동행했다.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아마추어라는 딱지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90년에 슐리만이 트로이의 경계라고 믿었던 지점에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커다란 건물들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출토된 도자기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미케네 시대의 것들이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해졌다. 슐리만은 제1차 발굴 당시 자기가 찾던 트로이를 통과해서 파 내려갔던 것이다.

이전의 발굴에서 그는 자신이 발견한 아홉 개의 도시 중 밑에서 두 번째 것이 트로이라고 믿었다.

불탄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위에 있는 일곱 개 도시들의 유적을 완전히 파괴하면서 발굴했다.

그러나 제2차 발굴을 통해 그는 비로소 자신이 발견했던 보물 상자가 사실은 트로이 전쟁 때 것이 아니라 그보다 1천 년이나 앞선 시대의 유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슐리만은 진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891년에 슐리만은 길을 가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트로이 유적에 대한 제3차 발굴 계획도 자연히 무산되었다.

슐리만이 사망하자 그가 찾고자 했던 전설의 트로이가 어디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결국 그가 발굴하던 커다란 건물 유적에서 발견된 미케네 양식의 도자기들이 실마리를 주었다.

그것은 호머의 트로이가 히살리크 언덕의 경계에서 훨씬 더 뻗어 발전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밑에서부터 두 번째가 아니라 여섯 번째 도시가 바로 그들이 찾던 도시였다.

그곳에서 발견된 벽은 안쪽으로 약간 경사가 져 있는데 그것은 호머의 묘사와도 일치한다.

더구나 높이가 18미터 이상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탑이 반 이상 무너진 상태로 있었다.

그 성은 가로 180미터에 세로 135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매우 튼튼하고 인상적이었다.

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왜 10년 동안이나 성을 점령할 수 없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산 정상에 우뚝 솟은 트로이 성은 전쟁이 일어났던 시대의 전투 기술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견고했던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트로이 성은 과연 어떻게 함락될 수 있었을까?

미국의 칼 브레건은 호머의 트로이로 알려진 여섯 번째 지층이 지진으로 파괴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성벽은 무너져 있었고 주춧돌들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기도 했다.

터키에서는 근래에도 자주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10여 년 동안 트로이를 점령하지 못한 그리스 연합군은 마침 트로이가 지진으로 파괴되자 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리시스가 만들었다는 목마에 대한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병사들을 숨긴 목마를 남겨 두고 그리스인들이 철수하자 트로이인들은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을지 말지 찬반 토론을 벌이다가 결국 목마를 신들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여 성안으로 끌고 갔다는 구절이 호머의 서사시에 나온다.

『일리아드』에서 그리스인이 남기고 간 목마를 트로이성으로 들여놓는 것을 가장 반대한 사람은 트로이의 사제였던 라오콘이었다.

그러자 그리스인을 지지하던 포세이돈은 물뱀을 보내 라오콘과 두 아들을 죽인다.

이 장면은 유명한 '라오콘 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라오콘이 죽고 난 후에야 트로이인들은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기로 결정한다.

비록 『일리아드』에 이렇게 적혀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스인들과 10년 이상 전쟁을 치룬 트로이인들이 바보일 리는 없다.

따라서 그들이 목마 안에 그리스 병사들이 숨겨져 있는 사실을 모르고 성안으로 목마를 끌어들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당시 트로이가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인한 파괴 때문에 멸망했다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가끔 말로 표현했고, 말로 만든 포세이돈 상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포세이돈은 그리스인들이 고난에 처할 때마다 항상 바람처럼 나타나 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승전으로 이끌었다는 말이『일리아드』에도 나온다.

그리고 포세이돈은 바로 지진의 신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지진의 여파로 트로이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면 그리스인들이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의 덕택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기 때문에 ‘트로이의 목마’라는 전설이 생겼으리라는 주장이 정설이다.

콜린 윌슨은 트로이의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는 소아시아에서 전쟁이 많이 일어나던 때였다.

당시 트로이의 후견인이자 강력한 제국이었던 히타이트 제국은 쇠퇴 기미를 보여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는데 이를 틈타서 그리스인들이 각 지역의 반란을 부추겼다.

이때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가 스파르타로 아가멤논의 동생인 메넬라우스를 찾아갔고, 메넬라우스의 아내인 헬렌은 자신의 남편보다 더 매력이 있는 패리스와 함께 야반도주를 해 버렸다.

과거에는 왕비라 할지라도 정실에 따라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아내가 도망을 가자 미넬리우스는 씩씩거리며 형인 아가멤논 왕을 찾아갔다.

당시 그리스의 맹주였던 아가멤논 왕은 동생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 트로이의 후견인인 히타이트가 마침 아시리아를 비롯한 여러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이 지역을 공격하기에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트로이를 공격했다.

그의 예상대로 히타이트 제국은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째 되던 해에 지진이 일어나서 성안은 혼란 상태에 빠졌고 그 틈을 타서 그리스인들이 성을 점령해 버렸다.

남자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여자와 어린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트로이는 불탔고 집들은 파괴되었다.”

이렇게 트로이는 멸망 했던것 이다.

이 트로이 발굴사 는 성서에 나오는 사라진 제국 '니느웨' 와 더불어 고대유적지 발굴사의 위대한 발견 입니다

근래부터 일기 시작 한 신화 이야기와 영화 '트로이' 거기다 오늘 개막되는 그리스 올림픽은 우리에게 신화의 무한한 상상력을 품게 합니다.

저도 어렷을때 저 '하인리히 슐리먼' 처럼 그리스 신화에 무척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되어 다시읽어도 여전히 신화는 저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수많은 신들과 공주, 장수 등등과 정신적 교감을 하고 신화속의 주인공이 되게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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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사랑 데미안

책을 보고 가슴 떨리는 감동을 받은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함없이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을 꼽는다.

아주 오래전 처음 데미안을 접했을때가 십대의 마지막 시기였던것 같다.

그때 이 책이 내게 준 영향은 참으로 컷다.

얽매어 있는 모든것으로부터의 자유...

표출되니 못하는 억압된 마음...

그 어둡고 단단하게 쌓여있던 시기를 벗어날수 있도록 도와준것이

이 책이 아니었나 싶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이 말은 짧으면서도 그 시기에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스스로 에밀 싱클레어가 되어 데미안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착하고 성실해야만 하는 현실의 답답함에서 양면성의 모습,

선과 악의 본질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던 데미안은 커다란 매력일수 밖에 없었다...

차마 내가 표시낼수 없었던 그 모습들,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데미안이 가르켜

주었던 시기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던 시기

오빠와 둘이서 살면서 내 삶을 개척해야 했던 시기

겉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속으로 삭혀야 했던 사춘기

혼자밖에 없다는 고독감, 외로움....

죽음의 유혹에 젖어들었던 시기......

사람을 좋아하면서 쉽게 믿지 못했던 그 시기에

이 책는 나에게 사람을 믿어보라고 가르켜 주었던것 같다.

딱딱한 껍질를 벗어버리고 아파도 부딪쳐 보라고

넘어져 다치면 다시 일어나면 되고 빈털털이가 되면 다시

벌면되고 죽음보다는 삶이 그래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만들어주었다....

난 처음으로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의 데미안을 만나고 싶았다.

데미안를 만나 사랑도 하고 아파도 해보고

한번 버렸던 세상 다시 한번 살아보자!

그렇게 난 알을 깨고 작은 세계를 부시고

넒은 세상을 가슴에 안았다...

힘들고 지치는 시기도 있었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고

가족을 얻었고 친구를 얻었다......

 

지금

 

난 행복하다고 감히 말할수 있다...

내가 귀하게 얻는 내 삶을 내 사랑을 난 이렇게 지켜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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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1-10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미안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도서관에서 빌려 등하교 버스안에서 어지러이 보았던 세로줄의 데미안.
뭐라고 표현하긴 힘들었지만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방황기에 나의 길을 같이 걸었던것 같군요.
새와 알에 대한 표현은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묻고 살고 있습니다.
용기가 필요할때마다 되뇌어보는 글귀이죠.
 

 

사랑받지 못하는 건 그저 운이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건 불행하다....  까뮈--

 

사랑한다면 사랑의 행동과 표현을 아끼지

마라    --조지 클레인 --

 

 

질투하지 않는 사람은 연애를 할 수 없다. 

-오비디우스 (사랑과 기술)-

 

사랑은 신뢰의 행위이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대단한 이유는 없다.     --- 로맹 롤랑

 

사랑받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은 천사다... ---라마르틴

 

요구하지 않는 사랑, 이것이 우리 영혼의 가장 고귀하고

가장 바람직스러운 경지이다.  ---H.헤세

 

사랑한다는 것은 둘이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쳐다보는 것이다.  -- 생떽쥐베리

 

사랑은 여성에게는 자상한 배려를

남성에게는 세심한 배려를 증가시킨다.

-- 잔 폴 리히터--

 

살아가면서 더욱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요.         

이렇게 만난 것을 감사하면서

살뜰하게 살아요.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해 주며

그렇게 아름답게 살아내요.

그게 사랑이예요... 

 --김 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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