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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믿고 달려온 삶 ㅣ 김길 목사의 제자도 시리즈 1
김길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0년 4월
평점 :
그냥 노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 귀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
도시에 우뚝 솟은 교회당 건물을 보면서 ‘저 교회의 담임목사는 누구일까?’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교회의 건물만큼이나 담임목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하고 큰 종(?)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다.
명동 한 복판에서 복음을 전하는 김길목사, 그의 교회는 명동, 도시가 교회다. 어마어마하다. 꿈과 같은 이야기일까! 하나님이 그곳으로 부르셨기에 그가 서있다. 도시 한 복판에 서서 복음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의 시선이 바뀔 수 있을까? 우리는 교회 건물이나 건물 안의 교회를 섬기라고 모두 다 부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복음을 위해서 도시사역자로, 상담사역자로, 디자이너로 부름 받아서 그곳을 섬기고, 그곳에서 복음을 증언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믿고 달려온 사람이라고, 증언의 삶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의 시선은 언제쯤이나 바뀔 수 있을까?
“하나님께 순종한 한 사람이 큰 교회보다 더 크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잊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건물과 프로그램에 집중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있는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교회에 도움이 된다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분노의 불, 성령의 불
“쇼윈도의 화려함이나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없는 분노가 내 속에서 올라왔다. 불을 지르고 싶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는 만큼 내 안의 분노도 커졌다. 내 안에는 불이 있었다. 분노의 불이...” 분노로 가득한 사람을 성령의 불로 채워주신 하나님은 그를 성령의 음성에 가장 민감한 사역자로 바꾸셨다.
그는 진보정당운동의 깃발 대신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고 흔든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떠나온 학생운동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고 우는 그에게 하나님은, “네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좋은 일인데 울고 있느냐. 눈물을 그치라”고 하시면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와 죽음, 형의 비극적인 죽음, 어머니의 처절한 모습을 통해서 그는 세상에 대한 분노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이셨다. 새벽마다 올리는 통곡의 눈물, 성경일독을 위한 염원으로 하루에 다 읽어버리는 신약, 죄와 싸우는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죄와 싸우고, 고난과 싸우고, 연약함과 싸우고, 외로움과 싸우는 것이 분노의 불보다 더 뜨거운 성령의 불로 승리할 수 있게 하였다.
영적인 거인
저자는 군대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거듭남의 체험을 경험한다. 그리고 섬 전도여행의 풍랑 중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제자훈련학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지체가 성령으로 하나 되어 훈련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삶의 순간마다 자신을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그는 “영적인 거인은 영적인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예수님을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 누구와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 혼자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빚어 가셨다.”성숙한 사람 또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물론 몸의 모든 구성원이 예수님을 잘 알도록 몸을 섬겨 하나가 되게 하는 사람이다.”
고난의 사람
저자는 고난의 사람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한 이사와 가족들 간의 갈등, 마음 편히 쉴 곳도 찾지 못하고, 남 앞에서 폼 제고 싶은 양복 한 벌이 없어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외로움은 친구처럼 바짝 따라 붙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을 때 찾아온 것은 높은 교회당 건물이나 담임목사의 자리가 아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환락의 도시 한복판이었다. 이뿐이랴 재정적인 훈련으로 다져진 사람인데, 3,000원짜리 치마를 산 아내마저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아서 회개하며 용서를 빌어야할 판이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담임목사로 오지 말고 바로 개인으로 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셨다. 부흥하며 성장하는 교회를 떠나라는 말씀 앞에서 순종해야 하는 고난은 그를 아주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삶의 깊은 고난에서 건져내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고난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했다.”고백한다. 그래서 고난의 순간에는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고난이 올 때마다 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고난은 힘들지만 순종을 배우게 하고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다.”그리고 고난의 순간에는 하나님께 원망 대신에 호소하라고 한다.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물음에는 답이 없다. 오로지 고난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을 알 뿐이다. “우리가 십자가 고난을 이해할 때,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정서의 핵심인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훈련의 사람
제자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훈련이 있다. 훈련이 필수코스다.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 이후로 가장 많이 받은 훈련 중에 하나가 재정에 관한 것이었다. 나의 돈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배웠다.”그리스도인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재정, 돈에 관한 시련은 있다. 그런데 그것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재정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고백하기까지는 많은 훈련을 거쳐야 한다.
양복과 구두, 노트북 등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야만 했다. 초청받아 간 교회에서 여러 번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필요한 것에 넉넉하게 주셨다고 고백한다. 돈의 수입과 지출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쓸려고 했다는 마음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느껴지지만 작은 액수와 내가 필요한 것에는 당연히 내 뜻대로 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쓸려는 재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썼을까? 뒤돌아보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재정이 마르면 즉각 뒤돌아보았다. 혹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지출이 있었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출을 내 마음대로 제한 한 것이 있는지”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15일 동안 건축현장에서 번 돈마저 전부를 헌금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획했던 대로 쓰지 않고 헌금을 하였다. 때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면서 버스 안에서 우는 아내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하나님이 아셔”라고 슬픔으로 위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일한만큼 번다.’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재정에 대해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돈은 하나님이 주신다. 내가 일한만큼 버는 것 같아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조금만 하나님을 알게 되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이 돈을 주시는 원칙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필요였다...재정은 나의 능력을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보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필요보다 조금 더 넉넉하게 주셨다.”이렇게 재정을 채워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다. 그 하나님께서 재정을 책임져 주심을 알 때 우리가 할 일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염려는 끊임없이 올라오는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와 같다고나 할까. 염려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염려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 몰려왔을 때, 아내랑 손을 잡고 ‘우리 염려하지 말고 그 일을 하나님께 맡깁시다.’ 하면 내 마음엔 염려가 사라지지 않고 저만치서 턱을 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는 슬픈 목소리로‘염려가 되는데 어떻게 염려를 안 해요.’ 한다. 웃으면서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훗날 그 일이 염려보다 더 좋은 일로, 하나님의 선한 일로 바뀌어져 있음을 보곤 한다. 그렇다. “염려는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염려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오직 믿음을 없애기만 한다.” 오직 믿음을 없애기만 한다는 말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가! ‘염려는 오직 믿음을 없애기만 한다.’ 이런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과감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염려는 하나님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관계, 모든 상황에서 깊이 신뢰하는 관계를 평소에 구축해야 한다.”
재정의 훈련 못지않게 손해 보는 법을 가르쳐주신 교관이신 하나님의 코칭에 감격을 하고 만다. 옳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생각을 굽히지 않는 것이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분노가 많은 사람은 불의를 보면 잘 참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틀린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MBTI의 16가지 성격유형 중에서 T(Thinking)의 유형의 사람들은 사고와 판단, 비판으로 먼저 인식한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하여도 그렇게 먼저 보이는 것을. 이런 사고와 판단으로 보는 것이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는 냉혈인간처럼 쿡쿡 찔러대기만 한다. 저자의 고백처럼 배려의 마음이 없는 것이다. 배려의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다. 마치 배려의 마음이 문(門)에 갇혀있어서 문을 열어주기만을 주인님께 바라는 것처럼 사고형의 사람들은 쉽게 배려의 마음을 열지 않고 먼저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배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시니 사랑을 부어주십시오”라며 눈물로 서럽게 울었다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기질로 사는 것이 사실이지만 거기에 사랑을 더하지 않으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어서 자기는 정의의 사람, 의의 사도가 되는 것에 만족하겠지만 공동체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한다. 결국 그 아픔은 본인에게로 돌아와 황폐해지고 자멸감과 자책감에 울게 된다.
손해 보는 마음을 십자가 정신에 비유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법을 공부하고, 규칙을 정하는데 십자가의 정신은 목숨까지도 달라고 할 때 내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혼자서는 당하겠는데, 바보라고 손가락질 당해도 참겠는데, 내 가족이 당하는 손해는 참을 수가 없다. 몇 달 전에 아내는 목사요 상담사인 남편이, 채우지 못하는 재정을 채우기 위해 위층에서 하는 부업을 받아서 했다. 목이 아파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서, 잠을 자지도 않으면서 했다. 그런데 그 부업을 관리하던 분이 물건을 가지고 간 후에 전화도 받지 않고, 부업해서 주어야 할 돈도 주지 않는 것이다. 너무 화가 나서 다른 전화기로 전화했더니 목소리 확인하고 바로 끊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문자로 그러지 말라고 달래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았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이럴 때 경찰에 신고를 하여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하나? 며칠 전 거리를 지나는데 우연찮게 우리와 비슷한 피해를 본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 마음 같아서는 결속이라도 해서 고소를 하고 싶었다. 십자가 정신, 손해 보는 마음, 마음이 복잡하다. 제자가 아니라면, 아니 목사가 아니라면 손해 보지 않을 것이다.
훈련은 고난과 비슷하다고 소개하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 어려움을 벗어버리고자 하면 훈련은 중단된다. 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훈련을 받아들이고 통과하면 전보다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훈련의 동기는 무엇이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데, 훈련의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훈련해야 한다.”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삶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서 긍휼한 마음이 들어서 자신이 어떻게 연약함과 싸웠는지 정직하게 나누어서 그들을 세울 수 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조이 도우슨은 훈련에 임하는 제자의 자세에 대해서 ‘훈련을 받아들이고, 훈련을 받을 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지 말고, 이 훈련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를 질문하라고 한다. 그래서 훈련을 통해서 영향력 있고,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훈련은 하나님께서 ‘완전하고(integrity), 손이 능숙해지는(skillful)’ 제자로 다듬어 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에 단련이 되거나 완수해 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훈련은 넘어짐의 반복이며, 십자가를 배우는 시간이다.” 그래서 훈련을 받다가 “넘어졌을 때 기다려야 하고, 배울 것을 배우고 깊이 깨닫고 다시 넘어지지 않을 정도의 개념을 분명하게 잡기 전까지 기다려야 한다.”
연약함
누구에게나 크든 작든, 잘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오랜 세월을 거쳤든 바로 생기게 된 것이든 간에 연약함이 있다. 연약함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생기기도 한다. 그 연약함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공동체에 피해를 입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연약함을 치유 받고 훈련받은 사람들이 배려하고 부딪치지 않게 하여야 한다. 물론 본인은 “연약함이 드러날 때마다 나의 연약함을 짊어지신 예수님께 들고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반드시 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아름다운 심성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며 만져주실 것이다. 정직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 놓는 훈련이 필요하다. 얼마 전 TV에서 하는 부부치료 장면을 시청하게 되었는데, 위기 부부들이 손을 맞잡고 서로의 연약함을 드러내 놓는 것이었다. 연약함을 드러낼 때 상대 배우자는 거기에 재해석이나 비판을 전혀 가하지 않고 그냥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결혼생활의 기간과는 상관없이 배우자가 연약함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결혼했는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위기가 온 것이었다.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 내놓는 배우자와 비판 없이 들어주는 배우자로 인해 나중에는 서로가 포옹하고 울면서 회복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정확한 방법이야 결혼 전에 연약함을 치유 받아 온전한 인격으로 결혼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결혼한 사람들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연약함을 드러내놓는 훈련이 결혼생활에 큰 유익을 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시간뿐만 아니라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상담사나 이웃을 만나는 것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할 수가 없다. 마치 우리의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은 성령 안에서 그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 몸임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라.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타인을 도우라’고 권면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 판단하는 마음이 죽은 것이다.
선교적 관점의 교회
큰 교회, 말씀이 좋은 교회, 분위기가 평온해서 많은 사람이 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은, “선교지에 이름 없는 선교사 한 명을 더 크게 본다.”고 하신다. 이 말을 통해 좋은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삶에 부담을 주지 않고 사례금의 부족이 없으며, 서로가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사역, 사랑으로 섬기는 사역을 원했던 나와 저자에게는 충격을 준다.
“하나님, 나는 실패했습니다.”
“길아, 넌 실패하지 않았다.”
담담한 주님의 음성에 나오지 않는 눈물, 개척교회를 6,7여년 섬기다가 다른 사역자에게 위임하고 나왔을 때, 그리고 지금도 내겐 ‘실패감’이 제일 연약한 마음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난 외로웠다. 혼자서 모든 짐을 지고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가기에는 내가 철저히 무능했기 때문이다.”로렌 커닝햄의 1961년의 사역 중에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성경을 믿지 않습니까?” 그 마음으로 모든 성도들이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교회를 책임지는 성도이기를 바랐지만 오히려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등지게 하는 촉매제 역할만 할 뿐이었다. 사명을 이루기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 시급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도 먹고 살기에만 바쁘고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한 청년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명동한복판에 서서 찬양하며 예배하는 목사님을 생각하면 갈등 아닌 갈등을 한다. 명동 한복판 나또한 청소년사역자로 내세울만한 상담실이나 사무실이 없다. 교회부속 건물에 얹혀있기도 하였고, 밤새 고생해서 붙였던 간판을 떼라고 해서 추운 아침 수고로이 떼기도 하였다. 지금은 또 교회부속 건물로 가려고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개인으로나 집단으로 상담도 하고 강의도 하고, 한적한 식당에서도 개인상담도 하고 온 가족을 상담하기도 하고, 교회에 가서 가정 사역에 대한 강의도 하고, 대학에 가서 강의도 하고, 우리 집을 오픈 하여 상담도 하는 내게 사람들은 묻는다. “상담센터가 어디에 있어요?”
“장소는 힘이 세다. 장소가 없으면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섬겨야 할 도시가 있다. 그러나 예배당이 생기면 하나님과 도시는 없어진다. 오직 그 장소에서 은혜 받고, 행복하게 교회생활 하는 것만 남는다.”고 장소의 소중함과 장소로 인해 우리의 시야를 가리게 함에 대해서 말한다.
‘상담센터가 어딨어요?’라고 장소를 묻는 질문을 듣고 우물쭈물 하는 내게 김길목사의 사역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얼마나 내가 당당함이 부족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장소에 대한 갈등을 몰아가게 한다. 정체감을 세워준다.
종종 교회 안의 전임사역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들 때도 있다. 건물과 재정의 어려움에 짝을 이루어 미래마저 불투명해지고 아이들이 커가며 가장(家長)으로서 삶의 무게가 느껴질 때, “너 이래도 상담목회할 거냐? 네가 원하는 진정한 상담목회가 무엇이냐? 너는 누구를 위해 상담 목회하느냐?”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김길목사가 명동이라면 나는 학교다. 차비 한 푼 주지 않아도 청소년과 그의 가족을 상담하고 치유하는 일이라면 달려간다. 때로는 심리검사지를 살 돈도 없고, 차를 운전해 갈 기름 값이 없어도 간다. 이 일을 위해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일 말고는 다른 일을 할 마음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기 때문(저자는 이것이 사명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이다.
딸과의 이야기
“딸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놀랍긴 한다. 그러나 자기도 그렇게 될까봐 무섭다고 했다. 딸아 너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아빠도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단다. 나는 딸에게도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힘들다.”
나의 큰 아들이 고3이다. 진로를 정하는데, 신학대학교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둘째는 고1, 막내는 중3, 어느 누구도 아빠처럼 힘들게 살까봐 목회는 절대로 하기 싫고, 목사도 되기 싫다고 한다. 그들이 보고 온 것은 힘들고 어렵다는 것, 그것을 직간접으로 보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애들아, 세상에서 제일 복된 일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성도를 섬기는 목사가 되는 것이란다. 아빠는 다시 태어나도 목사님이 될거야. 그렇지만 너희들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대로 응답하고 순종 하거라. 그리고 마음껏 즐기면서 살거라. 하나님 안에서 즐기면서 사명 감당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단다. 너희들을 사랑한다.’
“난 행복한 도시 선교사”
도시사역자, 아시아의 대도시를 타깃으로 삼는 도시선교사, 스타벅스를 경쟁상대로 삼은 청년 사역자, 김길목사님. 목사님의 사역, 증언의 삶을 통해 청년들이 행복하고 하나님이 행복합니다.
목사님은, “그냥 노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 귀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귀한 일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