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 전에도 몇 번 보기야 했겠지만 그녀가 내 머리속에 콱 들어와 박힌 것은, 그들 밴드가 부른 영화의 주제곡이 그 주 1위를 먹은 어느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였다. 보통 그런 데서 1위를 했다고 하면 처음엔 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주고, 상황이 제대로 인식된 후엔 좀 버벅거리며 주변의 모든 사람께 감사한다, 채찍질로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하겠다며 좀 울어도 주고 그래줘야 사회자도 흡족해하고, 프로그램의 권위도 서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 좀 보라. 소감을 물어보는 좀 거들먹거리는 사회자 앞에서, "얼떨떨~해요~!" 라고 한 마디 하고는 땡이다. 호오..멋진걸...
그 다음 그들 밴드를 본 건 98년 "자유" 공연에서였다. 그 공연은 한 사나흘에 걸쳐 오버와 언더의 뮤지션들이 섞여 했던 공연으로 내가 갔던 날엔 윤도현밴드와, 자우림, 김경호 뭐 이런 사람들과 아무밴드 등의 언더쪽 친구들이 나왔다. 나는, 오로지 아무밴드를 보기 위해 3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갔더랬다. 그러나 정작 아무밴드를 봤을 때는 거의 실신상태라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또 역시 자우림 쪽에서 기가막힌 멘트 하나를 날려줘 몇 년이 지난 오늘까지 기억에 담고 있다. "그렇게 좋아요?"라니. 이런 멘트는 사실 귀에 익다. 좋냐? 우리도 좋다. 그러니 우리 같이 함 미쳐보자..투로 주로 보컬이 자주 쓰는 멘트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녀가 내뱉는 말의 뉘앙스는, 묘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비웃음 같았다. 어랏, 요년 봐라,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다들 좋아 죽는데..사실 나도 좋아 죽겠던데.
그 두 번의 '이 당돌한 것 좀 보게' 싶은 기억으로 나는 그녀의 팬이 됐다. 음악보다 인간에 먼저 사로잡히기는 이상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의, 제 할 말은 제때 다 할 것 같은 목소리가 참 좋았다. (이상은과 잠깐 비교하자면 이상은은 할 말을 하긴 해도 어눌하게, 좀 뒤늦게 그건 아니거든요, 할 것 같은 목소리다. 그 목소리도 나는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목소리만 좋은가 했더니 곡까지 잘 만든다. 목소리 좋고, 곡만 잘 만드는가 했더니, 가사도 곧잘 쓰고, 처음엔 좀 훤하네 싶기만 하던 외모는 갈수록 고혹적이어서 이젠 심지어 음악보다 외모가 먼저 보이기 시작한다. 이거 큰일이다.
외모가 그렇게 변하는 동안 목소리는 처음 그대로인가 하면 목소리도 참 많이 변했다. 예전 목소리가 정직하게 제 할 말 제때 다 할 것 같은 목소리라고 한다면 지금 목소리는,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적당히 꾸며, 자기를 내보이기 위해 할 수도 있을, 좋게 말하면 관록이 붙었고, 나쁘게 말하면 때가 탄 목소리이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보니, 자신의 목소리를 좋아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노라고, 2,3집 때의 목소리는 참 마음에 들지 않았노라고 하던데, 나는 정말이지 그때의 그녀 목소리가 그립다.
그녀는 요즘 꽤 많은 인터뷰를 한다. 그러다보니 그녀 말마따나 무슨 가면이라도 쓴 듯 꽤 다른 모습들을 많이 보인다. 얼마 전에 어떤 인터뷰를 봤더니, 크랜베리스밖에 모를 너네가 내 음악을 듣고 표절 운운하다니 우습다, 차라리 듣지 말아라 하더니, 오늘 다음에서 보니 생글생글 웃으면서 기회가 되시면 한번 들어보세요, 한다. 어떤 때는 무게잡으며 내 음악의 원천은 불행이라고 하더니, 어떤 때는 불행요? 지금처럼 좋은 때 제가 그렇겠어요, 한다. 그 생글거리는 입이 미우면서도 싫어지지가 않으니 이상하다. 다만 이제 그녀가 잘 보이지 않아, 나는 그게 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