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이 된 여자를 여전히 살아있는 여자처럼 사랑하는 순정파와, 식물인간이 된, 그래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여자를 강간한 파렴치한. 이 영화는 그 두 남자 사이(혹은 한 남자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의 매워질 수 없는 간극에 대한 이야기이다. "2003년 간직해야할 단 하나의 사랑"이라니! 내가 이래서 연애를 못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그 사랑이 봐지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감독은 어느 잡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한 남자가 자기 친딸을 강간한 죄로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나왔는데, 그의 절친한 친구가 왜 그랬냐고 묻자, 그앤 너무 예뻤고 그건 불가항력이었어, 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식물인간인 여자환자를 강간한 어느 남자간호사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그런 감독이 올곧게 사랑은 어디에나, 어떤 상황에나 있다며 이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아, 그래그래. 영화는 영화로만 보자. 감독의 의식 세계까지 따지고 들지 말자. 게다가 나는 영화든 책이든 씹어 먹는 걸 별로 좋아라하질 않는다. 그냥 술술 마실 뿐이지. 그러나 그렇게 술술 마실 뿐인데도 가시처럼 목구멍에 탁 걸리고 마는 장면이랄지 대사가 있게 마련이다. 영화 [연인]에서 제인 마치가 매끄러운 원피스를 입고 마차를 타고 갈 때, 그 원피스 안에서 둥글게 흔들리는 작은 젖가슴처럼.

이 영화에서 그렇게 불에 덴 자국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영상은, 남자간호사인 베니그노가 자기가 돌보는 환자이자 벌써 몇 년째 짝사랑(짝사랑이다, 짝사랑! 절대 서로 사랑했던 게 아니란 말이다)하는 여자 알리샤에게 이야기해주는 흑백영화 <애인이 줄었어요>의 한 장면이다. 임상실험이 안 된 (애인이 개발한) 약을 잘못 먹고 자꾸만 몸이 줄어드는 남자주인공이 결국은 엄지손가락만해져서 자기 애인과 잠자리에 드는 장면인데, 잔털이 촘촘히 돋은 여자의 아래 틈 사이로 드나드는 남자의 모습, 그 지극히 단순화해 놓은 틈이라니!! (김기덕이 영화 "섬"에서 두 주인공이 숨어든 갈대밭(그게 갈대가 맞던가 ^^a)을 그녀 다리 사이의 수풀로 형상화해놓은 장면과 함께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그림이다)

그 이야기를 해주던 그날 밤, 베니그노는 그가 지난 4년동안 가슴을 닦아주고, 머리를 깎아주고, 생리때마다 수건을 덧대줬던 알리샤의 몸을, 자기가 세상의 모든 말을 들려주고, 자신의 모든 사랑을 전달했으므로 이제 자기의 사랑을 받아줄 거라고 믿었던지, 취한다. 그리고 알리샤의 생리가 멎자 베니그노는 사실을 조작하여 은폐한다. (라고 하니까 그가 아주 지능적이고 치밀하기까지 한 놈 같은데 사실은 어리석을 정도로 착할 뿐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알리샤는 놀랍게도 임신을 하고, 베니그노는 강간죄로 교도소에 가게 된다.

그러니 이것이, 사랑인가, 강간인가. 온전히 사랑이랄 수도, 온전히 강간이랄 수도 없어서 영화가 더 지랄맞게 가슴에 오래 남겠다. (그러나, 내 의견을 묻는다면, 2시간 가까이 이것이 사랑이었다고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그 결과가 좋았고 그 동기가 순수하다고 해도, 나는 이것이 여자의 동의를 얻지 않은 성관계였으므로 강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니그노의 강간이 깨운 그녀의 몸과 정신이, 베니그노를 끝까지 믿어준, 믿지 않았더라도 격려는 해준 마르코(그도 식물인간이 된 애인의 병간호를 하던 중, 베니그노를 만나게 되는데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애인의 상태에 대해 굉장히 낙담하며, 베니그노에게도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해주는 사람이다) 와 건강하고 건전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p.s) 내가 언제부터 사랑이란 걸 믿지 않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니, 사랑니 네 개를 몽조리 다 뽑아버리고 난 후부터인 것 같다. 게다가 나는 이것들을 뽑고서 개당 5만 원씩 총 15만 원의 돈까지 받아 챙겼다. (건강보험에 치아특약이란 걸 넣었더니 발치하면 무조건 개당 오만 원씩이란다. 하나는 보험 넣기 전에 뺀 거라 참았다 나중에 뺄 것을..하며 땅을 치며 후회했더랬다) 사랑니를 빼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미치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후엔 모든 게 시들해졌다. 사랑니를 돈받고 빼서 그랑가...쓰벌..별 생각이 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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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3-08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세상에..그런내용이란 말입니까??영화안본지 하두 오래되어서...음...영화안봐도 내용이 머리속에 각인되는군요. 전요 사랑니 뽑아달라고 해도 안뽑아주는 의사 심보는 뭔지??전 안뽑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 인간 만났는지 저도 X벌 입니다.

soulkitchen 2004-03-08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 전체에 대한 얘기가 없었네. 이 영화 참 괜찮았다. 다만 사랑에 관한 영화 어쩌구 광고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다. 아래는 이 영화에 삽입됐던 쿠쿠루쿠쿠의 가사다. 영화 해피투게더의 사운드 트랙에서 늘 듣던 건데 가사를 몰랐더니..크흑..이런 가사였군.

Cucurrucucu Paloma - by Caetano Veloso

그는 수많은 긴긴 밤을 술로 지새었다 하네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눈물만 흘렸다고 하네

그의 눈물에 담아낸 아픔은 하늘을 울렸고
마지막 숨을 쉬면서도 그는 그녀만을 불렀네

노래도 불러보았고 웃음도 지어봤지만
뜨거운 그의 열정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네

어느날 슬픈 표정의 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쓸쓸한 그의 빈집을 찾아와 노래했다네

그 비둘기는 바로 그의 애달픈 영혼
비련의 여인을 기다린 그 아픈 영혼이라네


soulkitchen 2004-03-0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니 그게 이상하게 자리를 잡으면 뽑을 때 위험하다고 하더라구요. 울 동네에 어떤 여자는 사랑니 뽑고 나서 아랫턱있는 데가 퉁퉁 붜서 꼴이 말이 아니더라구요. 안 뽑아도 된다카믄 뽑지 마소. 저는 네 개가 다 얼마나 맹렬하게 나던지 아파 죽겠어서 뽑았죠, 뭐. 아이구, 그라고 신랑을 두고 별 소릴 다 허세요..신랑 알믄 섭하구로. 그라고, 흠..언니는 간지럽고, 성님이라고 부르던지..클클..

비로그인 2004-03-0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하하하 언니라고 허락한다면 앞으로 동생이랍시고 막 나갈겁니다!! 아무래도 전 동생들보다 언니들이 좋더라구요. 무지 편하고음...또..음.. 여튼 언니가 더 좋아요 성님!!시로~시로~ 언니라 할겁니다. 비발언니!요건 어감이 쫌 그렇고 솔키언니! 복돌언니!!좀 어감이 머시기기하지만 언니로 밀고 나갑니다.

비발~* 2004-03-0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따 초점을 맞추어 야그를 해야할랑가, 잠시 멈칫. 영환가, 사랑닌가, 성님언닌가. 다 때려치고, 그냥 나 집에 왔다!

비로그인 2004-03-08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베니그노의 행위를 성폭력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쏠키 말대로 동의없는 관계였으므로 그것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고, 무엇보다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표현할 수 없는 사회적인 약자를 대상으로 관계를 맺었다는 건 더더욱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단 말이지. 그리고 사랑한다고 반드시 성행위를 맺어야 한다는 건 잘못된 편견이야. 그건 별개라구. 사실, 이창동의 [오아시스]에서도 이와 비슷한 끔찍한 장면이 나오는데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공주의 발을 더듬는 종두의 모습. 그러면서 관계를 맺으려 시도하지. "너무 예쁘다, 예쁘다..."그러면서. 이창동의 시선이 사회에서 도태된 낙오자와 소외된 자들의 어떤 세계를 그리려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맨 첨 공주의 아파트에서 공주에게 행한 종두의 행위는 이창동이 여성을 너무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하더라고.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강간의 시도였어. 아무튼, 쏠키의 영화비평은 정말 볼수록 데끼리여! 근데 뭐, 발치보험이란 것도 있나...거참, 신기하네. 발치하고 돈도 받고...난 사랑니를 무려 다섯개나 뽑았는데..개당 오만원이면 이십오만원 아녀...서랍속에 돌아댕기는데 음냐...나도 도로 박으면 사랑이 올까나 ~

비로그인 2004-03-0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뽁스님이 또 언냐, 라고 불러주싱게 크크크...이거이 또 차력당 복돌이 아으...어깨에 힘 좀 들어가는구만요. 근데 쌤은 반상회, 으트케 된 거여요?

soulkitchen 2004-03-0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아시스] 저는 그 영화 안 봤습니다. 불편해서 못 보겠더라구요.

비로그인 2004-03-09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지금, 3호선 나방의 [그녀에게]듣고 있뜸...

비로그인 2004-03-09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오아시스]가 불편한 것보다 속이 터져 죽겠더라고. 드러누워 봤는데 경찰서에서 종두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공주의 모습보면서 어찌나 속이 터지던지. 저절로 인나 벽에 기대보는데 또 속이 터지고...아무튼, 그랬었고 [오아시스]가 좋은 영화임엔 틀림없지만 위에서 말한 그 장면, 맨 첨엔 잘 몰랐는데 선배가 지적해 주더라고. 아...그거 참 끔찍하더만. 그걸 미화시키려는 이창동의 시선이 한계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고...

연우주 2004-03-2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 이제야 봤어요. 그녀에게 보고 마음이 참 불편했더랬는데. 마지막에, 해피엔딩을 연상하셨군요. 그걸 연상하지 못한 제가 바보였던지, 작년에 같이 본 학원샘도 잘 될 것 같은데? 라고 하더라구요.
오아시스는 불편하게 하는 영화지요... 상념이 생기게 하는 글이네요.
소울 키친님이랑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