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어른으로 성장하기 - 부조리한 사회에서 생존한다는 것
폴 굿맨 지음, 한미선 옮김, 수전 손택 추천사, 케이시 넬슨 블레이크 해제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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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의 무의미한 역할놀이, 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것이라 겁주는 사회, 사회 속에서 가치를 찾을 수 없어 방황하는 청년들. 이와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은 현대성 자체의 문제 때문일까 현대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일까? 사회비평가 폴 굿맨은 무기력한 청년들의 방황과 일탈의 책임을 현대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여 어중간한 사회를 만든 바보 어른들에게 돌린다.

 

작가는 1950년대 미국의 비트 세대에 관한 비판적 분석을 담았지만 이 책이 비판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은 1854년 출판된 <월든>에도 담겨있고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나타난다. 직장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퇴사하는 청년들과 어른들이 부재하는 사회에서 패거리를 이뤄 또래 학생을 죽음으로 내몬 학생들의 이야기는 정확히 폴 굿맨이 분석한 내용들이다. 어른들이 직급에 따른 역할놀이와 쥐 경주를 끝내고 직장에서 사회로 돌아와야 패거리를 이룬 아이들 또한 두목과 부하의 역할 놀이를 멈출 수 있다.

 

폴 굿맨은 소로와 같이 이 모든 문제들을 만든 도시로부터 벗어나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시는 어린아이가 창의적으로 놀 수 있는 장소이고 청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다. 어중간한 수준에서 타협한 현대의 혁명은 기존의 공동체를 파괴했지만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상태에서 끝났다. 혁명적이고 현대적인 전통을 완성해야 공동체가 부재하는 사회에서 젊은이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젊은이는 태생적으로 이상주의자여서 무언가 잘못된 사회에는 제대로 합류하지 않고 낙오자가 되거나 패배감에 젖어 역할놀이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낙오자와 월급을 위해 역할을 수행하는 젊은이 모두에게 손해이다.

 

현대 사회는 낙오자와 직장 내 역할 수행자 모두를 먹여 살릴 만큼 풍요로운 사회이다. 그렇다면 시스템이 주는 만족감에 안주해도 될까? 폴 굿맨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가치 없는 삶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젊은이는 돈을 위해 시스템 안의 역할 수행자가 되기로 타협한다. 그 대가는 영혼을 파는 것이다. 폴 굿맨은 보수주의자로서 진짜로 살아있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구축해야 하는 자유와 문명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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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2-06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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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nse of an Ending (Paperback) -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원작
Barnes, Julian / Random House Export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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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줄리언 반스는 소설의 제목 The Sense of an Ending을 동명의 픽션 이론서에서 빌려왔다. 해당 비평서는 프랭크 커모드가 쓴 책이고 1965년 이뤄진 강연을 바탕으로 쓰여 1967년 초판이 나왔고 비교적 최근인 2000년에 수정판이 출간됐다. 책은 ‘peripeteia’(급격한 반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등장하는 개념)을 다룬다. 물론 줄리언 반스의 소설에도 반전이 중요한 역할을 해서 프랭크 커모드의 책을 읽고 썼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읽어보지 못했다. 아마존에서 책 소개만 읽었는데 책의 키워드는 종말의 파국과 위기’, ‘종말에 다다른 사람의 영혼인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노년에 다다른 화자 토니 웹스터의 회상으로 진행된다. 삶을 한 편의 이야기로 보면 노년은 결말부이다. 토니 웹스터의 회상은 결말부에 제시되는 충격적인 반전에 의해 시작되는 걸로 보인다. 김연수 소설가의 말을 빌리면 삶이라는 이야기는 계속 퇴고하는 소설처럼 끊임없이 다시 쓸 수 있다. 노년의 충격적인 사건은 화자가 자기 삶을 계속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소설의 독자는 자기 삶의 끝을 미리 짐작해보고 지금까지의 삶을 어떻게 다시 쓸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혹시 숨은 반전이 드러나서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닌지.

  나는 이 소설에 반전이 담겨있다는 점과 소설이 노년 시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동명의 비평이론서가 비극 이론서인 시학‘peripeteia’ 개념을 다뤘다는 점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반전)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노년)을 떠올렸다. 대신 다시 불완전하게도 급하게 확보할 수 있는 텍스트가 오이디푸스왕뿐이어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다시 읽어보지 못했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대해 언급할 게 별로 없어서 미리 말하자면, 노년의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앞두고 평화(일종의 내려놓음)를 얻지만 토니 웹스터는 그렇지 못하다. 그는 반전 앞에서 당황스러워한다.

토니가 베로니카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정말 못 알아먹네!(You don't get it!)”이다. 토니는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고 수사관이 된 오이디푸스처럼 자살한 친구 에이드리언과 관련한 진실을 추적하지만 계속 헛다리만 짚는다. 베로니카는 뭣도 모르고 무례하기만 한 토니 앞에서 탄식한다. 나는 토니의 눈치 없음을 사회에 합류했다가 은퇴한 평범한 영국 남성의 특징으로만 읽었었는데 오이디푸스왕을 읽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알고 있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그의 죄를 알려줘도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예언자를 비난하기만 한다. 또한,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진실을 알게 된 순간까지도 자기 자신의 진실을 모른 척하며 사건의 목격자들에게서 확인하려 한다. 토니와 오이디푸스 모두 합리적인 수사관을 자처하며 진실을 찾아 나서지만, 비합리적인 반전 앞에서 파국을 맞는다. 토니가 부러워하는 철학도(哲學徒) 에이드리언의 명료성(Clarity)은 현실 속에서 불가능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명료성을 반박한 것처럼.

  소설에는 오이디푸스와 토니의 합리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한 편의 삽화가 실려있다. 토니와 전처 마가렛의 결혼 생활 마지막 즈음 집 앞의 나무가 말썽을 일으킨다. 나무의 뿌리 때문에 집에 균열이 생겨 보험회사에서 나무를 자르라고 권유한 것이다. 나무 위에서는 비둘기가 똥을 싸서 자동차에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토니는 보험회사의 관료들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조경사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짜증을 부르는 수법을 쓴다. 자신이 상대하는 적인 보험회사 관료의 언어를 흉내 내는 것이다. 문의 편지에 회사 측에서 답장을 못 하면 앞서 보냈던 몇 번째 편지에서 이러저러한 사항을 찾아보라라고 다시 문의하는 식이다. 60년대에 대학 생활을 했던 토니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예술가가 되지는 못하고 예술행정기관에서 일했다. 토니는 보험회사에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베로니카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오이디푸스(고대)와 토니(현대)의 차이는 이것이다. 현대인은 '명예'를 잃어버렸다. 현대 관료주의의 합리성은 명예를 잃어버린 자의 합리성, 회계사의 합리성이다. 삶은 성장하지 않고 숫자만 더해간다. 명예를 잃어버린 인간이 추구할 건 자기 보존과 안정성(안정적인 직장)뿐이다. 오이디푸스는 합리적 추적이 부른 파국 앞에서 곧바로 자기 처벌에 돌입하지만, 토니는 마음에 충격을 받고서도 삶을 변함없이 이어 나간다. 소설을 읽으면 느껴지겠지만 명예를 잃어버린 현대인 토니의 본모습은 구차한 '찌질함'이다. 그는 보험회사에도, 베로니카에게도 질척거린다. (삶의 구차함을 그대로 적는 게 산문의 특징이기도 하다.)

  명예라는 말로 삶을 이어가는 토니와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차이점도 설명할 수 있다. 명예를 잃어버린 전형적인 현대인 토니는 현대적 삶의 허위를 잊지 않고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삶을 기억하며 작은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반면, 에이드리언은 부조리한 사회에 합류하지 못하고 끝내 자살한다. 하지만 작가의 질문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시대의 소음의 주인공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정부에 협력했다. ? 예술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쇼스타코비치의 타협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쇼스타코비치의 협력이 없었다면 그의 음악도 없었을 것이다. 예술을 위해 굴욕적으로 타협한 그의 복잡한 심경을 생각해봐야 한다. 토니 웹스터 또한 한 명의 아이를 잉태시키고 무책임하게 자살한 에이드리언을 어떻게 볼 것인지 고민한다. 과연 에이드리언이 종이에 적은 철학적 명료성(Clarity)과 그에 따른 자살, 그게 현실에서 가능하기는 할까? 현실 속에 잉태한 아들의 삶이 남았는데도? 논리적인 철학 연구가 끝나도 복잡한 삶은 끝내 복잡하게 남아있다. 소설을 읽고 나면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명예가 없는 삶을 어떻게 이어 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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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뇌 - 독서와 뇌, 난독증과 창조성의 은밀한 동거에 관한 이야기
매리언 울프 지음, 이희수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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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독증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흥미로운 재능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난독증 증상이 있어서 책을 자연스레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창하게 독서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독서 과정 중에 우뇌를 좀 더 많이 사용한다. 우뇌 발달은 패턴 인식이나 수학적 사고, 예술적 천재성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만, 글자 인식에 문제를 겪는 난독증과 글자 해독은 잘하지만 어린 시절 훈련이 부족하여 독서 유창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구분해야 할 것 같다. 다빈치나 아인슈타인은 전자에 속한다. (독서 유창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모두 우뇌가 좀 더 발달하는 걸까?) 

  난독증 증상은 독서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라, 노력의 의해 가능한 인간적인 행위임을 알려준다.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책 읽기가 없었다면 인류는 '발명'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독서가 인간의 문화로 정착한 지는 몇천 년밖에 안 됐다. 저자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독창적으로 독서 문화가 꽃피운 시기로 뛰어난 알파벳이 발전한 고대 그리스를 드는데, 이 시기에도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은 암송으로 전승되었으며 소크라테스는 문헌에 비해 구어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아니, 그는 문헌 교육을 아예 없앨 것을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정당화'가 된 '참인 명제'를 '진리'로 간주했는데, 홀로 읽는 문헌에서는 명제를 충분히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보았고, 질문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구어를 통한 철학/철학교육이 문헌 교육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했다(너무나 짜릿한 대화를 선사하여 제자들에게 '연인'으로 기억된 소크라테스를 상기하자). 
  하지만,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 설명한 아름다운 철학적 주장들을 '대화편'에서 충실히 '기록'했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서양 학문에 토대를 놓았다. 물론 문헌을 통해서. 저자에 따르면, 숙련된 독서가는 사색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정당화'를 이룰 수 있다. 숙련된 독서가는 빠르게 문자를 읽고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글의 내용을 끊임없이 사색하고 정당화한다. 또한, 글쓰기는 내면적 대화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작가는 변화하며 글은 기술되는 동안 끊임없이 정당화된다.

  다분히 인간적인 행위인 독서가 삐걱대지 않고 이어지려면 유년 시절 부모의 책 읽어주기부터 아직은 완전히 무르익지 않은 독자인 아이/청소년의 독서 몰입 경험(보통은 생후 2천 일부터 독서 능력을 갖춘다고 한다)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무르익지 않았다고 표현했지만, 저 유년 시절은 가장 아름답고 살아 있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기이다(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아이들은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정말로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장애라는 말이 장애인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의 문제라는 걸 기억한다면, 난독증이나 독서 유창성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또한 그것이 자기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들이 결합 되어 생긴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멀리한(?) 소크라테스처럼 책 읽기가 어려운 흥미로운 독자들 또한 어느 분야에서 뜨거운 '연인'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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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생각한다 -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에두아르도 콘 지음, 차은정 옮김 / 사월의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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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번역 출간된 책 중 가장 중요한 책이 될 것 같다. 몇세기간 이어져온 인간 중심적 사고의 흐름이 변하고 있고, 그걸 인지하고 싶다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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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 사람 사이의 모든 것들은 정말로 부서지기 쉬워 보였고 나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나쁜 긴장감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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