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nse of an Ending (Paperback) -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원작
Barnes, Julian / Random House Export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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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줄리언 반스는 소설의 제목 The Sense of an Ending을 동명의 픽션 이론서에서 빌려왔다. 해당 비평서는 프랭크 커모드가 쓴 책이고 1965년 이뤄진 강연을 바탕으로 쓰여 1967년 초판이 나왔고 비교적 최근인 2000년에 수정판이 출간됐다. 책은 ‘peripeteia’(급격한 반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등장하는 개념)을 다룬다. 물론 줄리언 반스의 소설에도 반전이 중요한 역할을 해서 프랭크 커모드의 책을 읽고 썼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읽어보지 못했다. 아마존에서 책 소개만 읽었는데 책의 키워드는 종말의 파국과 위기’, ‘종말에 다다른 사람의 영혼인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노년에 다다른 화자 토니 웹스터의 회상으로 진행된다. 삶을 한 편의 이야기로 보면 노년은 결말부이다. 토니 웹스터의 회상은 결말부에 제시되는 충격적인 반전에 의해 시작되는 걸로 보인다. 김연수 소설가의 말을 빌리면 삶이라는 이야기는 계속 퇴고하는 소설처럼 끊임없이 다시 쓸 수 있다. 노년의 충격적인 사건은 화자가 자기 삶을 계속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소설의 독자는 자기 삶의 끝을 미리 짐작해보고 지금까지의 삶을 어떻게 다시 쓸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혹시 숨은 반전이 드러나서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닌지.

  나는 이 소설에 반전이 담겨있다는 점과 소설이 노년 시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동명의 비평이론서가 비극 이론서인 시학‘peripeteia’ 개념을 다뤘다는 점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반전)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노년)을 떠올렸다. 대신 다시 불완전하게도 급하게 확보할 수 있는 텍스트가 오이디푸스왕뿐이어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다시 읽어보지 못했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대해 언급할 게 별로 없어서 미리 말하자면, 노년의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앞두고 평화(일종의 내려놓음)를 얻지만 토니 웹스터는 그렇지 못하다. 그는 반전 앞에서 당황스러워한다.

토니가 베로니카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정말 못 알아먹네!(You don't get it!)”이다. 토니는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고 수사관이 된 오이디푸스처럼 자살한 친구 에이드리언과 관련한 진실을 추적하지만 계속 헛다리만 짚는다. 베로니카는 뭣도 모르고 무례하기만 한 토니 앞에서 탄식한다. 나는 토니의 눈치 없음을 사회에 합류했다가 은퇴한 평범한 영국 남성의 특징으로만 읽었었는데 오이디푸스왕을 읽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알고 있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그의 죄를 알려줘도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예언자를 비난하기만 한다. 또한,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진실을 알게 된 순간까지도 자기 자신의 진실을 모른 척하며 사건의 목격자들에게서 확인하려 한다. 토니와 오이디푸스 모두 합리적인 수사관을 자처하며 진실을 찾아 나서지만, 비합리적인 반전 앞에서 파국을 맞는다. 토니가 부러워하는 철학도(哲學徒) 에이드리언의 명료성(Clarity)은 현실 속에서 불가능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명료성을 반박한 것처럼.

  소설에는 오이디푸스와 토니의 합리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한 편의 삽화가 실려있다. 토니와 전처 마가렛의 결혼 생활 마지막 즈음 집 앞의 나무가 말썽을 일으킨다. 나무의 뿌리 때문에 집에 균열이 생겨 보험회사에서 나무를 자르라고 권유한 것이다. 나무 위에서는 비둘기가 똥을 싸서 자동차에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토니는 보험회사의 관료들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조경사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짜증을 부르는 수법을 쓴다. 자신이 상대하는 적인 보험회사 관료의 언어를 흉내 내는 것이다. 문의 편지에 회사 측에서 답장을 못 하면 앞서 보냈던 몇 번째 편지에서 이러저러한 사항을 찾아보라라고 다시 문의하는 식이다. 60년대에 대학 생활을 했던 토니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예술가가 되지는 못하고 예술행정기관에서 일했다. 토니는 보험회사에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베로니카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오이디푸스(고대)와 토니(현대)의 차이는 이것이다. 현대인은 '명예'를 잃어버렸다. 현대 관료주의의 합리성은 명예를 잃어버린 자의 합리성, 회계사의 합리성이다. 삶은 성장하지 않고 숫자만 더해간다. 명예를 잃어버린 인간이 추구할 건 자기 보존과 안정성(안정적인 직장)뿐이다. 오이디푸스는 합리적 추적이 부른 파국 앞에서 곧바로 자기 처벌에 돌입하지만, 토니는 마음에 충격을 받고서도 삶을 변함없이 이어 나간다. 소설을 읽으면 느껴지겠지만 명예를 잃어버린 현대인 토니의 본모습은 구차한 '찌질함'이다. 그는 보험회사에도, 베로니카에게도 질척거린다. (삶의 구차함을 그대로 적는 게 산문의 특징이기도 하다.)

  명예라는 말로 삶을 이어가는 토니와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차이점도 설명할 수 있다. 명예를 잃어버린 전형적인 현대인 토니는 현대적 삶의 허위를 잊지 않고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삶을 기억하며 작은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반면, 에이드리언은 부조리한 사회에 합류하지 못하고 끝내 자살한다. 하지만 작가의 질문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시대의 소음의 주인공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정부에 협력했다. ? 예술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쇼스타코비치의 타협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쇼스타코비치의 협력이 없었다면 그의 음악도 없었을 것이다. 예술을 위해 굴욕적으로 타협한 그의 복잡한 심경을 생각해봐야 한다. 토니 웹스터 또한 한 명의 아이를 잉태시키고 무책임하게 자살한 에이드리언을 어떻게 볼 것인지 고민한다. 과연 에이드리언이 종이에 적은 철학적 명료성(Clarity)과 그에 따른 자살, 그게 현실에서 가능하기는 할까? 현실 속에 잉태한 아들의 삶이 남았는데도? 논리적인 철학 연구가 끝나도 복잡한 삶은 끝내 복잡하게 남아있다. 소설을 읽고 나면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명예가 없는 삶을 어떻게 이어 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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