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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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화에는 주인공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의 상대역이 있고, 그들을 보조하고 있는 보조 출연자가 있습니다. 어떤 매우 상업적인 영화를 보다가 언젠가 저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이 아닌 모든 출연자에게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 법인데, 주인공은 마치 주인공의 삶이 모든 사람의 삶을 주무르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군, 하고 말이죠. 그 영화를 보고 얼마후에 회사 선배에게 말했습니다. '모두가 자기 삶의 나레이션을 갖고 있는거니까. 선배의 삶에도 나레이션이 있는 것이고요'. 그때 제 선배가 대답했습니다. 그런게 어딨어, 다 똑같이 사는거지.

 

'다 똑같이 사는거지'라뇨. 저는 그 이야기를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글은 한자 한자를 써서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단락이 됩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노트에 다른 글자를, 문장을, 단락을 쓰게 됩니다. 같은 탄소로 만들어졌지만,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다른 형체를 갖고 있지 않은가요? 아인슈타인이 그랬던가요. 모든 사람의 시간은 다르다고.

 

미겔 스트리트는 그런 저에게 엄청난 웃음을 주면서 뇌를 자극시킵니다. 거봐, 이 거리에서 달리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어느 날은 A가 주인공이고, 어떤 날은 B가 주인공인거지. 그러니까 모두는 자기 삶의 주인인거고. 저는 '사람은 다 똑같다'고 말했던 그 선배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지만, 아마 그는 그런 말을 했던 사실조차 잊었을 것이므로 그런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특별하게 마음이 갔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개된 챕터는 책장을 깊게 접어두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직업>의 엘리아스, <B. 워즈워스>의 시인 워즈워스, <꽃불전문가>의 모건, <모성의 본능>의 로라, <기계의 천재>의 바쿠가 아니라 바쿠부인, <경계심>의 볼로. 그 밖에도 수없이 매력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 미겔스트리트, 그곳은.

 

미겔 스트리트는 최하위층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1달러 2달러가 큰 돈인 곳이죠. 1959년에 발표되었으니 화폐가격이 떨어졌다고 치면, 지금의 20-30불 정도라고 생각해도 이해가 됩니다. 가장 가난한 거리에 살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고민과 생존법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옴니버스식으로 이야기가 꾸려져 있기 때문에, 마치 현미경으로 한쪽면을 보다가 다시 다른 쪽 면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 처럼 독자는 미겔스트리트 곳곳과 인물 각각을 면면히 들여다 보게 되는 효과를 얻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로도 전혀 손색이 없고, 그 이야기를 모두 모아 놓으면 전체 줄기 속에서 모두가 통일되는 독특한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 삶에 녹아든 희극성

 

이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문장에 스며든 유머스러움. 그것은 이 어려운 환경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기도 하고, 독자로하여금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연민을 웃음으로 승화시켜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도 느끼게 합니다.

 

<꽃불전문가>. 특히 그런 모순적인 상황이 잘 연출되었던 챕터입니다. 진지하게 꽃불을 만들다가 웃음거리가 된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저 사람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데도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보이려고 애를 쓰다니 참으로 꼴사납지 뭐야"-해트의 말) 사람들에게 바보짓이라고 손가락질 받는데도 모건은 진지하게 꽃불 실험을 계속합니다. 그의 진지함 (아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장면 역시.)은 사람들에게 우스움을 사지만, 그의 진지함은 그냥 웃음만 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안타까운 눈으로 연민을 갖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건의 집에 불이 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멋지고 아름다웠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심지어 나는 그 밤 모건의 집에서 본 그 꽃불이 생애 최고의 꽃불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후 모건은 더이상 꽃불을 만들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해트는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을 갖고자 해서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기만 하면 결국 얻을 수야 있지. 그러나 일단 그것을 얻게 되면 그걸 좋아하지 않게 되는 법이야'. 아. 가슴 시린 이야기. 누구에게는 웃음거리이고, 누구에게는 지나갈 이야기일 수 있지만, 꽃불 전문가 모건에게는 너무나 진지한 삶의 욕망과 꿈이 담긴 이야기.

 

또 하나 마음아픈 이야기. <모성의 본능>의 로라는 여덟명의 자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라에게 웃음거리 같은 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웃음거리로 술안주 삼듯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맏딸 로나가 엄마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때, 로라는 엄청나게 울게 됩니다.

 

그 울음 소리를 듣고 나는 이 세상이야말로 바보스럽고 슬픈 곳이라고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만 로라를 따라 울어버릴 뻔했다. 147.

로나가 아이를 데려왔을때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그 사실을 농담거리 삼지 않습니다. 진짜 바보에게는 바보라는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들은 이게 진짜 삶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던 겁니다. 저도 울어버릴뻔 했습니다. 손에 잡힐듯한 슬픔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 그것이 미겔스트리트의 이야기를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죽었어. 자꾸만 해엄쳐 나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결국은 지쳐서 더 헤엄칠 수가 없게돼. 149.

# 캐릭터가 이야기를 절로 만든다?

 

작품 '미겔 스트리트'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매우 개성있는 캐릭터를 갖고 있습니다. 그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반짝반짝 거립니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가면 이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 저 문장을 입에서 뱉어냈을지 상상이 갈 정도입니다. 시트콤 한 시즌은 마련할 수 있을 정도 입니다. 캐릭터가 이야기를 절로 만드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가 유영하도록 하는 인물들이 특히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기계의 천재> 바쿠입니다.

 

기계에 엄청난 집착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기계든 해체시키고 다시 고쳐야 직성이 풀립니다. 멀쩡한 기계도 다시 풀어 조립했다가 고장나게 만듭니다. 이런 인물덕분에 이야기는 흘러가고 멀쩡한 기계가 인물을 통해 오히려 고장나는 것을 읽으며 오히려 머릿속이 뻥 뚫리는 쾌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바쿠가 고장내놓은 기계를 고치러온 진짜) 기계공은 더럽고 성난 얼굴을 엔진으로부터 처들더니 말했다. "백인들이 그들 손으로 직접 만든 엔진인데 당신네들 같은 온갖 무식쟁이들이 이러쿵저러쿵한다면 그 결과야 뻔한 것 아니겠어요?"

바쿠는 내게 눈을 껌뻑해 보였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카뷰레터(가 고장난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한참 뒤에 기계공이 와서 바쿠에게 대고 말합니다.

 

제기랄. 사려거든 롤스로이스 차나 살 것이지. 그 회사에서는 엔진을 뜯어보지 못하게 봉한 채 자동차를 출하하니까.

아 정말 사랑스러운 인물이 아니겠어요. 권력과, 권력의 구조와, 식민지라는 사회적 환경 속에 처한 인물이라는 것을 모두 차치하고도, 저는 한참이나 이 인물이 사랑스러웠습니다. 옆에서 애가 터져 죽는 바쿠의 아내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온 연민을 다해 전하며.

 

 

# 역자에 대한 반항심

 

번역본은 매우 깔끔합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려고 저런 소주제를 쓴 것은 아닙니다. 책을 다 읽고 역자의 글을 펴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예속 생활을 해오는 동안 열등감을 느껴왔고 그에 따른 자기 멸시의 습성에 깊이 젖어버렸다'는 이야기에는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다스림을 받은 한국인이 흔히 "우리 한국사람들은 이래서 못쓴단 말이야. 일본인들 같은면 이렇지 않을거야." 라는 말을 별 저항감없이 뇌까리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는데 이와 꼭 같은 사고 방식이 트리니다드 주민들에게는 더욱 깊이 심어져 있었다. 298

자기 자신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멸시, 그것이 이런 해학성을 낳게 했다는데에는 공감이 되었습니다. 미국문화나 일본문화에 '그대로' 젖어 정신적인 예속상태를 자초해버렸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인물(미국에 대한 찬양으로 미국식 악센트로 말하고 미국인식 옷을 차려입은 해트의 동생 에드워드)을 보며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두번째로 사람들의 권태와 도덕적 타락상태가 편집광적 증세를 보이는 인물이나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인물을 형성했다는 것에도 깊이 공감했습니다. 정상인이 비정상인으로 보일정도로 미겔스트리트의 사람들은 어딘가 독특한 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실제이든, 허구이든, 그건 우선 소설속으로 들어와 버린 이상 논할 가치를 잃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적인 면이 사회적 결정론에 의해, 그러니까 사회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일어난 결과라고 하는 것에도 수긍을 했습니다. 식민지 사회의 타락적 환경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운명, 혹은 노출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실패, 좌절을 낳게 했다고 하겠습니다. 

 

반항을 하고 싶은 부분은 나이폴이 미겔스트리스에 갖고 있던 태도같은 것입니다. 역자는 역자의 말에, 마지막 에피소드가 감동적이라고 말하며, 결국 떠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려고 열여섯편의 단편을 끌어왔다는 것이죠.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이웃들과의 클럽이 해체되고 나는 공부를 하러 영국으로 떠나죠. 물론 단편으로서 손색없는 각각의 글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저는 이런 해석이 과연 완벽히 맞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폴도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나이폴이 이 곳에 애증을 한껏 심어놓은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애정이 없었다면 과연 그곳에 대해 이렇게 해학적으로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애정을 담아 인물들을 표현해 낼 수 있었을까요? 꽃불에 미쳐있든 기계에 미쳐있든 그들의 그런 광적인 행동마저 이토록 연민과 애정을 담아 쓸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직도 나이폴이 미겔스트리트에 자신의 일부를 떼어놓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마지막 문장을 읽은 오늘 아침에 더 깊이 각인 되었습니다.

 

해트가 감옥에 가던 날 나의 일부가 죽어버렸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가 된다고 일러준 나이폴. 그의 글에서 보이는 희극성과, 희극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탐났던 작품이었습니다.

 

-리뷰를 쓰면서 느끼는 언어적 한계:

저는 요즘 매우 복잡한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말로 표현을 못하겠고, 별로 하고 싶은 말도 없습니다. 이 리뷰를 쓰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밖에 표현을 못하는가 한참을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제가 느낀 것의 반도 이 글에 담지 못했습니다. 저는 죽어가고 있을까요, 살려고 발버둥치는 걸까요. 아마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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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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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첫문장 못쓰는 남자’는 모두 열여섯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입니다. 매우 짧은 분량이지만 단편 하나하나가 뛰어난 재치와 입담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재치와 입담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리뷰에 쓰고 싶은 주제는 작가 나름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재치’와 ‘위트’를 무기삼아 아주 재미있게 비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빠, 나중에 기억을 하려고 책을 좀 함부로 다룹니다. 마음에 드는 단편이 시작하는 장은 과감하게 책장을 접어두기도 하고, 무언가 표시를 해두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집을 읽고 나니, 제가 접어둔 책장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상상력을 사고의 영역으로 확장시킬 줄 아는 작가. 시대에 대한 냉소섞인 문장하나 쓰지 않고 상상력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만으로 충분히 세태를 꼬집는 작가. 반해버렸습니다.

 

‘첫문장 못쓰는 남자’와 ‘침입자’를 읽을때까지만 해도 저는 ‘음, 상상력이 매우 뛰어난 작가로군’하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첫문장 못쓰는 남자의 피에르 굴드가 첫문장을 못쓰고 마지막 문장을 못 쓰는 이유. 이 두 가지만을 가지고 매우 재미있게 한편의 단편을 만들었구나.라고 말이죠. 출근길 버스에서 이 단편을 덮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한줌 재로 남는 인간이라. 이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을 표현하는데, 사실 (...) 이거하나면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첫문장을 지우면 두 번째 문장이 첫문장이 된다.’라니. 처음은 매우 중요한가요? 발을 딛는 시작점이라서요? 글쎄요. 첫경험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첫경험이 아닌 경우가 많지 않은가요? 그러니 ‘언제 처음 해봤어?’는 별로 중요한게 아닌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다’. 그 자체에 있으니까요. ‘처음’에서 ‘벗어나게’되는 상태가 바로 자유의 시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기발한 착상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피에르 굴드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침입자’도 마찬가지였죠. 누군가 내 정원에 매일같이 침입해서 내 잔디를 깎아준다. 기발하군, 이정도. ‘그가 지나칠 정도로 착하게 굴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의 보이지 않는 존재에 길들여졌을까?(31쪽)’를 보면서 다시 책을 덮고 사람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는 갖게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조금 가혹하지 않은가, 이 정도.

 

그런데 제 생각은 이 소설집의 중반을 향해 달리며 차츰 달라졌습니다. ‘거짓말 주식회사’, ‘박물관에서’, ‘블럭’, ‘높은곳’,‘내 집 담벼락속에’. 이 소설들도 역시 앞에서 느꼈던 것처럼 기발한 착상에서 시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 여운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생각이 깊은 사상가들, 지식인들이 공중부양을 한다는 (역시나) 희귀한 설정을 가진 ‘높은 곳’을 읽는데 이 문장:

 

 

진정한 천재로 인정받아온 몇몇 사상가들은 아무리 위로 치솟고 싶어도 지면이 발이 들러붙어 옴짝달싹 못하는 반면, 이름도 생소한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하늘 높이 떠오르곤 했다. 96.

 

 

이 문장을 읽는데 저절로 입에서 감탄이 나왔습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거로구나!

인간의 이성에 대해 비웃는 듯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떠올랐습니다. 동굴 속에 있는 (고만고만한) 인간들은 그 안에서 그림자를 보며 살고 있을 뿐이로군. 그걸 비웃고 있는거야. 라는. 그러고나자 ‘사회적인 명망이 있고 더 깊은 사고를 갖고 있는 사상가가 더 높은 곳으로 공중부양 하더라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 그 믿음에 부응하고자 인기를 얻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갔다고 사람들이 믿게 하고 싶어하는 지식인들’을 거기에 왜 집어넣었는지가 뚜렷해졌습니다.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 사고의 깊이까지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당연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망각하니까요. 마치 잘 포장된 사람들에게 질투와 경외를 느끼는 대중은 얼마나 무지한가. 작가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특이한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설정은 이 단편소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물관에서’에서는 우는 조각상들을 설정해놓고 이들이 우는 이유를 스스로 이야기하게 만들더니, ‘사람들이 봐주지 않아 소외받았기 때문’ 이라고 이야기 하는 여자 조각상들을 통해 소통이 불가능한 자기 상에 갇힌 사람들을 교묘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내 집 담벼락 속에’에서는 스스로 벽안에 들어가 나이를 먹지 않은 남자를 설정해 ‘사생활이 소멸위기에 처해있는’ 이 시대를 고발합니다. 스스로 담벼락속에 들어간 남자는 파리 5구,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팡테옹 광장의 담벼락속에 다시 들어가 버립니다. ‘은밀함’이 사라졌다고 하면서 말이죠. sns와 인터넷이 엄청나게 발달한 현대시대, 사실 개인의 사생활은 스스로에 의해서건 타인에 의해서건 우연이건 필연이건 심심치 않게 노출됩니다. 개인의 은밀함을 지키고 싶었던 20세기에서 온 남자가 벽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는 설정을 통해 작가는 사생활이 없어져가는 21세기, 복잡하고 시끄럽고 온갖 네트워크가 범람한 세상을 통쾌하게 보여줍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더 이상 숨길게 없는 세상에서는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가 없고, 따라서 이제 벽으로 드나드는 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다. 145

‘크누센주의, 그것은 사기 협잡’에서는 여론이 어떻게 한 사람의 명예를 급속히 실추시킬 수 있는 것인지 보여줍니다. 인터넷을 할 수 없어서 크누센주의를 찾아볼 수는 없는데 (리뷰를 올릴때 크누센주의를 찾아보았더라도 이대로 올릴 겁니다) 심지어 크누센주의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소설 뒤에 사실인 듯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게 사실이 아니면 억울할 정도입니다. 무지의 상태인 독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말입니다. 크누센을 제외하고도, 이렇게 오해로 인해 대중의 매도를 받은 숨어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무지한 대중의 하나로 창피함을 느낍니다.

 

 

예컨대 이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에 기인한 착상들을 본격문학을 통해 구상화시킴으로서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록이나 담벼락은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공간이지만 상상력 이상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모든 상상력은 인간의 면면에 대한 반성과 인간에 대한 애착으로 끝을 맺습니다.

 

-

피에르 굴드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네요. 대부분의 소설에 피에르 굴드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는 학예연구원이기도 하고, 거짓말 주식회사의 뛰어난 직원이기도 하고, 굴렁쇠 출판사의 직원이기도 하며, 제대로된 작품 하나를 쓰고 죽기를 갈망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굴드가 다시 등장하면 독자는 이제 반갑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굴드는 곧 베르나르 키리니의 분신이라는 것이 작품을 읽을 수록 확연히 드러납니다. 굴드를 통해 작가는 늘 작품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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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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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브로덱이고 그 일과 무관하다'.

 

 

이 책의 첫문장입니다. 브로덱이 은밀하게 써온 비공개 보고서가 이 소설의 내용이며, 300쪽을 훌쩍 넘는 장편을 빌어 브로덱은 한 공간에서 있으나 같은 문화를 갖고 있지 않은 이방인(이 책에서 말하는 프렘더, 아마도 Fremder로 추정되는 단어: 혹은 안더러, 아마도 Anderer로 추정되는 단어) 이 어떻게 그 그룹 안에서 소외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그를 탐탁치않게 여깁니다. 심지어 수십년 동안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았던 브로덱에게도 호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브로덱이 검은 눈동자, 검은 색에 가까운 머릿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방인에게 누구도 ‘직접적으로’ 떠나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의 당나귀를 죽이고 (물론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의 이동수단인 당나귀를 죽인것에 대해서 역설적이라고 브로덱은 말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성호를 그어주지 않죠.

 

소설속에 나오는 비유중에 주제에 가장 밀접한 것는 '렉스 플라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 브로덱은 어떻게 그룹에 속한 이들이 낯선 이를 '묵인'하고 희생시켜버리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스무마리 정도 모여사는 렉스 플라메라는 이름의 인시류 변종은 연대 의식 같은 것을 갖고 있어서, 한 놈이 무리 모두를 먹일 수 있을 정도의 먹이를 발견하면 무리들을 모이게 합니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나비들이 그들 중에 끼어드는 것을 묵인하고요. 그런데 만약 침략자가 나타나면 (그러니까 침략이 발생하거나, 위험이 닥치거나, 일이 일단 벌어지는 순간에는 말이죠) 렉스 플라메들은 알 수 없는 언어를 이용해 서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깁니다. 그들 집단에 끼어든 나비들은 정보를 얻지 못했으므로 새에게 먹히게 되지요. (관련된 이야기는 270쪽에 있습니다.)

 

안더러는 이들과의 유대를 위해 박람회를 열고 모든 술값을 내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안더러는 그들에게 그저 낯선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차가운 자세는 사실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입니다. (미국에 비하면 말입니다) 워낙 침략을 많이 당해온 유럽국가에서는 이방인에 대해 매우 매몰찬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여기에는 낯선 사람에 대한 ‘친절함’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낯선 사람이 무리의 일원으로 함께 하려고 할 때 그 친절함은 마치 렉스 플라메의 행동처럼 무관심한 듯 받아들이지만, 정작 위험이 닥쳤을 때 이들은 매우 매몰차고 냉정하게 무리의 일원이 아닌 종족들을 내치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의 ‘접경’지역은 그런 낯선이에 대한 홀대가 매우 가혹합니다.

 

유럽만 그럴까요?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문학이라는 것이 감성과 이성이 교묘하게 작전을 세워 만국 공통의 언어로 사용되지 않을 수가요.

 

어쨌든 우리의 브로덱은 이 모든 일들을 마치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듯 쓰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고서를 쓰고 있는 이 모든 행위가 ‘착각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긴채 말입니다.(355쪽에 딸이없는 아버지가 딸을 안고 뽀뽀를 하다가 바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

 

이 작품은 첫 부분이 매우 지루합니다. 그 지루함은 무려 100쪽을 넘어갈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합니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보고서를 쓰기로 한 브로덱의 이야기가 보고서인지 진짜 벌어진 일인지 헛갈리기도 하면서 무수히 독자를 괴롭게 만듭니다. ‘인간은 한 점 바람이다.’라거나 ‘인생은 하찮고 하찮은 것에 우리 인생이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 간다’는 둥 매우 추상적이고 지루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지나면 갑자기 생기가 돕니다. 줄거리가 긴장감이 생기고 음습한 작품의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 지점. 인간이 하찮다고 하는 이유를 자꾸 찾으려고 애쓰던 독자에게 후반부의 줄거리가 우뇌를 자극하고, 음습한 분위기와 긴장감이 독자의 좌뇌를 자극하는 그 지점에 이 소설의 끝이 보입니다. 그때부터는 소설이 매우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이 작품의 매력이 거기 있습니다.

 

안더러는 죽음을 맞이했고, 안더러의 친척쯤으로 보이던 주인공 브로덱은 떠나는 것을 택합니다. 공식적인 보고서를 불태우고 머릿속에 비공식 보고서만 남긴 채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하찮은’ 것에 인생이 좌지우지 된다던 브로덱은 그 ‘하찮을 수 없는 사건’을 겪은 후 바람이 되어 날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마을은, 사람들은, 모두 (동화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매우 난해하지만 한가지 줄거리로 끈기있게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던 구조가 조금 어려운 영화같은 소설.

 

브로덱과 함께 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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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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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연히 어톤먼트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게 되었던 계기는 순전히 제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제임스 맥어보이 때문이었지만, 흥미진진한 전개와 이야기 사이에 전해지는 울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야기가 갖는 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했죠.

만일 그 영화의 원작이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이 분의 소설을 찾아 읽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아주 끔찍한 이야기들입니다. 강간, 살인, 근친상간. 그 내용 하나하나가 엄청난 무게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편 한편 천천히 곱씹듯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요새 새로운 글을 구상하면서,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가 아니고 ‘일이 벌어지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는 버릇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인공의 심리가 변해가는 과정, 행동에 원인을 실어주는 방법. 이런 것들의 표현법을 요즘 골똘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표제작 ‘첫사랑, 마지막 의식’이나 ‘가장 무도회’가 마음을 끌었다는 분들이 있으셨는데, 저는 ‘가정처방’, ‘나비’,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 같은 작품을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이 두 작품은 결과로서의 문제적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주인공이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정처방’은 근친상간에 관련된 이야기 인데, 강간을 해서 무엇을 결정시키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강간범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충실히 문제적 주인공의 입장에서) 어떻게 강간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묘사가 탁월했습니다. 문제를 깊숙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진지한 문제에 대해 무섭도록 진지하게 다가가면 오히려 독자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가볍게 문제를 다뤄버리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인공과 친한 (주인공보다 한살어린) 레이몬드를 바라보는 십대 주인공의 서술:

 

레이몬드는 나를 베일에 싸인 성인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그 세계를 직관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속속들이 이해한 건 아니었다. .. 다시말해 그는 이 세계를 알 만큼 알았으나 세계는 그와 친해질 마음이 없었다고나 할까. 가정처방, 36

처음으로 자위를 하는 주인공의 심리묘사:

 

그(레이몬드)가 하라는 대로 하자 얼마 안 가 몸이 붕 뜨며 오장육부가 시시각각 허공으로 녹아 없어질 듯 한 정체불명의 따뜻한 쾌락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38.

주인공이 여동생을 강간하기로 마음먹으면서(소꿉놀이 후):

 

"코니! 엄마랑 아빠랑 하는 젤 중요한 거 하나 빼먹었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는 여전히 유아기적 발달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인데, 이 소설이 1970년대 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전히 매우 유아기적인 이 시대의 성인들을 비꼬는 것 같아 통쾌했습니다. 좋은 소설은 이렇듯 통시대적 유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유아기적 체험을 잊지 못하고, 결국 벽장 안 어둠속으로 들어가 쾌락을 느끼는 주인공에게 측은함과,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뱉는 것에 대한 가벼움이 주는 통찰력이 놀라웠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문제적 주인공이 감옥에 들어가는 상황에 처하는데, 그 과정이 매우 현실적으로 이야기됩니다.

 

 

‘나비’는 장면하나하나가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 역시 유아를 살인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 남자가 어떻게 여자아이를 살인하게 되었는가를 영화 시퀀스로 보여주는 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심리묘사는 물론이고, 이웃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남자의 모습을 남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부분이 매우 탁월합니다.

 

 

단편의 힘이 긴장감과 속력에 있는 것이라면,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놀라울만한 집중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이런 어두운 배경의 주제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면 작가가 글을 쓰는 소재와 주제가 자꾸 이 쪽을 건드리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은 듭니다. 왜 악역으로 고착화된 배우들, 가끔 고충을 토로하곤 하는 것 처럼요. 이 작가의 소설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조금 밝은 주제의 소설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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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철학 - 패션에 대한 철학의 대답
라르스 스벤젠 지음, 도승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지난 반세기동안, 패션은 엄청난 문화적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단순히 입는 행위를 위한 기능 뿐 아니라, 문화와 가치가 입혀지기 시작하면서 예술은 문화가, 문화는 예술이 되기도(6장.패션과 예술) 했다. 상업시장에서 매우 큰 상품이 되었으며, 디자이너들은 예술과 산업을 오가며 활동한다. 마치 대중문화와 예술 사이의 선을 넘나들듯 패션산업은 번성해왔다. 현대는 조율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다. 사람들은 혼란을 겪게 되었다. 무엇이 올바른지 알지 못하고,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없이, 사람들은 그저 '소비'하게 되었다. 이 급박한 사회속에서, 패션의 철학을 논해야 하는 가치있는 발언은 '느림의 미학'에 있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와,
속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밀란 쿤데라

 

철학은 '일상의 용어'로 해석될 수 있다. 왜, 철학은 삶과 인간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 일상의 모든 부분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 없다고 생각하니, 패션철학이라는 주제를 봤을때도 크게 낯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을 때 중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은 패션을 어떻게 철학으로 풀어가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책 전체를 통틀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보인다. 패션은 '기능적이고' '표피적인' 면에서 발달해왔으며, 패션은 그것을 분출시키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패션 이론가인 캐롤라인 에반스 Caroline Evans가 말했듯이 "패션은 문화 내부에 순환하고 있는 중요한 관심사들을 표현할 수 있으며 그것이야 말로 세계의 불편한 진실들의 노선이다"라는 주장에 공감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진실을 말하는가? 우리가 표피적 차원에만 공을 들이고 점차적으로 기능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 우리가 가진 정체성의 일관성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것과 관계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패션은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을 실현한 추동력이었다는 진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302.

* 패션과 소비

 

이 책에서는 패션을 몇가지 구분으로 철학과 연결시켜 사유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들어왔던 것이 바로 '패션과 소비'이다. 단연 철학에서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봐 왔을 소비문화에 젖어든 현대인의 소비의 습성과 가치관. 소비가 습관이 된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맥을 짚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언제나 새로운 물건으로 갈아탈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던 상품이 가지는 가장 매력적인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태도가 비합리적으로 느껴지는가? 당연히 비합리적이다. 소비 사회는 비합리적인 개인을 전제로 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이 소비 사회의 합리성은 사회 구성원들을 비합리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수준에서 작동할 뿐이다. ........ 아무리 소비한다 해도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분주하게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그런 의미에서 이성적인 행위자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겸비해야만 한다. 246.

낡은 것을 버리는 것이 습성화된 우리네 사람들. 지금까지 부르디외의 계급론에 대해 부르짖으며, 사회의 계급이 개인의 성향을 만든다고 주장하던 저자는, 정작 패션의 영역으로 돌아오자 역설적으로 현대의 소비는 계급의 정체성이 아닌 '개인적 정체성'과 관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비자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하려는 노력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비는 정체성의 형성을 침해하는 순간에 주목하는 소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환경이 계급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 베블린이 주장하는 시대의 소비자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속한 계급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했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비자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다. 누군가의 정체성이 그들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 혹은 사물들이 가진 상징적인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 정체성은 상징적 가치만큼이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36)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짐멜(Georg Gimmel)의 '패션과 소비'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자.

 

자기는 자기 세계 안의 사물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호 작용의 풍부한 기회를 소비가 제공한다는 점에서 소비야말로 자기의 고양을 위한 특권화된 영역이라고 본다......근대는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한 사회라는 점에서 솝자들은 상품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 소비를 통한 조절에 실패하게 된다. 상품의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증가하면 상품의 소비를 통해 자기 삶의 지향과 조화로운 도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문화의 변화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221.

더 심각하게 현대사회와 소비를 꿰뚫는 문장은 사회연구자 롭 쉴즈(Rob Schields)에서 나온다: 방향성의 상실을 통해 모든 통제력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그저 쇼핑센터를 수동적으로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219. 패션과 소비에 대한 사회학자, 철학자들의 담론을 듣고 있노라면 '소비하는 행위'가 그저 즐거운 '오락거리'로 전락했다는 생각마저든다. 소비야말로 현대인의 권태를 없앨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수단이 되었기(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n, 211)때문이다.

 

*패션과 예술

 

패션은 소비의 영역도 있지만, 패션 자체가 예술이 되는 문화적 영역을 배제할 수 없다. 예술은 일단 자신의 세계에 관심을 집중해왔고, 패션은 자신을 예술적 연구를 위한 하나의 재료로서 기회를 제공해왔다. (178) 소비문화가 확산되면서 상류층의 소유물이던 패션은 대중 산업으로 발전했고, 서둘러 대중복의 흐름을 쫓은 신사복은 그렇지 않았던 숙녀복보다 더 발달하게 되는 기염을 토했다. 패션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패션이 되는 과정은 기이했다.

 

어떤 대상에 상징적 가치를 덧붙이기 원한다면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징적 가치를 가진 대상의 옆에 평범한 대상을 나란히 놓기만 하면된다. (174)

*패션과 육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전적으로 사회적 기준의 내재화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50.

 

우리 시대에는 시대의 요구와는 맞지 않는 외모, 혹은 다른 시대에 숭상될만한 외모를 가진 불행한 영혼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과거의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기회를 갖는다. 146. 모든 시대마다 각양각색의 얼굴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오직 한 종류의 얼굴에만 아름답고 행복한 이상적 이미지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성형이 아무렇지 않게 된 대한민국, 외모지상주의라고 부르짖으면서도 '좋은게 좋은 것'이고 '예쁜게 예쁜 것'이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린 이 사회에서 패션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패션은 '스타일'이라고 일컬어진다. 외모를 커버해주는 것이 '패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예쁜'사람보다 '패셔너블'한 사람을 개성있다고 말하는 사회, 아마 모두가 이즈음이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패션은 새로운 대상이 언젠가는 잉여적인 것으로 변해가는 견고한 흐름을 필요조건으로 하여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 나올 것이 이전의 것보다 반드시 나아야 한다는 어떤 목적 의식없이 그저 새로운 것이 이전의 것을 대체한다는 쉼없는 지속만 지향해왔다. (57)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일관성'은 더 깊이 들여다 봐야 할 내용인데,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만 한 부분이기도 하다. 책의 앞부분에 느림의 미학에 대해 설명한 밀란 쿤데라의 문장이 나왔던 이유가 여기 있다고 본다. 패션은 변화해왔고, 그 '변화'에는 일관성이 있었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일관성이 패션을 완성해왔다. 바로 그 지점, 패션에 대한 철학이 가치있게 빛나는 점을 이 책은 관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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