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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내 이름은 브로덱이고 그 일과 무관하다'.
이 책의 첫문장입니다. 브로덱이 은밀하게 써온 비공개 보고서가 이 소설의 내용이며, 300쪽을 훌쩍 넘는 장편을 빌어 브로덱은 한 공간에서 있으나 같은 문화를 갖고 있지 않은 이방인(이 책에서 말하는 프렘더, 아마도 Fremder로 추정되는 단어: 혹은 안더러, 아마도 Anderer로 추정되는 단어) 이 어떻게 그 그룹 안에서 소외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그를 탐탁치않게 여깁니다. 심지어 수십년 동안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았던 브로덱에게도 호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브로덱이 검은 눈동자, 검은 색에 가까운 머릿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방인에게 누구도 ‘직접적으로’ 떠나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의 당나귀를 죽이고 (물론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의 이동수단인 당나귀를 죽인것에 대해서 역설적이라고 브로덱은 말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성호를 그어주지 않죠.
소설속에 나오는 비유중에 주제에 가장 밀접한 것는 '렉스 플라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 브로덱은 어떻게 그룹에 속한 이들이 낯선 이를 '묵인'하고 희생시켜버리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스무마리 정도 모여사는 렉스 플라메라는 이름의 인시류 변종은 연대 의식 같은 것을 갖고 있어서, 한 놈이 무리 모두를 먹일 수 있을 정도의 먹이를 발견하면 무리들을 모이게 합니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나비들이 그들 중에 끼어드는 것을 묵인하고요. 그런데 만약 침략자가 나타나면 (그러니까 침략이 발생하거나, 위험이 닥치거나, 일이 일단 벌어지는 순간에는 말이죠) 렉스 플라메들은 알 수 없는 언어를 이용해 서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깁니다. 그들 집단에 끼어든 나비들은 정보를 얻지 못했으므로 새에게 먹히게 되지요. (관련된 이야기는 270쪽에 있습니다.)
안더러는 이들과의 유대를 위해 박람회를 열고 모든 술값을 내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안더러는 그들에게 그저 낯선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차가운 자세는 사실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입니다. (미국에 비하면 말입니다) 워낙 침략을 많이 당해온 유럽국가에서는 이방인에 대해 매우 매몰찬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여기에는 낯선 사람에 대한 ‘친절함’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낯선 사람이 무리의 일원으로 함께 하려고 할 때 그 친절함은 마치 렉스 플라메의 행동처럼 무관심한 듯 받아들이지만, 정작 위험이 닥쳤을 때 이들은 매우 매몰차고 냉정하게 무리의 일원이 아닌 종족들을 내치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의 ‘접경’지역은 그런 낯선이에 대한 홀대가 매우 가혹합니다.
유럽만 그럴까요?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문학이라는 것이 감성과 이성이 교묘하게 작전을 세워 만국 공통의 언어로 사용되지 않을 수가요.
어쨌든 우리의 브로덱은 이 모든 일들을 마치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듯 쓰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고서를 쓰고 있는 이 모든 행위가 ‘착각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긴채 말입니다.(355쪽에 딸이없는 아버지가 딸을 안고 뽀뽀를 하다가 바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
이 작품은 첫 부분이 매우 지루합니다. 그 지루함은 무려 100쪽을 넘어갈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합니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보고서를 쓰기로 한 브로덱의 이야기가 보고서인지 진짜 벌어진 일인지 헛갈리기도 하면서 무수히 독자를 괴롭게 만듭니다. ‘인간은 한 점 바람이다.’라거나 ‘인생은 하찮고 하찮은 것에 우리 인생이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 간다’는 둥 매우 추상적이고 지루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지나면 갑자기 생기가 돕니다. 줄거리가 긴장감이 생기고 음습한 작품의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 지점. 인간이 하찮다고 하는 이유를 자꾸 찾으려고 애쓰던 독자에게 후반부의 줄거리가 우뇌를 자극하고, 음습한 분위기와 긴장감이 독자의 좌뇌를 자극하는 그 지점에 이 소설의 끝이 보입니다. 그때부터는 소설이 매우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이 작품의 매력이 거기 있습니다.
안더러는 죽음을 맞이했고, 안더러의 친척쯤으로 보이던 주인공 브로덱은 떠나는 것을 택합니다. 공식적인 보고서를 불태우고 머릿속에 비공식 보고서만 남긴 채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하찮은’ 것에 인생이 좌지우지 된다던 브로덱은 그 ‘하찮을 수 없는 사건’을 겪은 후 바람이 되어 날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마을은, 사람들은, 모두 (동화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매우 난해하지만 한가지 줄거리로 끈기있게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던 구조가 조금 어려운 영화같은 소설.
브로덱과 함께 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