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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년 전 우연히 어톤먼트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게 되었던 계기는 순전히 제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제임스 맥어보이 때문이었지만, 흥미진진한 전개와 이야기 사이에 전해지는 울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야기가 갖는 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했죠.
만일 그 영화의 원작이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이 분의 소설을 찾아 읽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아주 끔찍한 이야기들입니다. 강간, 살인, 근친상간. 그 내용 하나하나가 엄청난 무게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편 한편 천천히 곱씹듯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요새 새로운 글을 구상하면서,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가 아니고 ‘일이 벌어지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는 버릇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인공의 심리가 변해가는 과정, 행동에 원인을 실어주는 방법. 이런 것들의 표현법을 요즘 골똘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표제작 ‘첫사랑, 마지막 의식’이나 ‘가장 무도회’가 마음을 끌었다는 분들이 있으셨는데, 저는 ‘가정처방’, ‘나비’,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 같은 작품을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이 두 작품은 결과로서의 문제적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주인공이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정처방’은 근친상간에 관련된 이야기 인데, 강간을 해서 무엇을 결정시키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강간범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충실히 문제적 주인공의 입장에서) 어떻게 강간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묘사가 탁월했습니다. 문제를 깊숙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진지한 문제에 대해 무섭도록 진지하게 다가가면 오히려 독자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가볍게 문제를 다뤄버리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인공과 친한 (주인공보다 한살어린) 레이몬드를 바라보는 십대 주인공의 서술:
레이몬드는 나를 베일에 싸인 성인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그 세계를 직관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속속들이 이해한 건 아니었다. .. 다시말해 그는 이 세계를 알 만큼 알았으나 세계는 그와 친해질 마음이 없었다고나 할까. 가정처방, 36
처음으로 자위를 하는 주인공의 심리묘사:
그(레이몬드)가 하라는 대로 하자 얼마 안 가 몸이 붕 뜨며 오장육부가 시시각각 허공으로 녹아 없어질 듯 한 정체불명의 따뜻한 쾌락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38.
주인공이 여동생을 강간하기로 마음먹으면서(소꿉놀이 후):
"코니! 엄마랑 아빠랑 하는 젤 중요한 거 하나 빼먹었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는 여전히 유아기적 발달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인데, 이 소설이 1970년대 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전히 매우 유아기적인 이 시대의 성인들을 비꼬는 것 같아 통쾌했습니다. 좋은 소설은 이렇듯 통시대적 유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유아기적 체험을 잊지 못하고, 결국 벽장 안 어둠속으로 들어가 쾌락을 느끼는 주인공에게 측은함과,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뱉는 것에 대한 가벼움이 주는 통찰력이 놀라웠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문제적 주인공이 감옥에 들어가는 상황에 처하는데, 그 과정이 매우 현실적으로 이야기됩니다.
‘나비’는 장면하나하나가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 역시 유아를 살인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 남자가 어떻게 여자아이를 살인하게 되었는가를 영화 시퀀스로 보여주는 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심리묘사는 물론이고, 이웃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남자의 모습을 남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부분이 매우 탁월합니다.
단편의 힘이 긴장감과 속력에 있는 것이라면,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놀라울만한 집중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이런 어두운 배경의 주제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면 작가가 글을 쓰는 소재와 주제가 자꾸 이 쪽을 건드리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은 듭니다. 왜 악역으로 고착화된 배우들, 가끔 고충을 토로하곤 하는 것 처럼요. 이 작가의 소설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조금 밝은 주제의 소설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