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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라는 미친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 - 패러다임을 뒤흔든 논쟁의 과학사
토비아스 휘르터 외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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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닐스보어의 머릿속도 궁금했고, 파장이론을 만들어놓고도 양자역학을 부정한 아인슈타인의 머릿속도 궁금했다. 보르헤스와 토마스 핀천이 만들어낸 세계를 보면서 그들의 머릿속도 궁금해졌다. 무엇보다, 내가 사는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가 아닌 세계도 궁금해졌다.

 

책이 도착하고 보니 독일 사람 두 사람이 쓴 책이었다. 한명은 철학과 수학을, 한명은 물리학을 공부했다. 책 날개에 적힌 재밌는 저자 설명: '이 책을 쓰면서 토비아스 휘르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실제로는 여러개의 세상들일 수 있다는 생각과 친숙해졌다. 하지만 막스 라우너는 다중우주이론을 더욱더 기묘한 이야기로 여기게 되었다.'

 

"그럼 평행우주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영혼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나요?" 어떤 여인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우리의 죽은 선조는 다른 우주들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미치오 카쿠의 답변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우주, 그러니까 그들이 이미 죽고 사라진 우주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우주를 진짜인 것으로, 우리의 것을 가짜로 여깁니다"(월드 사이언스 페스티벌, 2008년 5월 맨해튼)

이 대화만 뚝 떨쳐놓으면, 마치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법한 대화다. 죽은 자들이 계속 사는 세계라니, 심지어 그 세계에서는 우리가 가짜라니. 이것이 다중우주다. 왜 이런 공상같은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 이론 물리학자들의 설명은 정말 '기가 막히다'. 중세 시대 기독교 사상에서 하느님은 전지전능했다. 그 전지전능을 뚫고 이 세계가 다른 세계가 될 수도 있고 이 우주가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던 과학자들은 죽어나갔다. 그렇게 보면, 중세란 참으로 많은 것을 겁탈했던 시기였다. 당연히 이런 공상같은 세계에는 수많은 이야기거리를 품고 있다. 보르헤스, 핀천이 만들어 낸 그 세계도, 다중우주에서는 가능하다.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 등장하는 노인의 세계도, 다중우주에서는 가능하다.

 

내가 내가 아닐 수 있고, 내가 아닌 것이 나일 수도 있다. 나는 그저 물질이기도 하고, 허상이기도 하고, 스치는 바람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만 하면 양자역학이다. 더 나아가, 그러니 결국 소유라는 것은 없었고, 나는 공과 같으며, 내 존재는 원래 자유로웠던 존재, 괴로움이 없던 존재라고 하면, 이건 불교적 관점이 된다. 정말. 신기하게 들어맞는다.

 

미친 생각 같은가?

훗. 평행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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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라는 미친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 - 패러다임을 뒤흔든 논쟁의 과학사
토비아스 휘르터 외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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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평행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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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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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글에는 굉장한 동양철학의 통찰력이 숨어 있다.

역술적인 면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운명을 '간파'하고 그것을 헤쳐나가라는 것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자기 운명과 직면해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명리학을 앞서 놓았던 저자는, 명리학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인연조건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 뿐이라고 말하고,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인간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는 인간도 없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늘 길한 것도 없고 늘 흉한 것도 없다는 것. 받아들이려고만 하면 반드시 비워내야할때가 오고, 욕망을 쌓으면 반드시 분출해야할 때가 온다. 그것은 우주적 관점에서 모든 것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모복이 없다는 말은 자신의 운명이 드세다는 것과 같은 말, 재물복이 많다는 것은 정신세계에 대한 보완이 더 필요하다는 말.

 

당연히, 이런 풀이에 '좋은 사주'란 없다. 그것을 운명처럼 믿어버리는 것이야 말로 가장 해서는 안될일. 왜냐하면, 인간의 운명은 원래 돌고 돌게 되어 있으며, 좋은 때가 있으면 나쁜 때도 반드시 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궁합을 맞춰본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상보가 있을 뿐 -충이라는 개념도 결국 상충, 그러니까 당연히 오행의 한쪽이 먹히는 관계에 있으면 한쪽은 먹는 관계에 있는 법이라는 거다.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은 매우 적절하게 오이디푸스 신화를 통해 소개된다.

 

신탁이 예언한 바대로, 자신이 아비를 죽이고 엄마를 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먼 길을 떠난다. 눈을 찌른다는 건 더 이상 이전의 방식대로 세상을 보지 않겠다는 실존적 결단이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오이디푸스 신화가 말해주는 바는 인간이란 결국 출가出家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출가, 곧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부터 탈주할 때만이 운명의 지도를 바꾸는 길찾기가 가능하다는 것.  

그러니 인간의 운명이란, 환경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이 만들어 가는' 자신의 것.

 

인간은 원초적으로 출가자이며 이주민이라는 주장이 매우 탁월하고 논리적이다. 배후에는 양자역학!과 동양의 철학사상, 무와 공 같은 개념들이 깔려있는데, 신기하게도 불교와 명리학, 동양철학사상과 지금의 최첨단 물리학인 양자역학이 여기에 모두 한 궤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다.

 

1.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아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 버린다.

결론적으로, 사주 명리학의 이치는 '육친법의 좁은 틀에 갇히지 않고 생극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별들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덫을 박하고 나오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것과 다름아니다. 이 것은 모두, 사주팔자를 능동적으로 구현하는 내면의 힘이 갖춰질때 비로소 가능하다.

 

요컨대, 좋은 팔자란 길한 것을 맞이하고 흉한 것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길과 흉에 대한 인식과 욕망의 배치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생명의 바다, 음양오행의 매트릭스에 길흉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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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철학 -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
김용석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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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철학으로 만든 책. 철학을 즐겁게 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 각 장이 독립적이라 듬성듬성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음. 단, 뭔가 철학적인 읽기의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분들께는 비추. 양서의 목록에 들어갈 가치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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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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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으며 좋은 구절이 나올때마다 책장을 접는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은 출퇴근 시간에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책을 읽으면서 생긴 것인데, 줄을 그으면 자꾸 줄이 비뚤어져서 나중에 다시 읽을때 걸리적거려 만들어진 습성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정말' 좋은 구절이 나오더라도 펜으로 책에 표시를 하지는 않는다.

연필로 체크를 해두거나 줄을 긋는다. 내가 줄을 긋는다는 것은 내 기준에서 아주 심각하게 이 글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이 책은, 삼십년동안, 그래도 책을 적게 읽지는 않으면서, 내 짧은 독서인생 중에 가장 많은 책장이 접힌 책이다.

그리고도 모자라, 연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연필로 그은 줄만 몇십개는 될 것같다.

 

서른의 봄에_ 사랑에 빠져버린 그의 지성과 섬세함이_ 놀라울 따름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컨셉으로 나뉘어 있다.

불안의 원인_그리고 해법.

사실 이 책의 원작 타이틀은 Status anxiety_지위에 대한 불안. 이 제목이 사실 내용상 더 잘 맞는다.

사람이 어떤 '지위'에 오르는가, 그 지위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는 마음가짐이 어떠한가에 따라 불안을 느낀다고 틈틈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책의 서문에 비친 지위에 대한 정의는 굉장히 중요하다. 책 전반을 아우르는 지위에 대한 불안이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위_좁은 의미에서는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신분적 신분을 가리키는 이 말은,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이라는 뜻을 '더불어' 갖고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존엄을 잃고 존중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며, 이러한 걱정은 매우 '독성'이 강해 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지위로 인한 불안을 느끼는 원인으로 제시한 것들은,

사랑 결핍/속물근성/기대/능력주의/불확실성. (모두 본능적으로 알아채기 쉬운 불안의 요인들이나 이 책은 생각만큼 '감각'적이지는 않다. 알랭 드 보통 아닌가.).

불안을 해쳐나갈 해법으로는

철학/예술/정치/기독교/보헤미아가 제시된다. (결국 해답은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1. 원인_기대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데이비드 흄 <인성론, A Treatise on Human Nature> - 58. 기대.

이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내용의 대부분은 나 역시 그렇다고 느껴왔거나 들어왔던 것들에 대해 깔끔하게 정의를 내리거나 그에 대한 인용구를 찾아 인용하고 있다는데 있다. 고전의 가치에 대해 송구스럽게도 다시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1835년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역사가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 역시, 미국인은 번영속에서 왜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 라는 화두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며 데이비드 흄의 입장에 숟가락을 얹었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적인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65.  

그러한 생각이 근원이 되어 눈에 띌만한 토크빌의 사고에는, (따라서) 귀족사회와 민주사회에서는 구성원들에게 빈곤의 개념이 다르게 적용된다는 것이 있다. 귀족사회에서 하인들은 선뜻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민주사회에서는 언론과 여론이 하인들도 사회의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고 '무자비하게 부추기기' 때문이다. 토크빌의 미국 여행 뒤에 미국인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걸고 어떤일을 했을 때 그 일을 이루지 못하면 자존심이 상하게 되며 수모를 느낀다는, 토크빌의 논리에서 한발짝 앞서나간 사고를 보인다. 자존심이란 기대수준과 부합한 방정식을 이루며, 우리의 기대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존심 = 이룬 것/ 내세운 것. - 69.

2. 원인_능력주의

 

그런데, 요구를 늘여놓는 이 사회에서는 적절한 자존심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렵다. 사회의 분위기가 성공에 호의적이라면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때문에 사람들은 생각도 못했던 행동이나 소유에 자신을 거는 방향으로 '떠밀려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극대화 된 것이 <공산당 선언> 직전 엥겔스가 발표한 <영국 노동계급의 조건 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1845)>이다. 부자들은 사회가 원하는 성공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교활하고 비열해진다. 부르주아가 자기 이익을 극단으로 추구하는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91.

 

불안을 일으키는 성공 이야기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등장하는 키워드다. 우리 사회만 돌아봐도, 서점의 베스트셀러만 봐도, 가히 충격적으로 자기계발서가 많다. 이런 현상은 18세기 중반 부터 시작되었고, 세가지 이야기 1)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2)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3)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에 의해 발단된 것이다.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의 발언은 끔찍하리만큼 진화론적이다.

 

그들이 살 만큼 완전하다면 살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그들이 사는 것이 좋은 것이다. 만일 그들이 살 만큼 완전하지 않다면 죽을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그들이 죽는 것이 최선이다. -110

 

3. 원인_불확실성

 

삶은 불확실하다. 재능은 한동안 우리 손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그간의 성공마저 물거품으로 만들곤 한다. 우리는 가끔씩만 재능을 보여줄 뿐, 평소에는 그런 재능의 소유자답지 못하게 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의 성취의 많은 부분은 외적인 힘이 준 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118  이런 불확실성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운'도 그런 경우다. (보면서 완전 빵! 터진 문장하나: 우리의 지위는 '운'이라는 말로 느슨하게 얽어 넣을 수 있는 어떤 범위의 우호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ㅋㅋㅋㅋ -119) 왜 그런 경우가 있다. 유리한 상황은 마치 '운'이 작용한 덕분일 것 같은 그런 거.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불안한 심리는 인용구에서 극대화 된다.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 (라브뤼예르) - 124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의 범위는 세계경제까지 넓어진다. 경제사적으로도 서양 경제의 역사가 성장과 후퇴를 주기적으로 반복했다는 것은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작가는 불안의 원인을 다루는 이 책에서 진짜 '똑똑하게' 성장 후퇴 그래프를 집어넣고, 경제환경의 지속적인 불안으로 사람들이 불안을 느낀다는 것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아.....진짜 보통이 아닌 보통이다)

 

마지막으로 원인 파트에서 나오는 기찬 문장 하나를 더 읊어본다면,

 

인간은 웃어줄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 -130

가족적이고 공동체적인 관계는 18세기 후반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으면서 파괴된다. 자본과 과학기술을 부리는 능력으로 무장한 부르주아 계급이 가진 중대한 관심사는 바로 '돈'. 이때부터 사람들은 대도시로 몰려들고, 돈에 민감한 자본주의시장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사실 이걸 읽을 때까지만 해도, 아 이사람 대체 논리를 어떻게 전개시키려고 이런 무모한 이야기들을 벌여놓는 걸까,라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은 속물주의, 자본의 노예, 불확실함에 치를 떠는 약한 존재들이기만 하기 때문이다. Botton 논리의 진짜는 여기서 부터 시작이다.  

 

자, 이번에는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불안한 마음을 없애는 해법을 알아볼 차례다.

 

1. 해법_철학

 

어느 사회에서나 '지위'의 유지는 모든 성인남성 (이라고 이 책에서는 이야기 하나 사실 양성평등화가 실현되어가는 지금 사회에서는 사실상 모두에게) 일차원적인 과제가 되었다. 사회가 인정하는 일정한 지위에 오르는 것은 사람의 권위나 신용에 더 큰 신뢰성을 준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지금 읽고 있는 책 지식의 통섭에 나오는 글귀가 아주 적절하게 얽힌다.

미셸 푸고(Michel Paul Foucault)의 표현을 빌리면 진리는 "권력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안"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지식의 통섭, 52)

이것이 극대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장터의 조롱'이다. 마치 중학생들에게서 잘 나타나는 '지위'석권의 문제라 하겠다. 지나가다가 훅, 하고 누가 칠때, 아, 어떤 새끼야, 하고 돌아봐줘야 '지위'가 선다는 것이다. 장터에서 조롱을 당하거나 거리에서 누가 불쾌하게 째려보았을 때 싸움을 걸지 않으면 자신을 모욕한 자의 행동이 옳다고 확인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43)

 

자, 이런 지위와 조롱에 맞서는 해결방안은 뭘까. 보통이 말한 첫번째 지위의 불안에 대한 해결방안은 바로 '철학'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로마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49)

 

사실, 위의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되고, 이것은 스스로가 자신을 파악하고 있으며 모욕을 당하는 것에 대해 적어도 스스로에게 그렇지 않다로 위안을 해줄 수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질책을 근거 없이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가치평가를 지적인 양심에 맡기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149)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따라서 철학은 주류의 가치 체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당하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149)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157) 쇼펜하우어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2. 해법_예술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163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맛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있다. -164

그러므로 에술은 '삶의 비평'이다

 

비극작가들, 희극작가들은 자신의 방법대로 사회를 '비틀어'본다. 보통은 비극작가의 예와 희극작가의 예를 들어 '비틀림'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비극작가가 낳은 인물의 특성: (비극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요소가 있다. 빅그의 주인공은 윤리적 수준에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자질과 더불어 어떤 약점, 예를 들어 지나친 자만심이나 격한 기질이나 충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물은 동기가 악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 hamartia, 즉 판단의 잘못이라고 부른 것, 또는 일시적인 맹목, 또는 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과실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평범한 독자인 우리들은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 주인공과 동일시를 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비극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따라서 극장을 나설때면 쓰러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우월한 태도로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192)

비극작가들은 저항할 수 없는 진실로 우리를 이끌면서, 우리 역시 엉뚱한 상황에 닥치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우리가 비극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7.

 

우리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덮으면서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긷오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200.

 

-희극작가들은 사회를 '비꼬아'보게 마련이다. 골방에서 킬킬대면서 읽는 김영하 소설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재밌는가?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 후에 밀려드는 쓸쓸함과 허망함. 희극작가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말 잉글랜드 상류 사회의 여자들 사이에서는 모유 먹이기가 유행했다. 그러자 전에는 아기에게 관심도 갖지 않던 여자들이 모성애에 대한 진보적 사상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시작했다. 육아실에 고개를 들이밀지도 않던 여자들이 굳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젖을 먹였으며, 심지어 점심이나 저녁 식사 때 음식이 나오는 사이사이에 먹이기도 했다. 그러자 풍자만화가들이 나서서 절제를 요구했다. 210

비정상적인 사회를 꼬집는데 희극이 사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몇가지 사례가 더 나오는데, 이건 책을 읽으면서 킬킬대시길.

 

3. 해법_정치

 

이 책의 제목은 status anxiety이다. 부에 대한 지위, 명예에 대한 지위, 그 모든 지위들에 대한 불안을 가진 사람들을 꼬집어 해답을 구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자, 마치 희극같이 해법을 늘여놓는 보통의 솜씨를 보자.

 

부는 단지 높은 지위를 제공할 뿐 아니라, 늘 변하는 광범위한 소비재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여 행복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장려되기도 한다. 그런 소비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전 세대의 제한된 삶을 연상하며 동정심과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230.

 

이런 이상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보인다 해도, 정치적 시각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듯이, 이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231.

근대의 이상 가운데 부와 미덕의 연결, 가난과 미덥지 않은 태도의 연결만큼 정밀한 조사를 측면도 없다. '공동체에서 존경받을 만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돈이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구를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231

어떤 일자리든 그것을 유지하려면 지능, 힘, 선견지명, 남들과 협동하는 능력이 요구된다.234. 이러한 강요는 사람들에게 끝끝내,

' 갖추고 사는 사람은 행동이 대단히 훌륭하고 미덕을 많이 갖추었다고 상상하게'한다. 존 러스킨은 <최후의 사람에게 Unto This Last>(1862)에서 "부자가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근면하고, 결단력 있고, 자신만만하고, 열의가 있고, 상상력이 없고, 둔감하고, 무지하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완전히 어리석고, 완전히 지혜롭고, 게으르고, 무모하고,겸손하고, 사려깊고, 둔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민하고, 아는 것이 많고,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예상할 수 없게 충동적으로 사악한 모습을 보이고, 꼴사나운 악당이고, 드러난 도둑이자 완전히 자비롭고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다"라고 정의내린다. .... 많이 봐오지 않았는가. 철학책을 옆에 낀 뒷부분의 모습을 본연으로 한 '오빠 선배'가 대기업에 들어가면 앞문장의 모습이 되는 것.

 

+ 해결책, 불안이 무엇이든.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우리는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 247

 

부란 나비에서부터 책이나 미소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풍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러스킨은 부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부에 강박감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부는 특별한 종류였다. 그는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쵣애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251.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을 주로 퍼뜨리는 사람들은 사회의 지배계급들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이런 관념들은 강압적인 듯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릴 때 우리 모두 가졌던 환상, 즉 우리가 살아가는 제도가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환상을 머리에서 씻어내야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257

 

4. 해법_기독교

 

프랑스인이니, 글의 대부분은 '천주교'일 것이다. 기독교는 그저 '기독교' 자체가 아니고, 신성한 것에 대한, 혹은 종교에 대한 가치이다. 주요하게 나오는 개념이 '죽음'인다. 죽음을 생각하면 생활에 진정성이 찾아온다는 논리를 펴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아마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는,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276.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악용을 할 수도 있지만, 잘 이용하면 성공을 위해 근본적인 일을 계속 미루며 살아가는 태도를 고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해골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278.

 

죽음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의미있는 활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기독교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생각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 진정한 사회관계, 자선에 대한 강조는 공통되는 것 같다. 또 권력, 군사적인 힘, 금전적인 야욕, 명예에 대한 관심을 비판하는 것도 공통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다 놓으면 어떤 행동들은 하찮아 보일 수 밖에 없다. 278.

 

마지막으로, 우리의 지위에 대한 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게 한다는 생각에서 정점에 이른다.

 

5. 결론.

 

보통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해법으로 제시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356.

(독서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보헤미안의 자유에 대한 표현이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꽤나 중요한 것 같다. 보헤미안은 이모든 주류적 사회습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일률적인 봉급을 받지 않고 살았다. '상징'성 같은 것이었다.

 

나는 늘, 결국 '균형'에 해답이 있다고 믿는다.

물질적인 부는 삶의 여유를 갖는데 필요하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사람들은 부에 '빈곤함'을 느낀다. 이때 사람들은 '빈곤'을 달래기위해 '희생'을 하게 된다.

정신적 부는 사람이 물질적인 면에 치중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 둘의 균형, 나는 거기에 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으며 작가에게 놀랐던 것은, 생활에서 잡아낸 논리를 끌어내는 논리력과 그것의 바탕이 되는 방대한 독서였다.

한 사람의 사유가 이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유, 반드시 있을 것이다.

보통의 사유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길. 그래서 그들이 불안한 삶을 온연히 즐기며 살 수 있게 되길,

한 사람의 독자로서 바라며,

이제 더 깊은 사유를 하기 위해 나를 내려놓을 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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