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가의 작가라면, 그리고 문화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아온 국가의 작가라면 그들은 독자에게, 그 국가라는 틀의 문화 속에서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으로 읽혀진다. (망명한 작가들이나 예술가들도 심지어 국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국가들, 이를테면 그 국가에 대해 전쟁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없는 국가라면, 혹은 엑소두스나 창세기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는 국가라면, 말이 달라진다. 동 시대를 사는 작가의 작품은 '그 나라' 전체로 읽혀지기도 한다. 편견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 왜냐면 그 안에 나오는 인물, 배경, 사건들은 작가가 사는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스라엘 작가인 케레트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많은 작가들을 떠올렸다. 루슈디도 떠올렸고, 키리니도 떠올렸다. 그의 얼굴, 나이, 성별을 모른채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밟아온 전적을 생각해보게 한다는데서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고 생동감있는 일이기도 하다.

서른 여섯편의 짧은 소설들은, 그것이 마치 단상인 것 처럼 읽히기도 하며 그러다가도 그저 수다스러운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그 성향이 더 잘 드러난다.

 

아모스 오즈나 데이비드 그로스만으로 대표되는 이전의 이스라엘 문학이 방대하고 유장한 서사로 국가와 사회의 거대 이슈를 다루는데 비해, 그는 기발한 설정의 짧은 소설에서 마치 친구 사이에 나누는 술자리 대화처럼 꾸밈없고 일상적인 문체로 현대인의 실존적 혼란을 그린다.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대면하는 순간을 유머로 버무려내는데, 그리하여 우리는 웃음이 가시기도 전에 어떤 공포, 어떤 슬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말을 들으면 그의 문학적 보편성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현대 이스라엘이 직면한 위험, 즉 막연한 분노와 고용 불안, 돌연하고 이유 없는 폭력은 국가적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존적 딜레마다."

 

빛나는 문장들을 몇개 골랐지만 사실 문장들보다는 설정의 기발함이 더 돋보이는 소설집이다. 짧은 소설의 무게가 전혀 가볍지 않다.

 

 

이 모든 기술에 좌절하게 되는 순간이다. 눈썹은 생각한다. 인터넷을 발명한 사람들은 천재였고 아마도 인간성을 진일보시켰다고 믿었을 테지만, 결국 사람들은 연구를 하거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4학년때 짝이었는 불쌍한 남자를 괴롭히는 데 이 발명품을 쓴다.

 

치과의사가 되는 것과 배관공이 되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지? 둘 다 냄새나는 구멍에서 일한다. 구멍을 내고 구멍을 메우면서 먹고 산다. 둘 다 벌이가 괜찮다. 그리고 둘 중 어느 쪽도 자기 일을 즐기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눈썹의 일이 '아주 존경받는'것이고 그 존경을 얻기 위해 오년간 나라를 떠나 루마니아에서 공부해야 햇다는 사실만 빼고는. 배관공은 아마 시간을 조금 덜 투자했어도 될 것이다.

 

아내는 버벅거린다. 자꾸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카메라를 힐끗 거린다. 하지만 별로 문제될 건 없다. 언제든 편집하면 되니까. 바로 이게 방송의 좋은 점이다.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아내를 편집하거나 지워 없앨 순 없다. 오로지 신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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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밀란 쿤데라는 '어떤 사람도 하나의 책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사회학 책을 읽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한다. 한 사람 사상의 집약, 그것을 뛰어넘어 자유로운 비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것에 대해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할 뿐이다. 우연히 이 책을 알게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퇴근길에 우연히 만난 대학원적 교수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사두고 한참을 리스트에 올려만 두었던 이 책을 시작할 즈음, 나는 논문을 하나 읽었다. 아프리카 지도자는 과연 개발에 대해 어떤 사고를 갖고 있을까, 그리고 공여국들은 순수한 목적으로만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을까'라는 질문이 담긴 한국외대 조원호 교수님의 논문이었다. 이 또한 우연히 지나가다 발견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우연히 내 앞에 발견되기 마련이다.

 

내가 알고 있던 식민역사과 개발의 역사, 내 미약한 지식으로는 얼기설기 되었던 것을 단번에 정리시켜주었다. 물론 공여를 해주는 입장이나 수혜를 받는 입장이나 각국마다의 성격과 배경과 차이점은 있다. 그렇지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놀랍게 정리시켜주는 책이었다. 원제는 'development and social change' -개발과 사회개혁 이다. 작가는 1940년부터 현재까지, 개발이 사회개혁에 의해 어떻게 변화되어왔고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논술한다.

 

요점만 말하면 이렇다: 개발 프로젝트는 강대국 경제이익을 위해 식민의 역사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구촌 프로젝트로 변형되어 발전하여 지금에 이른다. 매우 격렬한 주장이지만 담담한 논조로 작가는 세대가 지나쳐온 역사를 읊기 시작한다.

 

개발의 역사와 정치:

 

개발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우선 개발의 이론과 친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발의 이론에 밑받침이 된 가치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 책이 시작된다.

 

Michael Cowan과 Robert Shenton이 개발을 두가지로 구분한 것을 생각해보라. 즉각적이거나 보편화된 사회적 과정으로서 개발, 그리고 정치적 개입으로서 개발.첫째, 19세기만 해도 개발은 인류의 향상이라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해석되었다. 둘째,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당시 등장하던 국민국가를 사회적으로 설계하고 운용하기 위해 개발을 실용적으로 해석하였다. 32. 

사람들은 '겉보기에 숭고한 과업처럼 보이도록' 개발에 영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White man's burden. 백인이 져야 할 짐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개발은 마치 선진국이 개도국을 도의적인 목적에 의해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꾸며졌다. 게다가, '식민지배 시기의 인종적 경멸이 떠난 자리를 식민지배 이후의 경제적 멸시가 차지했다'. 개도국이 문명적으로 뒤떨어진다는 주장이 크게 작용했다. '신생 독립국들이 추구한 개발 프로그램, 즉 독립속의 ‘의존’(dependence in independence)은 식민지배 이후 시대의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개도국은 이 멸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선진국은 이런 개도국을 이용해 경제적 이익(수출과 투자의 이득)과 정치적 이익(지배욕)을 채우고 싶었다. '개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공동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 철학'이 교묘히 이용되었다. 개발이 국가의 공식적인 프로젝트로 자리잡은 것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많은 국가들이 '어쩔 수 없이' 개발시켜주겠다는 선진국의 손을 잡았다. 그들의 속삭임은 훌륭했다. 우리는 너희들을 지원해줄께, 너희는 그냥 우리가 하는대로 따라와. 형님이 해주겠다는데, 개도국들은 발전된 그들의 문명을 욕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발은 일종의 권력관계를 형성하며 발전했다. '산업화가 영국과 이집트 내부에서 각각 새로운 계급 불평등을 창출하였다면, 식민주의는 인종적으로 계층화된 국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냈다'.   

    

인도의 민족주의는 인도국민회의라는 정당과 그 정당의 진보적 민주사회주의자였던 자와할랄 네루를 중심으로 해서 권력 장악의 길로 나아갔다. “현대 세계에서, 한 나라가 고도의 산업화를 이미 달성했고 자체적으로 자원을 완전히 동원할 수 있지 않는 한, 그 어떤 나라도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는 없다.”  

'길버트 리스트(Gilbert Rist)는 식민지배 시대 이후의 신생 국가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들은 자기 규정권(right to self-definition)을 포기하는 대신 자기 결정권(right to self-determination)을 얻었다. 이 말은 신생 독립국들이 서구 중심적인 개발이 표준이 된 미래 세계를 선택함으로써 개발의 비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이런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령, 

  

간디는 자기 이익을 강조하다보면 공동체에 기반을 둔 윤리가 침해된다고 보았고, 사회적 권력의 분산을 지지하고 풀뿌리 자립 의식을 호소했다.

 

  용어정리 하나만 하고 지나가자.  

 

전 세계 국가들을 나누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고 다방면에 걸친 과제이며, 분류의 목적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1952년에 프랑스의 인구학자 알프레드 소비(Alfred S며표)dml 기본적 분류는 세계를 삼등분하는 방식이었다. 제1세계(The first world)는 서구와 일본을 합한 자본주의권이었고, 제2세계(The second world)는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이었으며, 그 외의 모든 지역은 제3세계(The third world)로 여겼는데 주로 서구의 구식민지들로 이루어진 블록이었다. 제 3세계 내에서도 핵심부는 제1세계와 제2세계 사이에서 독자 노선을 도모하려는 비동맹 국가들이 차지했는데 특히 중국, 이집트, 가나,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유고슬라비아 같은 나라들이었다. 1980년대에는 주변화된 극빈국들을 따로 호칭하기 위해 제4세계(The Fourth world)라는 말까지 생겼다.

 

    

개발 프로젝트의 기원 

  

3세계의 지도자들은 개발프로젝트를 반대하지 않는다. 엘리트의 담합이라는 용어가 있다. 정치 경제적 엘리트들이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국가의 국민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소련이라고 그러지 않을까? 자본주의에 농락당하는 것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주의 체제 속에 있는 국민들만이 아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Iosif Stalin)은 1930년대에 이미 이런 교의를 설파한적이 있다. “우리는 선진국에 비해 50년 아니 100년쯤 뒤떨어져 있다. 10년내로 이 간격을 없애야 한다. 우리가 이 과업을 완수하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스탈린의 결의는 적대적인 세계에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압력에서 나온 것이다. 소련은 값싼 먹을거리를 통해 도시 산업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농촌을 ‘쥐어짜서’ 한 세대안에 산업화를 달성했다. 냉전의 양진영을 가리지 않고 산업화는 성공의 상징이 되었다. 동서 양진영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산업 발전을 열심히 추구했다. 발전은 그저 목표가 아니라 일종의 통치방식이었던 것이다. 108  

개발 프로젝트의 국제적 틀

 

미국이 경제적 목적(수출)과 정치적목적(우방국가 탈환)을 염두하고 슈퍼국가로서 몸집을 불려나가는 사이, 세계는 미국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원조를 받고, 미국의 사고가 주입되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지켜봤고, 세상은 점차 시장경제 친화적인, 자유주의로 변화해가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기업은 최대의 수혜자였다. 그들은 개도국 정치 엘리트들과 담합했고, 개도국 사람들은 미국의 기업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화는 가속화되었다. 세계의 정치자들은 함께 모여 공동체적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들은 함께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 퇴보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미국 정부는 1945년부터 자국의 잉여 농산물을 처분하기 위해 공법 480호 프로그램(PL-480, Public Law 480 Program)을 시행했다. 이 공법 프로그램은 세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째, 농산물을 현지 통화로 저렴한 가격에 상업용으로 제공한다. 둘째, 기근 구호용 농산물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셋째, 현지의 전략적 원자재와 미국산 농산물을 물물교환한다. ..잉여 농산물 관리는 식품 가격 안정을 이루었고, 이것은 다시 개발 프로젝트의 두 상호보완적 핵심요소인 미국의 농업 경제와 제 3세계 정부의 산업화 육성계획을 안정시켰다. 137 

 

제 3세계 정치 엘리트들은 민족주의적 주제를 표현한 거대한 공공개발 프로젝트를 벌여 자기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군대를 강화하고, 대출에서 발생한 수익성 높은 사업 계약을 후견 네트워크에 제공하려고 애썼다. 예를 들어 브라질에서는 1964년부터 1985년 사이에 집권한 군부 통치자들이 연이어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국가주의 모델에 따른 개발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196, 개발의 전 세계적 확산  

 

지구화 프로젝트의 정치학

 

작가는 ‘지구화 프로젝트가 개발 프로젝트를 승계했다. 205.’고 말한다. 지구화의 물질적 혜택이 결국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2만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는 지구화(globalization)가 아니라 ‘프로젝트’라는 말을 붙인 ‘지구화 프로젝트’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개발프로젝트가 지구화 프로젝트로 변형되었다는 말은 어찌보면 억지 같은데, 한편으로는 앞서 작가가 주장했던 대로 개발 프로젝트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정치경제적 관점의 지구촌화가 일어났다면 가능한 스토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논리가 치밀하다. 그리고 결국 ‘전 지구적 경제가 개발의 단위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함에 따라 작가가 말하는 지구화 프로젝트와 개발의 연계라는 주장은 힘을 얻는다. 

 

조금 과격한 면이 없지않지만, 작가는 새로운 전 지구적 조절 시스템이 국민국가를 대체한 시장국가(market states)로 대체되었다(5장. 지구화 프로젝트의 정치학)고 보고, 표준화된 자유화 정책이 세계의 모든 지역과 장소를 시장의 메커니즘에 의해 재조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로인해 취약한 산업 인프라를 갖고 있는 개도국은 초국가 기업들의 유연한 침략 전략으로 불안정해지기에 이르고, 사회적 보호는 커녕 생존의 위기에 맞닥들였다는 것이다.

 

지구화 프로젝트의 위기

 

그렇다면 대안으로 활용되는 지속가능성은 어떠한가. 세계은행을 비롯한 굵직한 국제기구와 거대국가들이 이야기하는 지속가능성, 그것이 개발의 대안인가에 대한 질문도 이 책은 품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 sustainable development 는 1987년에 <인류 공통의 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브룬틀란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 개념을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하면서도 미래 세대의 욕구 충족 능력을 해치치 않는”발전이라고 규정했다.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이 보고서는 환경 악화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해석을 놓고 벌어진 논쟁-인류 공통의 미래가 위협받는 상황이 빈곤에서 비롯되는지 또는 풍요에서 비롯되는지-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327 

대안은 없는가  

 

1. 대안으로서의 개별성  

 

내 석사 논문은 획일성을 배격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통과를 하긴 했지만, 수없이 다양화의 구체적 방안에 대한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가능한 논리인가. 한국사회만 봐도 수없이 획일화되어가는 것들이 너무나 산적해있는데, 권력으로서의 획일성을 과연 벗어날 수 있는가. 답은 의외의 장소에서 나왔다. 브랜드를 달지 않은 카페들. 권력이 시작했던 역사라도 각자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인정해주면 획일성은 사라진다. 획일화가 사라진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지배욕'을 사라지게 만들어버린다와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 작가가 대안으로 삼은 것도 권력으로서의 획일화를 제지하려는 다양성과개별성에 대한 움직임들이다.

 

세계주의 운동은 전 지구적 개발 프로젝트에서 다루는 획일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대안적 문화전통- 문화 존중과 전 지구적 생존의 문제로서-을 보존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세계주의 운동은 폭넓은 맥락에서 인권과 민주 권리를 보존하거나 강조하려는 다양한 움직임을 포괄한다. 또한 이 운동은 세계주의 운동의 병행 개념인 세계주의적 민주주의 cosmopolitan democracy를 제창한다. 355

  2. 가치의 전향 

 

사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말이다. 개별적인 존재로서 가치를 전향시키라. 세계화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물질적 욕구에서도 자유로우며 지배욕구에 의해 자기 삶을 농락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 말고 개별적인 다양성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런 비슷한 관점이 보이는 곳도 있다.

 

무토지 농업노동자운동은 저소득 계층 소비자를 위한 주식용 곡물 생산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으므로, 2003년 룰라정부는 전국적 기아퇴치 Zero Hunger 캠페인의 하나로서 정착촌에서 재배한 곡물을 직접 구매하기로 했다.

'이러한 집단적 사업들을 보면 왜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이 국제적 공정 무역 운동의 선두주자인지 알 수 있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은 기업의 지구화에 대항하여 진정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수익창출보다 공동체의 가치와 환경보호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 협동조합은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거래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367.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실 말 안해도 잘 알고 있다. '자본'에 함락당한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어리석지만, 그만큼이나 사람들을 혹하기도 쉽다. 사람들은, 그러니까 대중의 한사람으로서, 어리석게도 자본이라는 것에 의존할만큼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가장 어리석은 것은 자기가 어리석은지 모르는 것이다.

 

 

3. 지속이 정말로 가능한 프로젝트: 공정무역이라는 말을 잊은 공정무역, 생태계보존이라는 단어를 잊은 생태학적 농법.

 

스타벅스 한켠에 공정무역 커피를 판지 벌써 여러해가 지났다. 스타벅스는 공정무역 커피를 활용한다고 써붙였다. 조금 비싸다. 사람들은 호의를 갖고 사기시작했다. 엄브렐라 NGO인 국제공정무역상표기구 FLO, Fairtrade Labeling Organizations International 이 생겼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들은 '기존의 국제 무역 관행이 생산자에게 끼치던 부정적 영향을 소비자에게 알리고, 소비자의 구매력을 이용해 생산자가 긍정적인 방식으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공정무역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투명한 거래 조건, 노동 조건을 인식시킨 상태에서의 소비욕구자극. 이것은 공정무역을 대안적인 소비법으로 제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단, 이 책에서 강조하는 NGO에 대한 굉장한 긍정적 시각은 보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NGO는 하나의 대안이지, 그것이 중심이 될 수는 없다. 국민국가가 존재하고, 여전히 국제기구는 광역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NGO가 하나의 그룹으로 커나가지 않고 지역적 색을 살리면서 연대하는 것은 충분히 의의가 있다.

 

이 책에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지속가능 프로젝트는 국제기구가 포함된 거대담론으로서의 프로젝트가 아니다. 농업 생태학을 위해 소개하고 있는 <개발을 위한 농업 과학과 기술의 국제적 평가 IAASTD, International Assessment of Agricultural Science and Technology for Development> 는 400명 이상의 개별 사회과학자, 자연과학자, 개발 전문가 등이 집필에 참여하고, 식품레짐이 소농들에게 끼칠 불리한 영향을 열거하고, 가난한 소비자와 소농들의 욕구와 세계무역기구의 개방화 정책사이에서 존재하는 갈등을 조정할 수 있도록 국가 정책을 운용하라고 주장한다. 457. 또한 농업의 다기능성을 보장하고 환경을 거스르는 기업/사회적 관점에서의 농업을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 자연과학자, 사회과학자, 보건과학자들과 현지농민, 정부, 시민단체가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해답이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대의 대안이라고 나도 동감한다. 사회학적 고려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로서 본능이 작용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세계화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 개별로서의 자각이 미래를 열어가는 시발점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친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한사람의 힘은 크다. 그것을 잊은 대중으로서는 우매한 이도, 자신의 가치를 자각하면, 세상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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