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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평점 :
벨기에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첫문장 못쓰는 남자’는 모두 열여섯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입니다. 매우 짧은 분량이지만 단편 하나하나가 뛰어난 재치와 입담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재치와 입담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리뷰에 쓰고 싶은 주제는 작가 나름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재치’와 ‘위트’를 무기삼아 아주 재미있게 비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빠, 나중에 기억을 하려고 책을 좀 함부로 다룹니다. 마음에 드는 단편이 시작하는 장은 과감하게 책장을 접어두기도 하고, 무언가 표시를 해두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집을 읽고 나니, 제가 접어둔 책장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상상력을 사고의 영역으로 확장시킬 줄 아는 작가. 시대에 대한 냉소섞인 문장하나 쓰지 않고 상상력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만으로 충분히 세태를 꼬집는 작가. 반해버렸습니다.
‘첫문장 못쓰는 남자’와 ‘침입자’를 읽을때까지만 해도 저는 ‘음, 상상력이 매우 뛰어난 작가로군’하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첫문장 못쓰는 남자의 피에르 굴드가 첫문장을 못쓰고 마지막 문장을 못 쓰는 이유. 이 두 가지만을 가지고 매우 재미있게 한편의 단편을 만들었구나.라고 말이죠. 출근길 버스에서 이 단편을 덮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한줌 재로 남는 인간이라. 이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을 표현하는데, 사실 (...) 이거하나면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첫문장을 지우면 두 번째 문장이 첫문장이 된다.’라니. 처음은 매우 중요한가요? 발을 딛는 시작점이라서요? 글쎄요. 첫경험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첫경험이 아닌 경우가 많지 않은가요? 그러니 ‘언제 처음 해봤어?’는 별로 중요한게 아닌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다’. 그 자체에 있으니까요. ‘처음’에서 ‘벗어나게’되는 상태가 바로 자유의 시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기발한 착상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피에르 굴드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침입자’도 마찬가지였죠. 누군가 내 정원에 매일같이 침입해서 내 잔디를 깎아준다. 기발하군, 이정도. ‘그가 지나칠 정도로 착하게 굴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의 보이지 않는 존재에 길들여졌을까?(31쪽)’를 보면서 다시 책을 덮고 사람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는 갖게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조금 가혹하지 않은가, 이 정도.
그런데 제 생각은 이 소설집의 중반을 향해 달리며 차츰 달라졌습니다. ‘거짓말 주식회사’, ‘박물관에서’, ‘블럭’, ‘높은곳’,‘내 집 담벼락속에’. 이 소설들도 역시 앞에서 느꼈던 것처럼 기발한 착상에서 시작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 여운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생각이 깊은 사상가들, 지식인들이 공중부양을 한다는 (역시나) 희귀한 설정을 가진 ‘높은 곳’을 읽는데 이 문장:
진정한 천재로 인정받아온 몇몇 사상가들은 아무리 위로 치솟고 싶어도 지면이 발이 들러붙어 옴짝달싹 못하는 반면, 이름도 생소한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하늘 높이 떠오르곤 했다. 96.
이 문장을 읽는데 저절로 입에서 감탄이 나왔습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거로구나!
인간의 이성에 대해 비웃는 듯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떠올랐습니다. 동굴 속에 있는 (고만고만한) 인간들은 그 안에서 그림자를 보며 살고 있을 뿐이로군. 그걸 비웃고 있는거야. 라는. 그러고나자 ‘사회적인 명망이 있고 더 깊은 사고를 갖고 있는 사상가가 더 높은 곳으로 공중부양 하더라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 그 믿음에 부응하고자 인기를 얻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갔다고 사람들이 믿게 하고 싶어하는 지식인들’을 거기에 왜 집어넣었는지가 뚜렷해졌습니다.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 사고의 깊이까지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당연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망각하니까요. 마치 잘 포장된 사람들에게 질투와 경외를 느끼는 대중은 얼마나 무지한가. 작가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특이한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설정은 이 단편소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물관에서’에서는 우는 조각상들을 설정해놓고 이들이 우는 이유를 스스로 이야기하게 만들더니, ‘사람들이 봐주지 않아 소외받았기 때문’ 이라고 이야기 하는 여자 조각상들을 통해 소통이 불가능한 자기 상에 갇힌 사람들을 교묘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내 집 담벼락 속에’에서는 스스로 벽안에 들어가 나이를 먹지 않은 남자를 설정해 ‘사생활이 소멸위기에 처해있는’ 이 시대를 고발합니다. 스스로 담벼락속에 들어간 남자는 파리 5구,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팡테옹 광장의 담벼락속에 다시 들어가 버립니다. ‘은밀함’이 사라졌다고 하면서 말이죠. sns와 인터넷이 엄청나게 발달한 현대시대, 사실 개인의 사생활은 스스로에 의해서건 타인에 의해서건 우연이건 필연이건 심심치 않게 노출됩니다. 개인의 은밀함을 지키고 싶었던 20세기에서 온 남자가 벽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는 설정을 통해 작가는 사생활이 없어져가는 21세기, 복잡하고 시끄럽고 온갖 네트워크가 범람한 세상을 통쾌하게 보여줍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더 이상 숨길게 없는 세상에서는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가 없고, 따라서 이제 벽으로 드나드는 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다. 145
‘크누센주의, 그것은 사기 협잡’에서는 여론이 어떻게 한 사람의 명예를 급속히 실추시킬 수 있는 것인지 보여줍니다. 인터넷을 할 수 없어서 크누센주의를 찾아볼 수는 없는데 (리뷰를 올릴때 크누센주의를 찾아보았더라도 이대로 올릴 겁니다) 심지어 크누센주의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소설 뒤에 사실인 듯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게 사실이 아니면 억울할 정도입니다. 무지의 상태인 독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말입니다. 크누센을 제외하고도, 이렇게 오해로 인해 대중의 매도를 받은 숨어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무지한 대중의 하나로 창피함을 느낍니다.
예컨대 이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에 기인한 착상들을 본격문학을 통해 구상화시킴으로서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록이나 담벼락은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공간이지만 상상력 이상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모든 상상력은 인간의 면면에 대한 반성과 인간에 대한 애착으로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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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굴드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네요. 대부분의 소설에 피에르 굴드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는 학예연구원이기도 하고, 거짓말 주식회사의 뛰어난 직원이기도 하고, 굴렁쇠 출판사의 직원이기도 하며, 제대로된 작품 하나를 쓰고 죽기를 갈망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굴드가 다시 등장하면 독자는 이제 반갑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굴드는 곧 베르나르 키리니의 분신이라는 것이 작품을 읽을 수록 확연히 드러납니다. 굴드를 통해 작가는 늘 작품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