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번 애프터 리딩'-코언형제의 자유로운 행보


기사입력 2009-03-24 09:51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번 애프터 리딩’(Burn after reading-3월26일 개봉)은 역설로만 말할 수 있는 희한한 영화다. 이건 스파이가 없는 스파이 스릴러이고, 섹시하지 않은 섹스 코미디이다. 스토리는 텅 비어 있는데, 플롯은 꽉 차 있다. 원심력만 갖춘 사건은 실체도 없이 마구 커져만 간다. 강박증과 편집증과 과대망상이 뒤얽힌 요란한 헛소동. 여기서 내내 돋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걸로 내내 흥미진진하게 떠들 수 있는 코언 형제의 달변이다.

헬스 클럽에서 일하는 채드(브래드 피트)는 우연히 비밀 정보원의 일급 기밀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CD를 발견한다. 동료인 린다(프랜시스 맥도먼드)와 함께 CD의 주인인 오스본(존 말코비치)과 접촉해 돈을 요구하지만 상황은 점점 꼬여만 간다. 한편, CIA 요원인 남편 오스본이 못마땅했던 아내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남편이 퇴직하자 그간 몰래 만나온 애인 해리(조지 클루니)를 염두에 두고 이혼 소송을 준비한다.

‘번 애프터 리딩’의 작품 성격과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것은 코언 형제가 세상의 평가로부터 (여전히) 자유로운 행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면에서 깊고 탁월한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허다한 상의 트로피들을 받으며 예술적 명성의 정점에 섰던 그들이지만, 바로 그 다음 작품으로 그저 한바탕의 농담 같은 해프닝 코미디를 내놓을 수 있을 정도의 배짱과 자신감을 가졌다. (그러니까,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조엘 코언이 “어렸을 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만들었는데, 지금 우리가 만든 영화가 그때보다 큰 발전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던 소감은 겸양의 표현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후에 나온 ‘번 애프터 리딩’은 코언 형제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었던 ‘바톤 핑크’ 다음 작품으로 발표한 경쾌한 코미디 ‘허드서커 대리인’의 자리에 상응하는 영화다. 코미디와 누아르 혹은 스릴러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오갈 수 있는 그들에게 존경의 시선 따위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허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들은 ‘번 애프터 리딩’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은 시기에 썼다. 전혀 색깔이 다른 두 편의 시나리오를 하루하루씩 교대로 오가면서 함께 적어내려 갔다고 하니, 정말 기이한 창작력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복잡하게 뻗어나간다. 상황을 제대로 컨트롤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헛똑똑이들이 좌충우돌하면서 엉망으로 꼬이고, 극중 모든 부부와 연인들이 서로를 속고 속이면서 인물들의 관계마저 마구 뒤틀린다. 그러나 해고된 비밀 요원의 회고록과 변심한 배우자의 이혼소송과 외로운 사람의 인터넷 즉석만남과 콤플렉스를 가진 자의 성형수술이 뒤엉킨 요지경 속 구체적인 전개 양상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이건 위트와 아이러니와 트위스트 만으로 뽑아낸 플롯이니까.

할리우드 고전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번 애프터 리딩’을 보면서 1930~1940년대의 프랭크 카프라나 프레스턴 스터지스, 또는 하워드 혹스의 스크루볼 코미디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확실히 코언 형제의 코미디들에는 언제나 클래식한 기운이 있다.

까마득한 상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이 영화가 시작하고 끝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극중 등장하는 그 모든 간절한 소망과 배우자까지 등지는 사랑과 목숨을 건 승부수와 생사를 가르는 총격까지도, 멀리서 바라보면 그저 웃음거리가 된다. ‘번 애프터 리딩’은 코미디가 결국 거리감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려준다.

다섯 명의 주연 배우들은 코언식 코미디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틸다 스윈튼을 제외하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해당 배우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사람은 브래드 피트와 프랜시스 맥도먼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내내 촐랑대고 호들갑을 떠는 채드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는 허름한 운동복 차림으로 막춤을 출 때조차 온 몸으로 매력을 발산하며 스타의 광휘를 뿜어낸다. 그리고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원래 뛰어난 배우지만, 역시 남편인 조엘 코언의 영화에 나올 때 가장 훌륭한 연기를 한다.

읽고 난 뒤에 태워버릴 것. 그러고 보면 마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새로운 속편 부제처럼 보이는 제목 ‘번 애프터 리딩’은 사실 코언 형제가 이 영화를 보게 될 관객들에게 하는 주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깡그리 잊어버려도 무방한, 채 100분이 되지 않는 킬링타임 오락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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