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10대 중반의 소년 마이클(데이빗 크로스, 나이 든 후의 마이클은 랠프 파인즈가 연기)은 비가 쏟아지는 귀가 길에 열병으로 심하게 토한다. 30대 중반의 여인 한나(케이트 윈슬렛)가 자신을 도와주자 며칠 후 마이클은 감사를 표하러 그녀의 집으로 찾아간다.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충동적으로 서로를 탐하게 되고 이후 연인 사이가 된다. 관계를 갖기 전에 늘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던 한나는 둘의 사랑이 깊어가던 어느 날, 아무런 말없이 사라진다. 세월이 흘러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우연히 참관하게 된 재판정에서 피고인 신분으로 전락한 한나를 목격하게 된다.
처음에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에서 지배적인 것은 은밀한 분위기다. 감독 스티븐 달드리는 성숙한 여인과 덜 자란 소년의 관계에서 성적인 행위 자체보다 그 직전의 성적인 긴장감 묘사에 집중하면서, 금기를 넘어선 사랑의 아슬아슬한 기운을 살려냈다. 이 영화는 관능의 영토에서 청각이 얼마나 유혹적인지를 드러낸다. 아울러 ‘더 리더’는 욕조의 에로스를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는 이후 몇 년 단위로 여러 차례 건너 뛰면서 두 남녀 사이의 질긴 인연(혹은 악연)을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에 사랑했고 열렬히 욕망했던 여인의 초라하고도 위태로운 모습을 세월이 흐른 뒤에 몇 차례 목격하게 되면서도 적극적으로 돕지 못하는 남자의 죄책감과 부담감이 어지럽게 뒤섞이면서 드라마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그러나, 이건 멜로 영화가 아니다. 중반 이후로 접어들면서 ‘더 리더’에서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민이고, 연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훈이다. 한나에 대한 마이클의 태도는 전 세대가 저지른 엄청난 악행에 대한 현 세대 독일인들의 복잡 미묘한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20세기 최악의 학살 사건을 가해자의 자리에서 되짚어 반성해보려는 경우며, 피와 눈물로 반복해서 설명되어온 홀로코스트에 대해 다르게 말해보려는 시도다. 성실하게 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인식하며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에서 연민의 대상일지언정 면책의 이유가 될 순 없는 무지의 폐해에 대한 경계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와 관련한 모티브들에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첫 인상과 달리, ‘더 리더’는 격정으로 시작해서 이성으로 마무리하는 지적인 작품이다.
스티븐 달드리는 절제된 스케치로 진진한 심리 묘사를 할 수 있는 감독이다. ‘디 아워스’나 ‘빌리 엘리어트’처럼 탁월한 전작들에 비하면 좀 처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더 리더’ 역시 긴 여운을 남긴다. ‘밀회’와 ‘위대한 유산’을 만들었던 데이빗 린 이후 뛰어난 영국 드라마들이 지닌 특유의 기품은 이제 스티븐 달드리와 샘 멘데스(‘레볼루셔너리 로드’ ‘아메리칸 뷰티’)의 영화들에 이르러 가장 잘 계승되고 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역시나 훌륭하다. 마이클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서사 구조 속에서 ‘관찰되는 객체’일 수 밖에 없는 캐릭터를 맡았지만, 특유의 생동감으로 뜨거운 피를 흘려넣어 결국 한나를 ‘감정상의 주체’로 살려냈다. 그래도 꼭 하나만 고르라면, 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트로피는 ‘더 리더’의 케이트 윈슬렛이 아니라,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케이트 윈슬렛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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