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키노키 ㅣ올해를 마감하는 수작, <과속 스캔들>)

상반기에 <추격자>가 있었다. 하반기엔 <미쓰 홍당무>가 있었다.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꽤나 빼어난 수작이 나왔다. <과속 스캔들> 이야기다.


<과속 스캔들>은 의외의 영화다. 소리 소문 없이, 어떤 기대도 없이 나왔는데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그렇다. 그러나 단순히 의외의 영화로 치고 넘어가기는 여러모로 아깝고 공정치 못하다는 기분이다. 처음에는 환상이라 생각했다. 단지 기대치의 전복과 의외성의 문제인지 적확한 판단의 문제인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그러나 확실히 <과속 스캔들>은 제목만 빼고 다 좋은, 수작이다. 상업적인 성취도나 캐릭터를 만들고 키워나가는 치밀함, 장르나 관성의 도움 없이 영화 그 자체만으로 끝까지 지켜보게 만드는 찰기 모두가 안정적이고 명민하며 빼어나다. 이런 탄탄한 기본기가 대한민국 개봉영화의 평균치라면 <과속 스캔들>에 대한 평가도 한 숟갈 덜어낼 수 있으련만. 불행히도 우리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속도위반 소재란 구태의연한 것이다. <제니, 주노>가 있었고 유사 장르로 <어린 신부>도 있었다. 거기에 톱스타 스캔들 이야기를 얹어봤자 꼴뚜기나 오징어나 그게 그거다. 낙지가 될 순 없다. 만약 속도위반 스캔들 소재가 대단히 참신한 아이디어라 생각해 그것의 파격에만 온전히 몸을 실었다면, 보나마나 너덜너덜 처참한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기획하고 구성하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여기서 속도위반 스캔들 소재는 갈등의 다소 유력한 줄기일 뿐이다. 심지어 이 영화는 스타 스캔들 소재 따위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관심도 없다며 그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깐죽거리는 발랄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제목이 대체 왜 이러냐고.

영화는 왕년의 아이돌 스타였던 라디오 DJ 남현수(차태현)의 하루를 비추며 시작된다. 벌어놓은 돈도 살만큼 있고, 매번 흥미로운 사연을 보내오는 황정남(박보영) 덕에 청취율도 나날이 상승 중이라 이래저래 괜찮은 인생. 그런데 어느 날 문제의 황정남이 불쑥 찾아와 당신이 왕년에 옆집 누나랑 이러쿵저러쿵해서 낳은 아이가 바로 나니까 니가 내 애비요, 주장하며 집에 눌러앉는 일이 벌어진다. 심지어 정남도 홀몸이 아니라 아들 황기동(왕석현)을 동반한 비혼모. 쫓아내보려는데 쉽지 않다. 언론에 확 터뜨려버리겠단다. 정남과 기동의 등장에 현수의 고상한 생활패턴은 쪽박을 찬다.

정남은 “미혼모도 하고 싶은 거 많다“며 현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노래 대결 코너에 출연한다. 물론 가명으로. 그런데 노래를 의외로 잘 하네? 워낙에 탁월한 노래 솜씨로 작은 유명세를 탄 정남은, 덕분에 첫사랑 박상윤(임지규)과 재회한다. 기동은 유치원에서 맘에 쏙 드는 여자아이를 만나고, 유치원에 따라갔던 현수도 맘에 쏙 드는 선생님(황우슬혜)을 만나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그렇게, 현수는 끔찍하기만 했던 불청객들과의 관계에서 가족애를 발견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상윤이 현수와 정남을 연인관계로 오해하게 되면서, 상황은 갑작스런 파국을 맞는다.

<과속 스캔들>의 미덕 가운데 상당수가 캐릭터에서 발휘된다는 점은 근래 <미쓰 홍당무>의 성과와 더불어 눈여겨볼만 하다. 톡톡 튄다고 무조건 좋은 캐릭터가 되는 건 아니다. 차태현이 연기하는 남현수가 그렇다. 남현수는 단선적이고 전형적인 인물이다. 인물의 온기가 입체적으로 다가오기보다 그런 상황에 빠졌을 때 보여줌직한 당혹감과 괜한 분노, 대중이 합의할만한 웃음을 만들어내는데 그치는 캐릭터다. 이를테면 피동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후반에 남현수가 적극적으로 부성을 받아들이는 대목은 (영화를 통틀어 무척 도드라지게)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튀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남현수가 타고 넘는 무게중심이란 전략적으로 탁월한 것이다. 한 때 뜨거운 스타였으나 이제는 한물 간 듯 보이는 남현수의 인물배경도 그것을 연기하는 차태현을 뚜렷이 환기시키면서 영화의 생동감에 도움을 준다.




황정남과 황기동은 이 영화의 보물이다. 이 엉뚱한 캐릭터들은 크게 위악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이야기의 주된 줄기를 이루어 나가는데 손색이 없다. 이야기 안에서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특히 황기동을 연기하는 왕석현은 눈여겨볼만 하다. 어린 애가 뭐 저렇게 징그럽게 연기를 잘하냐는 식의 톤이 아니라서 더 좋다. 꽤나 아이다운 발성과 호흡인데 그 자체로 꾸밈없이 마음에 와 닿아 명징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영화에서 가장 큰 웃음은 도맡아 터뜨려내는데, 박자감이나 만화적인 행동은 연기지도의 산물이라도 그 뉘앙스와 표정만큼은 동물적인 재능이라 생각된다.

황우슬혜의 등장은 신선했다. 정보 없이 보다가 불쑥 등장하는 그 얼굴에 조금 놀랐다. <미쓰 홍당무>의 이유리 선생 역할로 상당히 진한 인상을 남겨놓은 터다. 이건 여담이지만 황우슬혜라는 이름의 이 신인배우는 꽤 오래두고 지켜보게 될 공산이 커 보인다. 습자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는 배우라는 아무개 감독의 찬사를 제쳐두더라도, 외모 이상의 아우라가 스크린 너머로 분명히 감지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수사상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확실히 지난 두 편의 영화를 통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성공적인 캐릭터 연기를 해냈다. 아직까지는 그 뿐이다. 그 이상의 평가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를 통해 조금 더 선명하게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밖에 특별출연으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 역할은 그 보다 큰 성지루나, <은하해방전선>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임지규가 눈에 띤다. 작지만 알찬 역할을 잘 소화해내고 있는데, 극의 찰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물의 맥락이 상당수 날아가 버린 듯 보인다. 아쉬운 일이다.

<과속 스캔들>은 준비가 안 되어 있던 남자가 아버지 역할을 떠맡게 되면서 소동을 벌이고 결국에 가족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이를테면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 식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가 그런 식의 줄기를 화끈하게 비틀거나 파괴하고 재구성하는 박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크게 단순화해 보자면 착실하게 수순을 밟아가는 쪽에 가깝다. 이야기 안에서 인물들은 갈등하고 화해하고 다시 갈등하고 크게 화해한다. 신예 강형철 감독은 그 자체로 저돌적인 데뷔작을 선보일 마음은 없는 듯 보인다. 그보다 <과속 스캔들>은 억지 화해와 거짓 연대의 불편한 거품을 걷어내더라도 이런 종류의 영화가 충분히 훌륭해질 수 있다는 사례로 거론될만한 결과물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가족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가족관계가 소유감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 관계가 성숙되는 경우란, 최소한 현실에서만큼은 대단히 드문 것이다. 인정받을만한 하나의 주체로서, 상대를 객관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너무 많고, 그만큼 피아를 구별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찾아 챙기기 어렵다. 엄마는 엄마고 아빠는 아빠고 동생은 그냥 동생일 뿐이지,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못할 짓을 말을 자꾸 하게 된다. 그렇게, 있으나마나한 가족이 자꾸만 늘어간다.

그런데 유사 가족을 형성하는 드라마 텍스트에선 경우가 사뭇 달라지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 모였다. 관계를 구별하고 객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서로에게 개별적이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관계를 성숙시킬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넓어진다. <과속 스캔들> 안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혈연으로 맺어진, 이 유사가족 아닌 유사가족 또한 누군가의 필요로 의해 만들어졌으되, 결국에는 모두의 필요로 뭉쳐지는 것이다. 이 가족이 필름이 다 돌아간 이후로도 잘 먹고 잘 살았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티격태격 많이도 싸우고 울고 또 웃겠지. 하지만 최소한, 박살나 허물어질 관계는 아니라는 심정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욕망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글_ 허지웅 일러스트_ 장재훈 (<프리미어> '허지웅의 키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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