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 진정으로 시작되는 영화들이 있다. 강이관 감독의 ‘사과’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실제로 사귀고 있는 50쌍을 인터뷰한 뒤 이를 참고해 만들었다는 이 작품은 독특하고 화려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며 환상을 충족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로마의 휴일’처럼 공주가 기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노팅 힐’처럼 작은 책방 주인이 할리우드 톱스타와 결혼하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한 여자가 평범한 한 남자와 헤어진 뒤 또 다른 평범한 남자와 만나면서 생기는 파장들을 세심하게 관찰할 뿐이다.






멜로 영화의 최대 관심사는 ‘누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이지만, 거기에도 그다지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이건 두 개의 사랑이 교차하면서 그려지는 궤적 자체가 핵심인 영화다. 실선 그래프로 ‘그들의 사랑’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그려나가던 ‘사과’는 막을 내릴 준비를 하면서 스크린 밖으로 이어지는 점선 그래프를 상상한다. 그리곤 낮지만 강력한 목소리로 객석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오늘, 당신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현정(문소리)은 7년째 연애중인 민석(이선균)과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급작스런 결별 선언을 듣는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현정은 자신을 짝사랑하던 상훈(김태우)이 계속 접근해오자 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연다. 마침내 상훈과 결혼식을 올린 현정.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민석이 찾아온다.

‘사과’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떠나가는 연인은 알쏭달쏭 관념적인 말로 이별의 이유를 둘러대고, 남겨진 연인은 “나를 사랑했니?”라고 끝내 묻는다. 원인은 모호하지만 상처는 생생한 세상의 그 모든 꺼져가는 사랑은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환부를 덮는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찾아오면 잊은 듯 했던 통증이 도진다. 현정과 민석과 상훈도 그랬다.

하지만 ‘사과’는 전형적이되 관습적이진 않다. 그것은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둔 디테일의 힘과 배우들의 좋은 연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 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하는 행동과 나누는 대화는 또렷한 사실감으로 시종 흥미를 잃지 않게 한다. 연인들 못지 않게 가족 관계도 드물게 생생하다. 특정 신앙을 가진 가정을 묘사할 때 한국영화는 흔히 양극단적인 묘사로 치닫곤 하지만, 이 작품은 종교 활동을 그려낼 때조차 생활의 냄새를 제대로 풍긴다.

이 작품은 촬영 후 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개봉 스케줄을 잡게 되었을 정도로 운이 없었지만, 그건 영화 문화의 획일성에 짓눌린 것일 뿐, 작품의 신선도나 완성도와는 관련이 없다.

그래도 촬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쉬움이 남는다. 장면의 공간적 맥락을 설명하는 설정 쇼트를 배제한 채, 내내 핸드 헬드로 서성이듯 인물들을 관찰하면서 클로즈업을 남용한 촬영은 답답한 느낌을 준다. 사랑의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이야기라서 더욱 그렇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실험에 열중하느라 계란 대신 시계를 삶았던 뉴튼 같다.

아마도 ‘사과’는 올 한해 연기 앙상블이 가장 좋은 사례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작품의 배우들은 혼자 등장할 때도 좋지만 둘이서 함께 할 때 더욱 훌륭하다. 특히 문소리와 김태우, 문소리와 (엄마 역의) 최형인이 주고받을 때가 그렇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은 문소리에 대해서 어떤 편견을 깰 수 있을 것이고, 김태우에 대해서 신뢰가 좀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과’는 전혀 칙칙하지 않다. 소소하지만 기분 좋은 유머가 끊이지 않고, 캐릭터들은 모두가 정이 간다. 하지만 맘 편히 보긴 어려운 영화다. 보는 이 각자의 연애담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만들 만큼 반영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필름에는 낚시 바늘이 들어 있다.

‘사과’를 함께 보았다고 묵은 연애가 회춘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객석에 불이 켜진 후 극장을 나서면서, 오래된 연인들이 다시금 진지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언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