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미쓰 홍당무' – 우주에서 날아온 놀라운 코미디


기사입력 2008-10-13 10:18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대체 이 여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대책 없는 헤어 스타일에 온통 비호감인 외모. 럭비공처럼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온갖 콤플렉스의 집합소 같은 성격. 듣는 이의 반응은 생각지도 않은 채 피부과에서 자신의 연애 심리를 장광설로 늘어놓고, 남에겐 “남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한다”고 충고하면서도 스스로는 타인의 의미 없는 행동을 과도하게 해석하며 인생을 거는 여인. 수시로 얼굴이 붉어지는 안면홍조가 아니라 감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내면홍조가 진짜 문제일 것 같은 이 여자는 도입부에서 말 그대로 ‘삽질’을 하면서 등장하기까지 한다.

‘미쓰 홍당무’(10월16일 개봉)는 캐릭터의 매력이 내내 빛을 발하는 영화다. 이경미 감독이 창조하고 공효진이 숨을 불어넣은 이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보면서 관객은 처음엔 황당해하다가 곧 이어 눈과 귀를 의심하게 되고, 급기야 발을 구르며 웃다가 종국엔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지는 경험을 한다. 극 초반 도저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인물이 영화를 설득하고 객석을 사로잡아 끝내 공감의 파장을 일으키는 진기한 순간이 이 작품에 있다.



이경미 감독이 연출하고 공효진이 주연한 영화 '미쓰 홍당무'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홍조증으로 괴로워하는 양미숙(공효진)은 고등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지만, 같은 학교 교사인 이유리(황우슬혜)에게 밀려 중학교 영어 교사로 발령난다. 오랜 세월 자신이 짝사랑해온 기혼남 서종철(이종혁) 선생마저 이유리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숙은 종철의 딸인 종희(서우)와 합세해 둘 사이를 망쳐놓으려 수를 쓰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미쓰 홍당무’는 우주에서 날아온 것 같은 코미디다. ‘넘버 3’ 이후 이토록 신선한 한국영화 코미디를 본 적이 없다. 극중 가장 중요한 촬영 장소가 학교 어학실일 정도로 규모가 작지만, 이 영화의 유머는 거의 초현실적인 감각으로 천계(天界)의 서로 다른 차원을 넘나들 듯 자유롭다. 섹스 코미디의 성격도 갖고 있는 이 작품은 음담패설을 해도 비린내가 나지 않고, 끈 팬티가 나오는 순간에도 저급해지지 않는다.

오인과 착각,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으로 온통 좌충우돌하는 해프닝 속에서도 ‘미쓰 홍당무’는 길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은 ‘루저(loser-실패자) 영화’의 뻔한 화술을 따르지 않는다. 여기엔 학대도 없고 엄살도 없다. 자학은 있지만 전락은 없고, 자기연민은 끝내 자기애의 끈을 놓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절절하게 말한다. “그래 나도 알아. 내가 별로라는 거.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나한테 이렇게 안 할 거면서, 다들 내가 나니까 일부러 나만 무시하고.” 그녀의 경우가 좀 심하긴 하다. 하지만 세상이 온통 왜 나만 미워하는지 모르겠다고 볼멘 소리를 하는 순간은 (‘닉슨’의 올리버 스톤에 따르자면) 심지어 미국 대통령에게도 찾아온다.

양미숙은 이해의 대상일지언정, 동정의 대상은 아니다. 쓸쓸한 장면도 있고 뭉클한 부분도 있지만, 결국 이 영화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씩씩함이다. 그녀에 대한 세상의 태도는 끝내 바뀌지 않지만,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바뀐다. 그게 모든 성장 영화가 희망을 보여주는 방식일 것이다.

감독은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지 않고 각본을 썼다지만, 공효진이 아니었다면 누가 양미숙을 연기할 수 있었을까. ‘미쓰 홍당무’와 ‘가족의 탄생’은 공효진이 얼마나 창의적이면서 사실감 넘치는 연기를 하는 배우인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함께 보여주는 대표작일 것이다. 영화 전체가 양미숙을 중심으로 도는 상황에서, 두 신인 배우 황우슬혜와 서우가 기대 이상의 모습으로 제 몫을 단단히 해냈다는 사실도 기록할 만 하다.

‘미쓰 홍당무’가 결점 없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전체적인 톤과 리듬에 대한 장악력이 아쉽고, 작품 자체의 생동감과는 별도로 어수선한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카메라 역시 강조해야 할 장면과 무심한 듯 비춰야 할 장면을 종종 혼동하는 듯 하다.

하지만 2008년의 충무로는 이 작품을 통해 또 한 명의 뛰어난 감독이 첫 걸음을 뗐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기억할 것이다. 장르의 관습과 제작-투자자의 입김 그리고 관객의 기호를 살피느라 지나치게 ‘예의 바른’ 허다한 데뷔작들 사이에서, 이경미 감독의 상상력과 배포가 감출 수 없는 안면홍조처럼 만개한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각별한 경험이다. ‘미쓰 홍당무’는 신인 감독에게 기대되는 재능과 태도를 함께 갖춘 드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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