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기 인터뷰] 당신은 멋있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멋을 부리려는 사람들은 많다. 멋있게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정작 무엇이 멋있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민기는 세상에 정말 멋있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에덴의 동쪽> 초반에 정말 볼만했다. 대사들의 호흡이 길고 대부분 문어체였다. 이를테면 칼이 떨어졌는데 “이 칼을 수거해가라” 그러더란 말이야.
일단 참 불편하지. 오늘을 사는 배우들에게 60년대, 70년대, 80년대 말투를 하라는 게. 그런 경험 다 있을 거다. EBS 같은 데서 하는 한국 고전영화들 보면 당시로선 참신한 연출이고 영화라는데 말하는 것만 들어도 이상하게 닭살 돋고. 그런데 나는 그것 자체가 그 시대상이라고 본다. 오늘을 사는 배우가 그 시대를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오늘의 언어로 연기한다면 당대를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게시판들을 보면 배우의 연기보다 작가의 대사체가 문제라는 지적들도 꽤 많다. 오늘의 관객 입장에서만 볼 게 아니라 이 드라마가 어느 시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생각하고 본다면 좀 불편한 단어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직접 연기하는 우리들은 얼마나 불편하겠어(웃음).

그런데 당신이나 이미숙씨 같은 경우는 그 대사들을 자기 호흡으로 만들어내더라. 종이에 써보면 정말 웃음마저 나오는데, 이상하게 당신들이 말하면 가슴을 울린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내 자신에게 굉장히 익숙한 것처럼 쓰는 게 중요하다. 그 문맥에, 문장에 맞는 호흡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자기 신뢰가 참 중요한 것 같아. 배우들 스스로가 어떻게 이런 문장을 썼냐, 하면서 연기하면 시청자들에게도 끝까지 믿음을 못줄 것이다. 그걸 극복해내야 시대극을 끌어갈 수 있다.

극 초반에는 그걸 다 소화해내는 배우들이 있어서 볼만 했다. 그런데 젊은 연기자들로 극중 인물들이 교체되면서 이런 안정감이 흔들리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연희씨에 대한 지적이 많다.
결국 경험치다. 배우로서의 경험치, 인간으로서의 경험치가 분명히 개입될 수밖에 없다. 텍스트라는 건 죽어있는 존재다. 그걸 살아있는 감정으로 뱉어내는 건 배우다. 그 삶을 실제 살아내느냐, 아니면 그저 암기해서 뱉어내느냐는 배우에게 달려있다. 경험치가 모자라면 이미숙 선배나 내가 하는 정도의 호흡이 쉽게 나올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연기자 본인이 그걸 몸으로 겪어가면서 자기 영역을 넓혀갈 수밖에 없다. 요즘 젊은 배우들은 반응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몇몇 배우들은 이미 무섭게 발전해가고 있다.

후배 연기자들에게 연기 조언을 곧잘 해주는 편인가.
나는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라 식의 조언을 싫어한다. 다만 “네가 지금 여기서 왜 이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봐라”고 말한다. 그거 이상 없다. 많은 선배들이 조언이랍시고 ‘미리보기’를 한다. 그런데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 그 호흡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끊고, 여기서 숨 쉬고, 이렇게 다 지정해주는 건 어쩌면 그 후배 연기자를 망치는 길일 수 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그래서 정말 어려운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후배연기자가 있나?
모두에게 애착이 간다. 게으른 연기자가 없다. 나는 게으른 연기자를 굉장히 싫어한다.

게으르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자기가 뭘 연기해야하는지 부지런히 찾지 않는 연기자다. 남들이 잘 한다는 칭찬에 더 잘할 생각은 못하고 안주해버리는 연기자가 있다.

그래서, 지금 드라마에는 결과적으로 만족하고 있나.
완전히 만족하는 게 어디 있겠어. 하지만 작가님이 아예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하는 분도 아니고. 조금 안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서 어쩔 건데? 나는 대본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바이블이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믿고 따라야하는 것이다. 조민기가 생각했을 때 이런 부분은 이렇게 갔으면 좋겠다,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작가님 잘 하시겠지요. 대통령과 문화부장관을 만드신 분인데. (편집 주: <야망의 세월>의 나연숙 작가)
푸하하하하. 그러게, 그러게.

나중에 문화부 장관 하시는 거 아닌가.
아휴, 나는 한자가 짧아서.

신태환이 참 흥미롭다. 1, 2회 볼 때는 그저 아주 악마적인 인물이구나 싶었는데 요즘 보면 굉장히 다양한 욕망들이 얽혀있고 나름의 신념이 있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시놉시스 받았을 때 신태환에게 가장 많이 끌렸다. 우선 악역이라는 캐릭터를 워낙 좋아한다. 영화도 드라마도 선한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서의 악역이 많은데, 이 악역은 자기 스토리가 분명히 있다. 더 매력적인 건 신태환이 스스로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이다.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자기 논리가 분명한 인물이다. 게다가 악역 주제에 멜로까지 있어(웃음).

악역은 왜 좋아하나?
처음 데뷔하고 착한 역할을 굉장히 많이 했다. 그런데 별로였어. 진짜 같지가 않아. 아는 신부님 한 분도 운전하시다가 누가 앞으로 확 끼어들면 목에 로만칼라만 손으로 싹 가리고 “야! 이 새끼야!” 그러신다. 그러시고 잠시 멈춰 서서 “오 주여.” 그러고 다시 갈 길 가신다(웃음). 그게 굉장히 인간적으로 보이고, 또한 그게 바로 세상이라고 본다. 살면 살수록 정답이 모호해지지 않나. 대신 그게 오답이라고 가르쳐주는 존재들만 굉장히 많아진다. 그게 세상인 것 같고 그게 진실한 모습 같다. 그런데 이게 작품 안에서만큼은 악역을 통해서 더욱 잘 드러나는 것 같아. 물론 그게 너무 과하다보면 정치적인 악역, 이를테면 밥 먹을 때도 악한 놈처럼 먹어야 하고 화장실 가서도 악역처럼 볼 일 봐야 하는 게 될 텐데(웃음). 그런 것만 조심하면 가장 진실한 게 바로 악역 같다.

아버지로서의 신태환 또한 굉장히 보기 힘든 캐릭터다.
굉장히 특이하지. 아들놈이 여자 때문에 괴로워하니까 권력 이용해서 자게 해버리고. 신태환도 기본적으로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가 그런 인생을 살아보니까 별 것 없다, 그러니까 너는 그렇게 살지 말라면서 아들에게 다소 폭력적인 주문을 하고 억압을 하고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당신은 어떤 아버지인가.
나는 아이들에게 늘 현명해지라고 이야기한다.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6학년이다. 지금까지는 담배 안 피우는데 괜히 화장실에서 피우다가 혼나지 말고 집에서 피우라고 이야기한다. 담배도 먹는 음식인데 왜 똥 싸는 데 가서 먹을 걸 먹느냐고.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떳떳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에덴의 동쪽>의 태환과 <사랑과 야망>의 태준을 비교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태준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이지. 반면 신태환은 아주 작정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다. 악한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내 자신이 더 강한 악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이다. 가끔 가부장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보다는 극한의 에고이스트에 가깝다.

<해부학 교실>에서의 역할도 그런 극한의 에고이스트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런 역할을 주로 하게 되는 걸까? 혹시 본인 성격과 실제 비슷해서?
그렇지 않거든! (웃음) 내가 얼마나 재밌는 사람인데. <에덴의 동쪽> PD가 이거 끝나면 자기랑 코미디 꼭 하자고 할 정도다. 하핫.

영화 출연은 일부러 꺼리는 건가?
그렇지 않다. 내가 밥벌이로서의 연기를 시작한 것이 영화였고, 지금 아내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을 찍으면서 인연이 닿은 덕분이었다. 예전에 드라마 쪽 일을 시작했던 게 한국영화 사정이 아주 안 좋아졌을 때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일구려다보니 아무래도 돈을 벌긴 해야 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그래도 시나리오는 꾸준히 들어왔는데 대부분이 좀 이상했어. 괜히 벗는 것도 있었고. 나는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뚜렷한 편이다. 벗어도 좋다. 그런데 벗을 때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가 있어야지. 그런데 명분도 없이 막 벗고 막 나쁘고, 그런 역할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피하다보니 영화 쪽에선 잘 안됐던 것 같다.

그런 거 보면 굉장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 같다.
이제 촬영장에 가면 내가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보다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다보니 매사에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괜히 싸우면서 어떻게든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지금은 좀 더 지켜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그런 것 같다. 웬만큼 공부가 안된 상황에서 괜히 덤볐다간 무안을 당할 수 있거든. 어릴 때는 괜찮아. 그냥 제가 어려서 잘 몰랐습니다, 하고 사과하면 되잖아. 지금 그러면 빼도 박도 못한다. 안되지 안 돼. 더 준비를 하고 더 많은 말을 들어야 하는 나이인 것 같고. 대신 그만큼 더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편한 나이가 된 것 같아 좋다.

스스로 나이가 들었구나, 싶었을 때가 있나?
난 솔직히 그런 생각 한 번도 못해봤다. 그런데 자꾸 주위에서 형, 형 그러니까. 심지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 (웃음) 그러면 “내가 너 무슨 과목을 가르쳤는데?”라며 막 화낸다. 나는 선배라는 말도 별로고 그냥 형, 오빠라는 말이 좋단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 같아. 아주 이상하다.

최근 몇 년 사이 해본 제일 어린 역할이 몇 살짜리였나.
하하하! 대학생도 해봤다. <사랑과 야망>에서.

솔직히 어거지 아닌가.
아니 충분했다니까(웃음). 충분했어요, 대학생.

<에덴의 동쪽>에서도 20대 후반부터 장년까지 같은 인물을 연기하는데. 당신은 왜 안 늙는 건가.
나 많이 늙었다. 여기 흰머리 좀 봐.

흰 머리는 나도 있다.
늙지 않는 방법이라. 일단 철이 들면 안 된다. 그러기에 배우라는 직업이 좋다. 배우 할 때 한자 배자가 사람 인자와 아닐 비자가 합쳐진 모습이거든.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우자는 또 빼어날 우자거든. 사람은 아니되 빼어나야 된다. 되게 말이 힘든데, 인간 같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게 요점이다. 집에 가족 두고 있으면서 생면부지 다른 배우들에게 남편역할하고 아버지 역할 해야 하잖아. 그렇게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마누라 등 두드려주면서 잠 자야하고. 한마디로 호불호가 그 어떤 직업보다 분명해야하고, 또 어떤 직업보다 불 분명해야 하는 직업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늘 불안하면서도 불안하지 않게 살아야하다 보니 늙지 않는 게 아닐까.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지 않나. 계속하게 되는 동력이 궁금하다.
아프리카를 한 번 가보면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관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죄 없이 병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식수 오염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찾다가 우물을 파면 그 문제를 조금이라도 막아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불어’라는 이름의 통장을 만들어서 후원을 받고 있다. 사람들이 외식 한 번 할 거 아껴서 넣고, 술 한 번 마실 거 아껴서 넣고 그런다. 그 정성들을 모아서 작년에 우물을 하나 팠다. 하나 파는데 한국 돈으로 1500만원 정도 들어간다. 이미 대지 오염이 어느 정도 된 상태라 아주 깊게 파야 하거든. 드라마 끝나고 내년에 갈 때는 두 개 정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연민인가?
아니. 나는 원래 봉사라는 걸 못하는 사람이다. 내 모든 걸 다 쏟아 붓는 게 봉사다. 난 그거 못한다.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조금 활용할 뿐이다. 나는 연기하면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사랑도 얻을 수 있잖아. 그렇게 얻은 무형의 자산, 사랑과 관심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정성을 좀 더 용이하게 모을 수 있으니 다 같이 나누어보자는 거다. 일종의 에이전시랄까.

굳이 나눌 거 한국에서 나누라고 말하는 사람 분명히 있을 거다.
있지. 그럴 땐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다른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은 나라는 많다. 그런데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나라는 많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렇거든. 우리가 좀 살만해졌다고 다른 나라의 문제에 무관심한 건 상도의상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 등수 매기는 거 좋아하잖아? 한국이 후원, 기부 개념에 있어서 아주 꼴찌다. 미국이 오만하다는 비판 많이 받아도 지금 위치를 누리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하는 기부가 있고, 빌 게이츠 재단이 하는 기부가 있고, 빌 게이츠 개인이 하는 기부가 또 따로 있다. 삼성이 기부하는 거 있다. 삼성복지재단을 만들어서 기부하는 거 있다. 그런데 이건희 개인이 기부하는 건 없다. 그게 미국과 우리의 차이다.

좌우명이 “멋있게 늙자”는 걸로 알고 있다.
하늘을 본적이 있느냐, 꽃들을 본적이 있느냐, 주변에 그런 질문을 종종 한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살다보면 무언가를 봤을 때 그게 정말 멋진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멋있게 늙자는 좌우명을 가진 사람이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정말 멋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쿠바하면 뭐가 떠오르나. 보통 남루한 모습을 먼저 떠올리지 않나. 그런데 실제 쿠바를 가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게 결핍이나 포기가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걸 즐기고 있는 거란 걸 알 수 있다. 난 그게 멋있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처음 방송국 들어갔을 때 출연료 받은 통장을 여태껏 사용하고 있는데, 재밌는 게 소득이 적을 때나 많을 때나 늘 하고 싶은 것만큼은 다 하고 살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때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들은 지금도 똑같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 생각해보면 돈이 많고 적고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지금을 즐기고 즐기지 못하는 건 돈의 문제라기보다 용기의 문제다. 허지웅 기자 (<프리미어> ‘와일드 토크’

2008.10 허지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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