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상-'권태' 중

 

어서 차라리 어두워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 - 무슨 제목으로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해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100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다. 나는 여기 처음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또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함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대싸리 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

 

 

2. 시인과 촌장-'비둘기 안녕'

 

"이제 너는 슬프지 않을 거야"라고 날개를 퍼덕이며/아침이면 내 조그만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언제나 노래했어/춥고 어두운 밤에도 동산의 보드라운 달빛처럼 지친 내 영혼 위에 울던/그 아름답던 나날들 햇빛을 쪼아먹고 살던 내 착한 비둘기는/나와 헤어져 그가 살던 곳으로 날아가 새털 구름이 되었어/이제는 내가 울지 않기 때문이야/이제는 슬픔이 내게서 떠나가기 때문이야/이제는 내가 울지 않기 때문이야/이제는 슬픔이 내 곁을 떠나가기 때문이야/비둘기 안녕/비둘기 안녕

 

 

3. 빅터 프랭클-'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 중에서

 

사람의 눈을 생각해보라. 거울에서 외면하면 눈은 모든 것 자체를 본다. 백내장에 걸린 눈은 대상을 구름처럼 본다. 그것이 백내장이다. 녹내장인 눈은 빛 주변에 무지개와 같은 녹내장을 본다. 눈 자체의 이상 현상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눈은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그것이 자아 초월이다. 이른바 자아실현이란 자아 초월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남아야 한다. 자아 실현을 의도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고, 자멸적인 것이다. 자아실현도 실상은 정체성과 행복에 집착한다. 행복을 없애는 것은 바로 '행복에 대한 추구'이다. 우리가 행복에 집착할수록 더 많은 행복을 놓치게 된다.

 

 

4. 이동진-'필름 속을 걷다' 중에서

 

보슬비가 내리는 센트럴파크에 들어서자 때마침 시민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프란츠 카프카는 "사랑은 자동차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저 핸들과 승객, 그리고 도로 사정 뿐이다"라고 말했다. 자동차에 문제가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조종할 핸들이 없고 타고 갈 승객이 없으며 달릴 도로가 없다면, 설사 문제가 없다 한들 그 자동차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결함투성이인 삶이 누릴 수 있는 게 실수투성이 사랑이라면, 그 보잘것없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 아닐까. 출발후 다섯 시간을 넘겼을 때 서로 팔짱을 낀 세 중년 여인이 결승선을 향해 천천히 달려왔다. 진행자가 세 사람의 이름을 차례로 외치자 그들은 자랑스러움과 흥겨움을 가득 담은 눈웃음으로 구경꾼들에게 인사했다. 실수투성이 사랑에 그저 하나를 더 바란다면, 길고 긴 그 사랑의 종착점이 어디든, 마지막 순간에 손을 흔들어 답례할 수 있기를. 기쁨이었든 고통이었든, 함께 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음을 미소로 확인해 줄 수 있기를.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은 갈채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출처] 낭독의 발견|작성자 이동진
2008.9.3.KBS2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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