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경  

- 정우영


  아직 봄이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저녁나절이었다.
  허접한 눈으로 헌 신문 뒤적거리고 있는데,
  여든 넘은 어머님이 불쑥 물으신다.
  자네는 봄이 뭐라고 생각하나?
  봄이요? 해 놓고 답변이 궁색하다.
  아지랑이야.
  눈부터 뽀얀 아지랑이 속에 빠져들며 어머님 스스로 대꾸했다.
내가 양지뜸에서 나물 뜯고 있던 열세 살 때야. 초록 아지랑이
가 다가와 속삭이더니 나를 살짝 휘감아선 날아가는 거야. 난 어
쩔 줄 몰라 아지랑이 꽉 붙잡고 있었지. 아지랑이는 한참을 날아
산등성이에 나를 내려놓았어. 그러고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초록
저고리를 슬근 벗어 걸어 두는 것인데, 요상도 해라. 그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초록 싹이 돋는 거야. 깜짝 놀란 난 하초를 지렸는
데 초록 물이 배어 나왔어. 초경이야. 그 후로는 이상하게 봄보다
먼저 아지랑이가 찾아와. 그러면 난 어김없이 초경을 앓지.
  아지랑이와 어우러진 어머님 목소리 나른하게 멀어지더니
  내 허접한 눈에 초록 물 배어든다.

<시와 사상, 2007,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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