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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랑의 키다리 아저씨
예랑 지음, 권신아 그림 / 이미지박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
그러나 그는 물고기가 그려진 노트를 골랐다.
귀엽게 생긴 물고기 한 마리가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었다.
조금 심심하지만 정직한 그림.
첫째 물고기는 오래 기억하지 않고요, 둘째 물고기는 자유롭고요, 셋째 울지 않거든요.
난 웃으며 말했다. 울어봤자 물속에서 보이지도 않을 걸요 뭐.
사랑도 물고기 같아야 해요. 그는 그런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때 내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물고긴 오래 기억하지 않는게 아니라 머리가 나쁜 거예요,
미끼에 걸렸다 가까스로 살아났다가도 금방 잊고 다시 바늘을 물어버린대요, 물고기는...
그럼, 난 이미 물고기예요. --p.63
그래. 이별을 하고나면 내 지난 사랑이 너무 아파서 친구를 불러놓고 소주를 들이키며 '이제 다시는 사랑같은거 안 해!'를 마치 투쟁이라도 하듯 외쳤댔다. 타인에게 내 마음을 주는게 겁이 나서 '앞으로는 사랑같은 거 쉽게 하지 말아야지..'를 넋두리 하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내 마음을 흔드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면 지난 기억같은 거 깡그리 잊고, 그딴 아픔 겪은 적도 없다는 듯이 나는 또 다시 가슴 설다. 바보같이...
그래. 사랑하면 다 바보되더라.
입가로 질질 새는 웃음이 감당이 안되서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기도 하더라.
이별하면 폐인된다는 거 알면서도 사랑을 할 때는 그저 좋기만 하더라.
사랑은 '유비무환'과는 거리가 멀어서, 이별을 예감하여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준비를 해도 눈물이 흐르더라.
입가에 흐르는 웃음대신 눈에서 눈물이 흐를때야 비로소 '내가 또 사랑을 하였구나!'를 깨닫게 되더라.
나도...물고기였나보다.
아주 오랫동안 '사랑'따위 남의 일인냥 살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가끔은 이런 사랑이야기에 마음이 아픈 날 발견한다.
웃긴일이지. 내 지난 사랑은 적어도 나에게는 아픈 이별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된 옛사랑을 그리워 하며 추억에 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키다리 아저씨'같은 상대를 꿈꾸는 것은 감수성 짙은 여자의 소박한 판타지이다.
'아직 철이 덜 들었네'라며 혀를 찰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중얼 거리는 작은 꿈 같은 거니까.
혹시 모르잖아. 나만의 키다리 아저씨가 지금도 나를 향해 열심히 걸어오고 있는지도.
'오랜만에 혼자 집에 앉아 슬픈 노래를 들을 때 마다 모두 내 얘기같고 평소엔 있는지도 몰랐던 책장속의 얇은 시집들 왜그리 와닿는지...' -- 박정현 4집 앨범 '생활의 발견'
그래 맞다. 이런 이별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상황'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사랑할 때 읽는 것과 이별하고 읽는 것은 천지차이.
행복함을 증가시켜 줄 수도 있는거고, 위로를 줄 수도 있는 거다.
천천히 한 자, 한 자 읽는 동안 차분해지는 느낌이 참 좋다.
다만...
예쁜 글과 일러스트에 나도 모르게 빨려들다가 뒷표지에 선명하게 쓰인 10000원이란 가격에 그만 '헉' 소리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더라. 히야- 요즘 책 값 정말 비싸다니까. 이렇게 얇은데... 하긴 뭐 올 컬러에다 종이질도 빤딱빤딱한게 좋으니까..뭐;; -라고 애써 위로해본다.(응? 어째 마지막에 산통 확- 깨는 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