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의 눈을 보고 있자면 눈을 이루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이 일제히 원영의 눈동자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초파리와 교감을 하는 것 같았다. - P9

원영은 1978년 가발 공장 취업 이후 외판원, 마트 캐셔,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원, 볼펜 부품을 조립하는 부업 등을 거치며 쉬지 않고 일해왔다. 그럼에도 ‘오십대 무경력 주부‘로 취급되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 자체가 드물었다. 주변 사람들은 왜 일을 하느냐 했다. 집에 있어도 되지 않느냐 했다. 딸에게 개인 교습을 시켜줄 수는 없었지만 학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학원에 보낼 형편이 안 되었던 시절에도 원영은 비슷한 말을 들었다. 학원비 몇 푼 버느니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지 않냐는 식이었다. - P10

소설을 쓰면서 지유는 종종 시작점을 잊어버렸다. 어떤 생각이나 장면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 이유는 분명 있었다. 그 소설을 써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만든,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런 게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소설을 처음 쓰게 된 이유라거나, 작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더라. 지유는 이유를 지어냈다. 이제 지유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되었던 무언가가 아니라, 중요한 것을 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시장은 트렌드에 맞춰 글을 써줄 것을 은근히 요구하고 있었고, 작가들은 기민하게 다음 책을 출간하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 그다음 이야기로 더 빨리 뛰어야만 했다. 그래야 잊히지 않을 수 있었다. 매번 시험대에 올라서는 기분이었다. 정신없이 글을 쓰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 무엇인가 잊어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뭐였더라. - P19

어느 날 원영은 언니의 책을 구경하다가 ‘강‘이라는 글자를 스스로 읽어냈다. ‘ㄱ‘도 아니고 ‘가‘도 아닌, 동그라미 받침이 있는 ‘강‘.
"아무도 안 알려줬는데 읽었다니까, 내가."
엄청나지 않으냐고 원영은 말했다. 아무도 한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과 ‘강‘이라는 글자를 혼자서 읽어낸 것 중 어느 쪽이 엄청난 사건인지를 생각하다가 지유는 혼자서 한글을 깨친 것이냐고 맞장구를 쳤다. 그건 아니고, 그 한글자만 읽어냈다고 원영이 답했다. 그렇지만 그 한 글자를 읽어냈기 때문에 언니가 한글을 알려주기 시작했다고 했다. 한 글자를 못 읽어냈더라면 글자를 못 배웠을지도 모른다고. - P26

"그렇게 쓰면 뭐해. 소설은 소설일 뿐인데."
수화기 너머로 원영의 들뜬 기운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 그런가,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가 원영은 물었다.
"소설일 뿐이면, 왜 써?" - P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