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우는 게 취미라고 사방에 자랑하고 다닌다. 그러나 열심히‘라는 단어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일단 뭔가를 배우려고 시작은 하더라도 그 과정을 즐기면서 천천히 진도를 조금씩 빼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카페는 더없이 좋은 장소다. 집에서 번역 작업이나 공부를 하다가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달을 때면 나태함을 자책하곤 하는데, 카페에서는 곧잘 집중이 잘된다. 잠시 창밖의높다란 하늘을 바라보거나 사람 구경을 하면서 여유를 부려도 마음이 흡족하기만 하다. - P7
모든 공부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목표를 지닌 사람은 물론, 목표가 없는 사람에게도.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직업으로서의 일을 하지 않더라도 사회와 연결되기 위해 뭔가 할 일이 필요하다. 나는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에 따르는 모든 행위를 ‘공부‘로 치환하기로 했다. 현재의 삶에 갇혀 더는 생각이 자라지 않을 때는 새로운 생각이 필요하다. 그 새로운 생각을 얻을 수 있는방법이 내겐 뭔가를 배우는 일이다. - P10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면 옳은 길을 되찾아 나오면 된다. 가야 할 길이 아니라면 아무리 멀리, 아무리 많이걸어갔다 해도 미련 두지 말고 냅다 돌아 나오는 게 좋다.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많이 걸어간 것이 아까워서 계속가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길을 너무 멀리 떠나와서 어디로 돌아갈지 알 수 없을 때는 그 자리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도 속 시원한 해결책이다. 내가 하고 싶어 시작하고, 내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두는 건데, 나 아닌그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겠는가. - P24
마무리 짓는 기술은 중요하다. 뭔가를 시도했다가 중도에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뭐라도 하나 건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야무지게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이런 걸 왜 배워야 하는지 앙탈을 부리고 싶거나 하기 싫어지면, 나는 잠시 손을 놓거나 적당히 밀어둔다. ‘선택과 집중‘을 잘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나란 사람에게는 삽시간에 집중을 해제하는법도 필요하다. - P26
사람들마다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야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트인 공간이 주는 공공성을 즐긴다. 혼자 있음에도 외롭지 않고, 여럿이 함께 있지만 따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지만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약간의 제약이 뒤따르는 그 장소성이 내 자세와 태도를 바로잡아줘서 더 좋다. 그렇게 절반쯤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공부하고 작업하는 것은 생산적일 수밖에 없다. - P34
책을 윤독으로 읽자고 하면 처음에는 조금 미심쩍어하는사람들도 있다.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나 하던 돌려 읽기라니?‘ 하는 얼굴로 나를 본다. 하지만 윤독을 한 번이라도 해보면 인원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함께했던모든 사람이 200퍼센트 효과적이라며 좋아했다.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눈으로 책을 따라 읽으면 훨씬집중이 잘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역시 내 친구들이 최고! - P47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는 세 시간도 넘는 시간에 걸쳐 숏을 분석하는 수업은 매번 그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흥미로웠다. 영화를 장면 안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이야기해야지, 정신분석이나 페미니즘 이론을 들이대기 시작하면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설명도 새롭게 다가왔다. - P52
현재의 삶에 갇혀 더는 생각이 자라지 않을 때는 어떻게하는가? 생각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용기를 내야 할지 모를때,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 축적된 책을 읽거나 새로운 걸시도하고 배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감성적으로 대책 없이 골라잡든 일단 뭐라도 읽고 배운다. - P57
들뢰즈는 마들렌에 자극을 받은 ‘비자발적 기억력‘이 만들어내는 공명의 효과가 지고지순한 행복감‘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나중에 우리가 살아갈 시간들 중 ‘지고지순한 행복감으로 등장할 우리의 마들렌을 여기저기 숨겨두면 어떨까. 내가 찾아낸 나의 마들렌은 ‘외국어다.
질 들뢰즈의 이 말이 모두에게 울림이 되기를.
헛되이 보내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본질적인 성과다. - P63
사서로 일할 때 번역 의뢰가 들어오면 낮에는 직장을 다니며 퇴근 후부터 한밤중까지 번역을 하는 ‘주경야번가‘로 지냈다. 늘 한밤중에 깨어 있기를 즐겼던 체질이고, 수면시간이 다른 이들보다 짧아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내게 도착한 영어를 한국어로 배달하기 위해서 헤매고 삽질하는 시간이 즐겁고 소중하기만 했으니까. 외국어 실력도 중요하고, 이해한 내용을 잘 정돈된 우리말로 옮기는 기술도 필요했기에 번역이좋다는 평을 듣는 책이 있으면 찾아 읽느라 독서 시간이 더늘어난 것도 같다. 그렇다. 번역가란 생래적으로 지독하게 독서와 연결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번역가는 나의 운명이었다. - P120
책을 향한 나의 터무니없고도 열광적인 사랑이 언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가끔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하지만 많은 독서가가 그러하듯, 책을 의식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언제나 책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책을 읽고 사랑에 빠지게되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문자로 된 온갖 것들을 산만하게 읽어대다 보니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외에 처음으로 읽은 책의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상황이다. 누군가 나에게 "넌국어 교과서를 읽고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뛰어난미술품이나 예술작품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각종 정신적 충동이나 분열 증상)을 겪었어"라고 해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책이 깔아놓은 궤도를 따라, 책이 뚫어주는 터널을 따라 내 인생이 움직여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아직까지는 책에 질려본 적이 없으므로 오늘도 나는 책을 읽는다. 책은나의 구황작물이다. - P166
한강 작가는 "책을 많이 읽고 나면 강해졌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했다. 책에 대한 허기를 느끼고 며칠 동안 정신없이 책을 몰아서 읽으면 어느 순간 충전했다, 강해졌다고 느낄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마음의 결락缺落‘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락의 사전적의미는 있어야 할 부분이 빠져서 떨어져 나감‘이다. 어느 문학 강연에서 이 단어를 듣고 이제야 딱 들어맞는 나만의 단어를 찾은 느낌이었다. 살다 보면 분명 마음에 결락이 생긴다.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 P167
매일매일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면 바랄 나위 없겠으나, 그렇지 않은 날에는 하루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책을 읽었다. 반성이 필요할 때는 조용히 침잠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책을 읽는 걸로 떨어져나간 자존감, 빠져나간 자신감을 메웠다(사실은 기분이 좋은 날은 기뻐서 책을 읽었고, 기분이 나쁜 날은 슬프다는 핑계로 마구 책을 읽었다). 게다가 이제는 노후까지 생각해야 한다. 준비가 전혀 안 된 것도 아니건만 노후를 생각하면 나이든 삶에 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놀랄 때도있다. 놀란 가슴 부여잡고 지나가는 책이나 하나 붙들고 읽는 수밖에. - P168
"인간은 움직이고 있는 몸을 나타내는 동사를 읽거나 단지 활발하게 움직이는 어떤 도구의 이름을 읽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그러한 행동을 하거나 달리는 것과 같은 마음 상태가 된다."
요컨대 어떤 움직임을 나타내는 단어를 읽는 것은 이미 그것을 흉내 내고 있는 것과 같다는 내용이었다. 텍스트를큰 소리로 읽을 때 자신의 목소리, 호흡, 복부 근육, 횡격막등의 신체 기관 전부가 함께 연결되며, 그 결과 텍스트를 전달하게 된 목소리와 호흡을 만들어내려는 욕구 속에서 생명력이 도약하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큰 소리로 읽기는 단순히 발성이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정신과 육치의 교감이다. 이를 통해 침체된 기운을 회복하면서 자발적인 차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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