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느 날 멀쩡하던 행거가 무너졌다
이혜림 지음 / 라곰 / 2022년 2월
평점 :
십년도 더 전의 어느날이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던 밤이었고, 동생은 방에서 자고 있었고, 나는 그 시절 백수로써 야행성 인간의
의무를 다하고 있던 참이었다. 갑자기 방문 밖에서 굉음이 들려왔고,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났다. 완전히 바깥이라기엔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지진이라도 난 건가 싶어서 머리가 쭈뼛 섰다.
놀라서 밖으로 나왔더니 동생도 자다 일어나 바깥으로 튀어나오더라. 그리고
우리는 소리가 나는 안방쪽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본 것은… 드레스
룸에 설치된 설치형 행거가 처참하게 무너져내린 광경이었다.
걸려있을 때는 몰랐는데, 바닥에 널부러진 옷을 정리하려고 보니 엄두가
안났다. 이렇게 많은 옷이 걸려있었다니. 설상가상 행거가
휘어져 다시 설치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옷이란
게 정말로 무거운 것이구나…!
<어느날 멀쩡하던 행거가 무너졌다>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그날을 떠올렸다. 정말로 벼락맞은 기분이었지. 도저히 치우지 못하고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던 나와는 달리 비슷한 경험을 한 저자는 무너진 행거에서 쏟아진 옷을
땀범벅이 되도록 정리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작은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온갖 물건들이 가득한 자취방을
둘러보며 가진 물건들의 부피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쏟아진 옷더미에서 언제 샀는지도 모를 옷들과
몇 년동안 한번도 입지 않은 옷들을 쳐다보며 문득 숨이 턱 막혔다고 한다. 그렇게 저자는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미니멀라이프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 저자는 그때부터 비우는 삶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 극한의 미니멀 라이프에 돌입하게 되고 빙 안에 작은 서랍 하나와 작은 스탠드, 전신 거울만 남겼을 때는 황홀감까지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목표를
이뤄냈다는 성취감은 찰나의 감정일 뿐, 비워내는 것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 삶은 공허했다. 많은 것에 집착하느냐, 적은 것에 집착하느냐의 차이일 뿐, 오히려 의욕까지 없어져 황무지 같은 삶이 되어버렸다.
다시 비우기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본 저자는 처음으로 돌아가 왜 물건을 줄이고 단순하게 살고 싶은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고 답을 얻은 후, 이번에는 텅빈 방과 텅빈 인생을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기 시작한다. 비움으로 남는 시간들은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 쓰기 시작하자 비로소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신이 났다.
이 책은 언뜻 미니멀 라이프에 관한 책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책이다. 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행복함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함을 느껴왔다는 걸 깨달은 저자는 버리면서 진정으로 좋아하는 걸 채우는 삶에 빠져들었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다. 그렇지만 맥시멀리스트의 삶을 조롱하거나 비난하지는 않는다. 자신과는 대조적으로, 없는 것 없이 별의 별 물건으로 가득 채운
친구의 집에 갔을 때의 일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빼곡히 채운 물건에 점령당했던 자신의 과거와는 달리
모든 물건이 기쁨이자 행복의 원천처럼 보이는 친구를 보며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미니멀이든
맥시멀이든 물건을 대하는 방식에서 행복을 느끼는 쪽으로 가면 된다는 것. 모든 비움이 누구에게나 행복감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
비단 행거 하나 무너진 걸 계기로 미니멀리스트로 변신해서 끝없이 반성만 하고 이것저것 충고하려는 책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물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신혼집 크기를 줄이면서 겪게 되는 일들, 파격적으로 줄인 짐들로 세계여행을 하면서 부부가 느끼게 된 것들, 비우는
삶이 가지고 온 경제적인 변화, 삶의 태도가 변화하자 다시 정립되는 가치관,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겪는 시행착오와 일련의 과정들은 종국에는 ‘공수레공수거’와 일맥상통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학적인 면모를 보인다.
알록달록한 표지와 공감가는 제목에 홀려 가볍게 읽으려고 했던 이 책은 기대보다 묵직한 걸 남겼다. 이미 수없이 실패했기에 ‘나도 미니멀리스트 할래!’ 같은 다짐을 안겨주진 않았지만, 최소한 물건에 대한 태도 자체를
돌아보게 만들었달까.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에 짓눌리는 느낌에서 벗어나 행복감을 만들어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대로 행복한 비우기와 채우기를 할 것이다. 무조건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종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조용히 써내려가며 나긋나긋하게 진심을 전하는
모습이 무척 좋으니, 가진 것에 짓눌려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