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 내가 산 책 중에 처음으로 대놓고 빨간 딱지(?) 붙은 책일 거다.(아, 만화책은 좀 있군;)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큼지막하게 디자인 된 문구가 [살육에 이르는 병]이란 제목과 맞물려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것에 손을 뻗는 느낌이 자꾸 든다. 마치 피가 튄 것 같은 으스스한 표지도 제대로 한 몫 했다. 읽기 전부터 공포감은 자꾸 늘어가고, 그러면서도 손은 표지를 넘기고 있다. 홍보문구에 따르면 '충격적인 결말을 확인한 순간,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어디 얼마나 충격적인지 봐주지, 첫 페이지 잘 읽어놔야겠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유없는 오기를 방패 삼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구성 참 독특하다. 프롤로그가 아니라 에필로그부터 시작한다. 사건 발생이 아니라 범인 체포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에 놀라야 하는 걸까? 잠시 궁금증을 뒤로 하고 다시 책을 읽어나갔다.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3명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 시점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퇴역 형사 히구치, 범인 미노루, 엄마 마사코. 시점도 다르거니와 시점에 따른 시간도 약간씩 어긋나 있어 행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집중해서 읽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시간순으로 재배열해서 사건을 정리하고, 작가의 의도에 속지 않으려고 꽤 애쓰면서 읽었다. 결국 아무 소용 없었지만.

작가의 충실한 살인 묘사는 내 상상력과 더해져서 거의 스너프에 가까운 영상을 눈 앞에서 재현해냈다. 너무 잔인하고 냉혹해서 입 딱 벌리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 엽기적이라느니, 미쳤다는 소리도 감히 안 나오더라. 이마에 가로 주름, 미간에 세로 주름이 평소의 2배는 잡히고, 심박수도 1.5배는 증가한다. 아아, 난 정말 이런 거 싫은데... 180여 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결국 참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렸다. 책 읽기 전에 먹은 과일이 역류할 것 같았다. 아, 일단 자야겠다, 싶어 바로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제길, 꿈에서 내가 난자당하고 있더라. 땀 삐질삐질 흘리며 잠에서 깨고나니, 잠든지 고작 4시간 밖에 안 된 시각. 기분이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시작했으니까 마저 읽어야지, 싶어 눈 뜨자마자 책 펼쳐서 눈에 바짝 힘주고 읽었다. 약간의 면역력이 생겨서인지, 아니면 잔인한 묘사 부분이 다 지나가서인지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 그때부터는 좀 더 차분하게 작품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이 얼마 안 남았을 무렵, 이미 범인을 다 알고 있는데도 긴장감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결말이란 도대체 뭐지? 다시 심박수가 증가한다. 두근두근.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정말 홍보문구 그대로 '단 하나의 문장'에 K.O패 당했다. 헉, 이 아니라 꺄악 소리를 질렀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한치의 과장도 없이 정말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리고 끔직했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엽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결과에 이를 수 밖에 없던 미노루의 심리상태가 조각조각 맞춰지듯 들여다 보여서. 그제서야 살육에 이르는 병의 의미가 와 닿아서. 그리고 그 상황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눈 앞에 보여서. 정말로 꺄악- 소리를 지르며 마지막 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그리고 지나온 내용을 스르르 들춰보는 내 모습. 하아, 이런거였어.

반전에 대한 놀라움이 가시자, 머리가 아파왔다. 아버지 역할의 부재,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황폐해진 가정 뭐 이런 것들에 대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휙휙 떠올랐다 사라진다. 굳이 이 책이 아니라도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한 문제다. 그런 것과 관련해 이런 끔찍한 범죄가 벌어진다고 생각하니 으스스, 소름이 돋는다. 사랑 결핍으로 빚어지는 결과는 언제나 가슴 아프고 끔찍하다. 아, 답답하다. 언제고 한번쯤은 머리 맞대고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문제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래도 내게는 힘든 소설이었나보다. 가슴 따뜻한 인간미 넘치는 소설로 위로받고 싶다. 당분간 추리 소설은 금지. 이 소설의 여파가 좀 사라질때쯤 다시 읽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여러모로 충격적인 소설이 맞긴 맞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