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의 귀향 - 캐럿북스 1
이선미 지음 / 시공사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사실은 책이 나오자마자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뭐에 그리 바빴는지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그 기회를 날려버렸고, 시간은 2년(아니 3년이 다 돼 간다)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 사이에 이 책은 품절을 지나 절판의 단계에 이르러 웬만한 서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고, 뒷북치기의 명수인 나는 그제서야 '아아, 읽고 싶어!!!!'라고 발버둥 치며 헌책방을 뒤지게 되었다는 얘기. 다행히 책과의 인연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는지 새 책과 같은 상태는 아니어도 괜찮은 중고책으로 어렵지 않게 구했고, 며칠 전에 받아서 얼른 읽어버렸다. 그저 읽는 것 뿐이라면 대여점이나 도서관을 이용해도 충분히 읽을 수는 있었지만, 이 책은 왠지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로맨스나 판타지, 무협 소설 같은 특정 장르는 취향을 많이 타기 때문에 내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면 함부로 사지 않는 법인데, 이상하게 이 책은 사서 읽고 싶더라. 아무래도 주위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재미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가보다.

원래 '재미있다' 내지는 '괜찮다'는 말을 많이 들은 소설(혹은 영화)을 보면 기대에 미치기 보다는 실망감이 클 소지가 많은데, 이 책은 그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었다. 정말로 재미있었다. 읽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웃음이 실실 새어나와 급기야는 방에서 뒹구뒹굴, 깔깔거리면서 봤고 그러다가 마지막 클라이 막스 부분에는 훌쩍훌쩍, 콧물까지 흘려가며 울었다. 물론 로맨스 소설 답게 순간순간,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제목에 '모던걸'이라는 말을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책의 시대적 배경은 한창 개화의 붐이 일던 시기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미국에 입양되어 갔던 한 근영이(문.근.영이 아님;)가 부모의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급속한 개화의 바람이 들이닥치기 직전의 농촌이 공간적 배경이 된다. 그저 소문으로만 듣던, 이른바 '신여성'이라 불리는 근영이가 나타나자 동네사람들은 별세계 사람이 온 것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까지 저고리에 한복 치마 두르는 게 의복의 전부인 줄 아는 아낙네들의 눈에 예쁜 레이스 블라우스에 발목을 드러내는 짧은 치마를 입은 근영이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것이다. 근영을 데리고 온 규학이라는 총각은 그 농촌의 지주쯤 되는 심참봉 댁 둘째 아들로, 서울로 유학가 있던 참에 근영을 만나 이러저러한 사정을 듣고 '아, 거기 우리 고향인데? 한번 가보실래요?' 해서 근영을 데리고 온 것이지만 사실 감춰둔 속 마음은 따로 있다. 근영이가 마음에 든 규학은 이런 기회를 발판 삼아 자연스럽게 근영을 부모님께 소개하고 또 다른 기회를 엿봐 그녀에게 프러포즈 한 뒤 색시로 맞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만사 계획한 대로만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누. 근영은 규학이 생각한 그런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다.

규학이 한창 미래의 단꿈에 빠져 있을 때, 근영은 예상치도 않은 곳에서 한 남자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저 급하게 변소를 찾아 안채 뒤꼍으로 들어가는 길에 오른쪽 곳간에서 허연 김이 새어나오는 게 이상하여 그 문을 열었을 뿐인데 거기에 사람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게다가 하필 남자는 벌거벗은 몸으로 목욕중이었다. 어이쿠, 첫 만남이 얄궂기도 하여라. 알고보니 그 남자는 규학의 형님 되시는 '규용'이란다. 이 무슨 신의 장난일꼬.(///) 원래 첫만남이 앞으로의 인간 관계의 반 이상을 좌지우지 하는 법이다. 통성명도 하기 전에 제 몸부터 보여줬으니 규용으로서는 낯 뜨거운 일이고, 그건 얼떨결에 장가도 안 간 총각 나신을 훔쳐 본 근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관계는 항상 티격태격. 아니지, 정확히 하자면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얘기하는 근영의 말에 아예 대꾸를 안 하거나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짧은 말로 맞받아치는 규용이다. 규용의 눈에는 조신한 여느 처자와 달리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얘기하는 근영이 탐탁치 않고, 근영은 자기가 원해서 본 것도 아닌데 첫만남 때문에 규용이 자신을 싫어한다 생각하여 속상하다.

그러나 '미운정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거의 모든 로맨스의 법칙 중 하나가 '티격태격 하다 정 들어서 죽고 못사네 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 점차 사랑에 빠져가는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그게 너무 예뻐서 내가 다 기분이 좋다. 사실 소설 내용에 따르자면 근영이 그냥 미인이 아니잖아? 게다가 어떻게 하면 남자에게 더 예쁘게 보이는지 잘 아는 새침데기인데, 아무리 목석 같은 남자라도 안 넘어가고 못 배기지. 마찬가지로 내가 봐도 규용이 멋있다. 그저 무뚝뚝하기만 한 남자가 아니라고.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매일매일 부딪히는데, 당연히 사랑의 불꽃이 튀겠지. >_<

[모던걸의 귀향]은 물론 로맨스 소설로서 아주 괜찮은, 기분좋은 책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것만으로 별 다섯개를 준 것은 아니다. 로맨스 외에도 큰 줄거리가 되는 '근영 부(父)의 행방 찾기'에 관한 이야기도 제법 좋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근영 모(母), 금달래에 관한 이야기와 '그녀의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에 관한 추적은 로맨스가 아니라도 시선을 끈다. 인심 좋은 시골 사람입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라서 제 잇속 차릴 줄도 알고 교활하진 않지만 머리속으로 이해관계를 따질 줄도 안다.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 일단락 되면서, 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 또한 참으로 그들다워서 처음에 '못됐다' 생각 했으면서도 어느새 측은한 마음이 생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소박한 농촌의 모습과 개화기의 분위기와 어울려 이야기에 잘 녹아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 다른 감동을 준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이다.

작가가 이 소설 쓰면서 꽤 많이 공을 들였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사투리며 옛말, 개화기의 분위기라든지 농촌 모습, 머리며 복장 등 조사도 많이 했겠고, 무엇보다 흔한 플롯으로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드느라 고생깨나 했겠다,싶다. 사실 줄거리만 보자면 전혀 땡기지 않는 게 이 소설이다. '출생의 비밀'이라든지 '미운정이 고운정 되는 커플 이야기'는 드라마에서 신물나게 봐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읽고 나서 '정말 재밌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아아, 요고요고 딱 4부작 짜리 특집 드라마 만들면 진짜 재미있을 것 같은데.(물론 더 길어도 상관없다) 기승전결 뚜렷하고, 트렌디 드라마에 뒤지지 않을 사랑 얘기에, 전원일기 버금가는 소박함과 단란함, 에피소드까지 갖췄는데 말야. 누구 눈독 들이는 PD님들 없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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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시대인지라 '~하오'체를 구사하는 규용과 '~여요'체를 구사하는 근영이 커플 귀여워 죽겠다. ♡♡♡
소설 읽으면서 막 따라해봤는데, 아오~ 간질간질한 게 닭살 돋아 추울 지경이다. (-_-;;;)(>_<)(///)
그러면서 로맨스는 또 어찌나 뜨겁게 하시는지...
'사랑한다고 말해주셔요' 한다고, 대번에
'사랑하오. 매일매일‥‥‥조금씩‥‥‥조금씩 더 사랑하오' 라고 말할 수 있는 남자가 어디 흔한가 말이지.


...그러고보니 이 소설 염장소설이었군아!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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