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라하의 소녀시대 ㅣ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흔히 삶보다 더 극적인 드라마는 없다고 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건, 예상할 수 없는 전개, 끝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없는 긴 이야기. 그것이 삶이다. 아무리 흥미로운 설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한들, 그 모든 것은 삶에서 한번쯤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들이고, 그렇게 때문에 모든 허구적인 이야기는 인생의 한 단면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물론 SF, 판타지, 무협 등의 장르는 예외.)
책 중반까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일거라고 멋대로 착각한 내가 나중에서야 책 표지 상단 -제목 윗부분- 에 씌여진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수상작'이라는 글자를 발견했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헉! 이거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 한 픽션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 그 자체였어?'
'역시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이구나.'
책을 읽기 전에는 항상 표지의 그림이랑 글을 대충 훑어보고 읽는 편인데, 왜 그 글자는 발견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이거 혹시 무의식의 선택적 수용인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읽고 싶은 글자만 읽는 뭐 그런거...;;; 암튼, 내가 이 책이 (당연히) 소설일 거라고 착각한 것은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라니...제목만 보면 '프라하에 사는 소녀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성장소설'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아니라고? 이런….
요네하라 마리의 '자전적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소녀들을 통해 그린 동유럽 현대사'라는 소갯말을 달고 있다. 이 한줄의 소개글에 이 책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시절, 그래도 아직은 사전적 의미의 공산(共産)주의가 제 모습을 잃지 않던 시절의 프라하에서 5년을 보낸 마리에게는 수년의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세 명의 친구가 존재하는데, 그 이름은 리차, 아냐, 야스나이다.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그 세 명의 친구와 얽힌 추억 및 현재의 그들을 찾으며 겪는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
1960년대 초,중반을 프라하에서 보낸 저자의 추억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추억담을 고스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결부된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50여 개국 아이들이 다녔던 소비에트 학교의 학생 수 만큼이나 다양한 역사와 이념, 사상은 가끔 그들 사이의 장벽이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 속에서 키운 그들의 우정은 코가 시큰해 질 만큼 아리다. 유쾌하면서도 눈물나게 애틋한 소녀들의 우정담과 격동의 시대를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는 에피소드, 친구 찾기를 위한 여정이 스릴감있게 전개되는 이 책은, 논픽션이 주는 생생함과 작가의 범상치 않은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픽션만 아닐 뿐이지, 오히려 픽션 보다 더 드라마틱한 소녀들의 일대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 기억속의 소녀들이 역사의 흐름속에서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마리의 여정은 기쁨과 환희도 있었지만, 그 속에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친구들의 인생에 대한 알 수 없는 씁쓸함과 아쉬움도 존재한다. 그 알 수 없는 감정들을 헤아리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가 아닌가 싶다.
책을 덮고 난 다음에 밀려드는 생각들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무거운 것은 실로 오랜만인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수록 글로 제대로 정리가 안되는 건 도대체 무슨 병일까? 이렇게 가벼운; 리뷰로 끝내도 좋을 만한 책이 아닌데…. 머리 속에 가득 들어찬 생각들을 이 정도 밖에 꺼내보이지 못하는 내가 밉다.
...그래도 이때의 내셔널리즘 체험은 내게 이런 걸 가르쳐주었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나라 사람을 접하고서야 사람은 자기를 자기답게 하고, 타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 자신과 관련된 조상, 문화를 이끈 자연조건, 그밖에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갑자기 친근감을 품게 된다고. 이것은 식욕이나 성욕과도 같은 줄에 세울 만한, 일종의 자기보전 본능이랄까 자기긍정 본능이 아닐까. (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