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에 Historie 1
이와키 히토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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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대 그리스적 인간들에 대한 몽상, 헬레니즘 문명에 대한 매혹은 전 세계적으로 유난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만화는 양날의 도끼처럼 이면을 파헤친다. 노예제도와 끔찍한 고문과 살육이 난무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명이란 대지에 피를 뿌려 이루어 낸 것일까. 저자는 그 틈새를 비집는다.

첫장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노예제의 필요성을 설할 뿐아니라, 자신을 구해 준 에우메네스의 은덕을 허허로운 웃음으로 배신한다. 초반부터 저자의 시선은 다소 삐딱하다. 여담인데, 스파르타에서는 약하거나 기형인 아기가 태어나면 절벽에서 던져 버렸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워낙에 마초이즘을 숭상한 동네로 유명하다만, 그 만큼 그 시대가 살벌했으므로 약한 육체로 살아가기가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관습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관습에 찬동했다고 한다(『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참조).

주인공 에우메네스는 칼데아-페르시아(터키)와 마주보는 도시로서 옛 바빌로니아-출신 귀족이다. 트로이 유적지에서 배와 노를 만들어 해협을 건너 고향 칼데아로 간다. 칼데아는 마케도니아의 장창부대에 포위되어 있고, 필리포스 2세로 보이는 남자와 알렉산드로스로 추정되는 젊은 지휘관과 우연히 조우한다. 폐허가 된 옛집터에서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천병희 번역본이 있다)를 발견하며 옛 상념에 잠긴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심하게 훼손되어서 알아보기 힘들다. 에우메네스의 유년 시절 꿈도 그러하다.

스키타이족 여인이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단신으로 싸우는데, 마치 춤추는 것 같은 몸놀림으로 가뿐하게 남자들을 죽이다가, 꿈속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멈춰 버리고, 그 틈에 남자들에게 도륙 당하고, 남자들에게 강간 당하며 온몸이 찢긴다. 에우메네스는 가까이 다가가서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 보지만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궁금증과 슬픔이 너무도 아련하게 꿈속에서 뒤섞여, 에우메네스는 자면서 눈물을 흘린다.

에우메네스는 칼데아의 유력가문 히에로니무스가의 차남이다. 히에로니무스의 부하들은 곧잘 노예사냥을 하며, 유목민이나 야생의 민족들을 끔찍하게 살해하거나 강간한다. 히에로니무스의 저택은 아름다운 그리스풍의 건물이며, 정원에는 꽃이 피어 있고 애완동물이 뛰논다. 아들들은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부인은 예쁘다. 그런 와중에 한 노예상인이 스키타이 노예를 혹심하게 다룬다. 이 만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줄곧 극단의 이미지가 교차한다. 도서실에서 수많은 파피루스 문헌을 섭렵한 어린 에우메네스는 이미 헤로토토스의 『역사』도 통독했을 뿐더러, 호메로스와 에우리피데스, 크세노폰의 저서들도 읽은 독서가다. 스키타이 민족의 일화와 습성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 주는데, 그것은 예언처럼 실현된다(잔인성과 복수).

에우메네스의 형은 늘 동생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우연히 권투 시합을 하게 된다. 1권의 모든 줄거리다. 이건 만화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라는 생각은 않는다. 직접 봐야 그 잔혹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존하는 헬레니즘 문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번역된 문헌은-제대로 읽고 싶은 마음에 뒤져보면-얼마 안 된다. 알렉산더의 서기관이었다는 에우메네스의 궁정일지도 물론 번역본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고대어를 배워서 직접 읽고프다. 주인공인 에우메네스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도 다뤄지는 인물이라는데, 나로선 아직 안 읽어 정보가 없다. 『헬레니즘 세계』라는 책에 따르면 히에로뉴모스는 에우메네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밑에 있던 인물이라고 한다. 에우메네스 사후 통솔권을 쥔 인물이라고. 그리고 에우메네스의 기록이 만화의 결정적 순간에 간간이 나레이션처럼 고딕체 글씨로 등장하는데, 잔존하는 『궁정일지』는 극히 단편이어서 만화의 궁정일지는 작가의 창작인 듯하다. 이로 유추하건대, 작가는 『창천항로』와 비슷한 방식을 취하는 듯하다. 작가의 전작 『기생수』를 중학생 시절 봤던 지라 기억이 희박하지만서도, 무척 디스토피아적인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근래, 서양 고대 신화/문명에 대한 재독해가 부쩍 성황이다. 그런 반면에서 움트는 이 만화-타 장르의 예술은 고대 그리스를 예찬했을 뿐이지만, 상대적으로 멸시 받는 장르이므로 더욱 강렬한 예술-의 삐딱한 전개를 쌍수 들고 환영한다. 덕분에 헌책방에서 헐값에 사 놓고 책장 깊숙이 봉인해 둔 헤로도토스의-본 만화책과 동명인-『역사』를 야금야금 읽고 있다. 왜 이제야 읽나 싶게 황홀한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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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모험 2005-07-0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에서는 흥미의 수위가 높아져서 더욱 즐거워졌답니다. 스키타이 민족을 비롯한 역사적 배경에 살을 잘 붙인 작가와 만화가 이와아키 히토시의 환상적이면서도 체감도가 확실히 높은 그 특유의 재미가 잘 살아 있어서 말이죠. 더구나 『바우돌리노』가 연상되는 전개방식이나 기타 요소들 때문에 더욱 흥분상태가 되고 말았죠. 여담이지만 2권 표지도 정말 원츄~!였답니다. 님글 덕에 저도 헤로도토스를 접할 행운을 잡았네요. 감사합니다.

쎈연필 2005-07-09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덕분에 책장에 모셔 둔 바우돌리노를 읽게 되겠군요. 감사감사.
이 만화 제목이 불한당들의 히스토리에여도 괜찮을 듯합니다(물론 농담^-^).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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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는 1914년생이고, 가토 슈이치는 1919년 생이다. 이 책은 가토가 질문하고 마루야마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된 대담집이다. 1996년 마루야마가 고인이 되면서 대담도 멈췄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결론을 맺지 않고 무뚝 끝난다. 팔순에 이른 노대가들의 박식을 따라가자면 자주 아찔해지다가도, 기품이 흐르는 여유와 농담 덕분에 읽기의 즐거움을 다분히 맛볼 수 있다. 

일제 시대 소설가들, 예컨대 이상 박태원 등의 작품을 읽으면 쓸데없이 서구 작가나 소설들의 이름이 표피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일본 메이지 이후 소설가들의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문화 콤플렉스다(소세키의 일련 소설들이나, 모리 오가이의 『청년』,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등). 일본 식자들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키워드는 언어의 소통, 즉 번역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던 바, 일본 19세기 말은 번역의 홍수였다. 얼마나 많이 번역되는지, 번역서를 읽는 길잡이 역할을 한 『역서독법譯書讀法』(1883년)이란 책도 출간되었는데, 그 책에 따르면  "역서 출판이 성황을 이루어 그 권수가 몇 만"(57p)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일본 입장에서) 선각자인 오규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31p)고 기존의 인식을 뒤엎는 선언을 했는데, 지금식으로 말하면 비교언어학적 시각이랄 수 있다. "일본인이 전통적 한문 독법으로 중국 고전을 숙지하고, 거기다 자신과는 이질적인 것을 번역문으로 읽고 있는 거라고 자각하기만 한다면, 비교라는 방법·의식에 의해서 본가·원조인 중국인보다도 더 깊이 알 수 있다"(31p)는 뜻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중화사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 중국어뿐만 아니라, 유럽 등 다언어가 존재하고 그런 만큼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을 오규 소라이는 의식했다는 뜻이다. 그 당시에 인간의 언어가 여러 개라는 사실을 인식한 건 "의식혁명"(37p)이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진단한다. 

일본이 번역에 주력한 것은 역사를 중시한 유교적 관습이 강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유교는 가계/족보를 중시한다).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경(經), 자(子), 사(史), 집(集) 순으로 가치를 두었다. 天이라고 하는, 역사를 초월한 궁극적/영원한 것에 대한 탐구심이 강했다는 뜻인데, 인도도 마찬가지다. 인도는 훨씬 초역사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어서 형이상학이 발달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에서 경전을 수입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를 알아야만 했고, 서구 문헌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역사서 번역을 주력했다. 때문에 "실증주의는 아주 발달하지만, 형이상학적이랄까, 곧 근본적(fundamental)이랄까, 역사를 초월해서 진정한 것이랄까 그런 데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고 생각돼요. 없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이겠지만,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거지요."(72p) 이른 바 <눈치>가 대단히 발달했다고 보면 된다. 시대가 바뀌면 부화뇌동하고, 대중적 히트 잘 치는 문화상품을 생산해 내는 일본인의 특성이 바로 이러한 근본의식의 엷음(혹은 시대적 감각)과 관련한 건 아닐는지. 그렇다고 역사의식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오규 소라이는 역사야 말로 궁극적인 학문이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지성들이 난관에 봉착하면 옛 그리스-로마를 소환하듯이, 일본의 규범은 중국이라는 것. 일본인은 『논어』『맹자』보다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서를 애독했다는 게 그 예다. 

번역을 한 주역은 선교사들이었다. 1. 우선 외국인 교사가 원작의 대략적인 번역을 원어민에게 구두로 말해 주면, 2. 원어민이 그것을 적합한 모국어로 바꾸고 3. 이 번역문을 외국인이 원작과 비교하여 그 타당성을 검토한 후 4. 최종적으로 원어민이 문장을 다시 손질하여 완성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205p)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의 교육』에서 '영어를 국어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야마토 말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야마토 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차라리 영어를 국어로 채용하자"(50p)였는데, 이는 우리 나라의 복씨와 비슷한 논리다. 그에 대해 바바 다쓰이는 인도를 예로 들어,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번역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여파가 급진적일 수 있다는 지적도 흥미롭다. "그 지적이 틀렸다고만 할 수 없는 예가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사회정학』(社會靜學 Social Statics)이지요. 마쓰시마 쓰요시(1854~1940)가 『사회평권론』(社會平權論)이라 번역했는데, 이 번역은 좀 이상합니다. statics란 표현은 dynamics와 반대되는 말로서 '정태학'(情態學)이라는 의미인데 '평권론'이라고 번역해 놓으면 마치 '평등주의'인 양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래서 스펜서의 Social Statics는 자유민권운동가의 성전(聖典)이 되어 버린 겁니다."(54p) 우스개 소리를 하자면, 이는 책을 읽고 리뷰를 쓸 데도 해당된다. (이 리뷰도 급진적일 수 있다) 중요한 번역어는 민권이다. 가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민권'(民權)이라는 조어에 대해서는 단수와 복수의 문제를 얘기할 때에도 나왔습니다만, 프랑스어 droit civil의 번역으로서는 역시 미쓰쿠리가 1887년의 연설에서 자신의 조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民)에게 권력(權)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논의가 일어 비난을 받았다고 하지만 말입니다."(103)

일본에서 번역한 조어들이 우리 나라에서도 그대로 쓰인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슌다이는 『경제록』에서 물질적인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당시까지 패러다임이던 '도리'의 대립으로 '물리'라는 조어를 내세웠는데, 이는 physics의 번역어다. 그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한 니시 아마네는, philosophy를 희철학(希哲學)이라고 번역했다. 니시 아마네가 희랍어/라틴어에 좀 더 해박했더라면, 철학이라는 딱딱한 어휘보다는 훨씬 적절한 조어를 오늘 날에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지혜(sopia)에 대한 우애(phila)를, 철학이라고 해 버리면 뭔가 단절된 듯한 어감이 든다.  

저자들은 번역 뿐아니라, 종횡무진으로 역사, 관습 등을 논한다. "일본의 정서는 여전히 어르신의 재판입니다. 아직도 이상적인 재판이 오오카 재판의 이미지예요. 윗사람이 동시에 중재자인 셈이죠. 따라서 영미법에 비하면 어르신 재판적인 요소가 있는 대륙법이 더 체질에 맞는 거죠. 영미법은 철저하게 게임의 공정한 심판이라는 사고방식이고요."(133) 이러한 권선징악의 영웅적 이미지는 정치가에 대한 서민들의 희망이 투영된 허상이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당시의 일본인들은 주자학적 원소, 즉 음양오행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 다윈의 진화론, 세계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달턴의 원자설이 유입되면서 세계관이 변하게 되었다.

"한국의 근대는 서구, 중국, 일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triple-translated modernity)라고 할 수 있다."(225p) 우리 나라의 근대는 번역된 것일 뿐아니라, 삼중 번역이란다. 우리 나라의 유구한 전통은 중국의 한자와 함께 했고, 일제 때는 강제로 그 언어와 문화가 이식되었고, 현재는 시대적 패러다임인지 영어 세례가 한창이다. 시기상으로 우리 나라가 근대화 과정에 든 것은 일제 때부터니, 우리 근대를 근원부터 알려면 선행적으로 일본의 근대를 살펴서 참고하는 게 한 방편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찬동하게 되는 셈인가?)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에 대한 긴 대담은 자국의 문화자립을 위한 고찰이다. 그 고찰 속에는 심지어 반성, 회한도 있다. 두 지성은 일본 번역과 근대를 논했지만,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 나라의 상황과도 연관지어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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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비용
아룬다티 로이 지음, 최인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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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쩐 일인지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황보석 옮김)은 품절이다. 이 책 『생존의 비용』에는 「공공의 더 큰 이익」과 「상상력의 종말」 두 개의 글이 실렸다. 셋 다 제목 참 기똥차게 잘 지었다. 발표순으로 상상력의 종말이 먼저인데, 이 책에는 뒤에 실렸다(우리 나라 편집자는 대체 왜 그랬을까?). 뒤에 실린 상상력의 종말부터 먼저 읽기를 권한다. 왜냐면 공공의 더 큰 이익을 읽는 도중에 "내가 전에 쓴 상상력의 종말에서는…" 이런 식의 인용이 몇 번 나오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종말은 핵폭탄에 관한 글이다(역자에 따르면 정치평론이라나. 그다지 평론스러운 것 같지는 않다). 인도 정부는 카슈미르 지역 분쟁을 빌미로 1998년 핵실험을 했다. 카슈미르 지역은 현재 인도의 영토인데, 인도, 중국, 파키스탄의 국경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들이다. 그런 이유로 힌두가 국교인 인도와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파키스탄은 카슈미르에서 영토+종교 분쟁 중이다. 인도에 뒤이어 파키스탄도 질세라 핵실험을 했다. 로이의 글에 따르면, 인도 국방부장관은 "우리 것이 더 크고 강하다"고 국민들에게 말했다고. 마침 신문 헤드라인에는 핵폭탄과 비아그라가 뒤섞여 있었는데, 로이는 장관의 말이 어느 것을 지칭하는지 헷갈렸단다.

인도 정부는 핵폭탄과 평화를 같은 선상에서 언급한다. 우리를 무시하지 못한다, 는 것. 그래서 두 나라는 서로 핵폭탄을 갖고서, 종래의 재래식 전쟁처럼 총구를 마주하는 게 아니라, 서로 더 도발하지 않으면서 긴장에 긴장만을 거듭한다. 분쟁이 줄었으니 더 나은 걸까? 한 방이면 모든 게 화염에 휩싸일 건데. 그런 공포 속에 나날을 살아가는 게 과연 평화로운 걸까? 서구문화라며 코카콜라를 하수구에 처넣은 인도의 청년들은 주체적인 힘을 얻었다며 핵폭탄을 찬양했단다. 핵폭탄은 과연 인도 고유의 발명품인가? 핵이며 폭탄들을 거부하지는 않으면서, 서구의 소설, 영화, 미술, 음악을 무던히도 거부한다. 이 무슨 억울한 코미디일까. 이런 희비극은 지도자들의 모든 걸 쓸어버릴만한 핵폭탄과도 맞먹을 무식과 관련하고, 그건 곧 상상력의 종말을 뜻한다. 핵을 앞세우는 한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공공의 더 큰 이익은 나르마다 강에 댐건설문제에 관한 정치평론이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목 하에 무수한 개개인들이 희생당한다. 수 만 명이 댐 건설로 인해 고향을 잃고 이주민 신세가 돼야 한다. 댐을 건설하면 물과 전력이 풍족해질 거라는데, 실상은 그와는 반대다. 인도 정부는 수 십여 차례의 댐 건설 후, 조사를 단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로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건설비용의 몇 배나 되는 빚을 세계은행에 지게 되었고, 수자원은 전혀 득을 보지 못했으며, 댐 관리를 제대로 못해 드는 피해가 막심하다고 한다. 생태계는 파괴되며, 이주민들이 많아져서 (가뜩이나 인구밀도도 심각한 판국에) 빈민들이 양산되는데, 정부는 근거 없는 이득을 빌미로 자꾸만 댐을 만든다. 왜 이렇게 댐을 만드는지, 지배계층의 멘탈리티를 파헤쳐보니, 1960년대에 네루가 댐 건설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했던 연설 때문이라고. 그러나 네루는 생전에 댐을 긍정했던 그 연설을 후회했다고 한다. 로이도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조사까지 했을까. 댐 건설 후 조사 한 번 안했다는 건 정부가 그토록 무책임하다는 증거다. 게다가 건설 전에 근거 없는 이익 예상은 대체 누가 다 하는 걸까. 그런 예상은 말짱 허구다. 나토가 공습하던 베오그라드의 동물원에서는 호랑이가 제 살을 뜯어먹었다고 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무수한 개인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정책은, 제 살 씹어 먹기에 다름 아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다반사다. 얼마 전에는 천성산 관통터널공사 문제로 한 개인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그런 일이 없도록 개인, 개인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공공의 더 큰 이익이라는, 리바이어던 같은 괴물은 대체 언제쯤 사라질까.   

덧붙임. 로이의 문장은 어떤 경우에 불필요하게 감정적이 되거나, 유치할 정도로 과장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로이 자신은 그것을 잘 알고, 부러 끝까지 밀어붙인다. 독자는 충분히 이해해 줘야 한다. 그만큼 격하게 감정을 쏟고 물고 늘어져도 부족할만치, 부당함과 싸움을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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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2-2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는 충분히 이해해줘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니, 매우 흥미롭습니다. ^^
 
열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용기 옮김 / 책사랑(도서출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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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엄청난 흡인력의 이 소설을 단숨에 읽고 몸서리가 쳐져서 시골방 책장 어느 귀퉁이에 봉인하고는, 그 책 대신 다른 책을 가방의 빈 자리에 채워 넣어 귀경했다. 이토록 처절하고도 철저하게 인간의 양심을 불신할 수 있을까.

남편은 한결같은 일상의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일기를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쓴다. 부인과의 성생활을 일기에 노골적으로 쓰고, 또 그 성생활에 자극을 주기 위해, 사위가 될 사람을 이용한다. 일기를 통해. 그 일기장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감춰두지만, 부인의 성품으로 보아 어떻게든 자신의 일기를 훔쳐보리란 것을 안다. 그리고, 훔쳐봤으면서도 모른 척 하리란 것을 안다. 어느 날부턴가는 부인도 일기를 쓴다. 일기로 일기에 대항한다. (어떻게 이런 기상천외한 발상이 가능할까! 그러나 그 형식이 일기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글과 글의 대결이란 다반사다. 다만 다른 점은, 비공개된 대결이란 점이다) 남편은 부인이 자신의 일기를 훔쳐봤을까를 의심하며, 점점 더 대담하게 일기를 쓰고, 부인은 남편이 자신의 일기장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예상하고 남편의 일기처럼, 노골적이고 대담하게 쓴다.

그들이 탐닉하는 것은 주로 성생활이다. 그들의 일상에는 오롯이 성생활만 남고, 그것에 대한 치열한 과정만 부각된다. 그리고 작가는 대가다운 솜씨로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한다. 그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나는 이 작가가 대중소설가 아닌가? 당찮은 의심을 했다. 이를 테면, 대중소설기법을 도용한 순수소설이라고 할까. 게다가 뒤로 갈수록 추리적인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전장을 종횡하는 모사들 간의 계략싸움도 아니고, 무한경쟁시대의 정보전도 아니라, 그저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다. 때문에 독자에겐 더욱 지독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더 강한 자극을 바라는 남편의 일기대로, 부인과 사위는 간통을 하게 되는데, 남편은 옹졸하게도, 최후의 선(?)을 부인이 넘었을까 (그것만 안 하면 순결하다나 뭐라나) 고민하고 부인은 지독히 보수적이기 때문에 그것만은 하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믿고 싶어한다). 부인은 부인대로 일기에, 최후의 선은 넘지 않았고, 갖은 방식으로 최고의 쾌락을 희구하고 있다고 쓴다.

어느 날엔가 남편이 일기장에 표시한 흔적에 변화가 왔고, 남편은 부인이 자신의 일기장을 훔쳐본다고 확신한다. 남편은 부인이 일기를 쓰는 것을 알지만, 자신은 절대로 훔쳐보지 않는다고 일기장에다 쓴다. 부인도 자신의 일기장을 누군가 손 댄 흔적을 발견한다. 남편이 자신의 일기장을 훔쳐본다는 걸 확신한다. 그러나 자신은 남편의 일기장을 훔쳐보지 않는다고 신에게 맹세한다.

남편은 부인과의 과한 성생활 때문에 쓰러지게 된다. 거의 식물인간이 되고, 부인은 계속 일기를 쓴다. "11시, 정원에서 인기척이 났다"는 문장이 거의 매일을 도배하다시피 한다. 그 인기척은 사위의 그것이다. 부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딸이 자신의 일기장을 남편에게 읽어 주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리고 그것을 일기에 쓴다. 이 소설은,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기형식으로 되어 있다. (샨샤의 소설 <바둑 두는 여자>처럼 번갈아 가다가, 뒤로 갈수록 부인의 일기가 많아지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부인이 두 일기장을 정리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처럼, 독자로서는 뭐가 뭔지 헛갈린다.

남편은 죽는다. 그 후 부인이 남편의 일기장을 참조하여 해명하는 방식으로 일기를 쓴다. 부인은 신에게 맹세한다고 일기에 썼었지만,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의 일기를 훔쳐보았다. 일기에는 사위와 최후의 그것은 안했다고 썼지만, 실은 진작에 했다. 그것을 속이기 위해 그날 일기를 부러 길게 썼다. 이제 자신이 의심스러운 건, 사위와 딸이다.

일기는 말그대로 하루의 기록이다. 그런 일기에 언제부터, 비밀이란 것이 옵션으로 섞이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겪은 것을 언어로 옮길 때, 이미 최소한의 주관성이 첨가되고, 그 자체로 리얼리티는 줄어든다. 모든 일기는, 씌어지는 바,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전제한다는 (김현의 일기에 덧붙인 이인성의 글) 통찰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일기의 암묵적 특이성을 통해 한 남자는 파멸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이용해, 독자를 진저리치게 한다.

p.s 저자의 초기작 <문신>에도 발에 대해 에로틱하게 접근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소설의 남편도 부인의 발에 유난히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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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바그너의 경우.니체 대 바그너 니체전집 1
프리드리히 니체 / 청하 / 198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구별해 보자. 아폴론은 태양신이다. 영생, 남성적, 정의, 체계, 질서, 바름, 명백, 이성, 예술, 오르페우스, 현악기, 낮, 빛, 주류 등등이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쾌락의 신. 부활, 여성적, 죽음, 혼돈, 모호, 비의, 자연, 예술, 마르시아스, 판악기, 달, 광기, 어둠, 악, 비주류, 도취 등등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상반되는 두 가지 개념을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니체는 동양의 음/양설과 비슷한 논지를 제시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대립하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인간은 소우주다. 아폴론/디오니소스는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한다. 대극; 서로 대립하면서 보충하는 관계, 한쪽이 사라지면 나머지 한쪽도 사라진다. 동어반복하자면, 공생이다. 동양화를 예로 들자면, 사군자/산수 등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여백에 의해 그것들은 기품을 얻는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적인 것을 공격한다. 예술의 가장 고상한 적, 소크라테스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놓치고 아폴론적인 것을 고착시켰다는 뜻이다. 아폴론의 신화를 살펴 보자. 아폴론은 왕뱀 피톤을 제압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신전을 세운다. 피톤의 딸인 피튀아를 신전의 사제로 삼는다. 이것은 자연을 지배한 인간, 토착 신화를 모조리 올림푸스 신화로 통합했다는 상징이며,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을 지배했다는 상징이다. 현대 문명은 아폴론적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억압되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어마어마한 폭발력이 잠재된 무서운 문명이다. 니체가 찬양한 그리스적 정신이란, 아폴론/디오니소스의 조화다. 우리는 아폴론적인 것이 너무나 강한 시대에 태어났으므로, 니체의 책을 읽으면 거부감이 심하게 드는 게 당연하다.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상상적 사실은, 연극의 기원에 있다. 무수한 연극개론, 연극사 서적을 뒤적여 보면, 연극은 디오니소스제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헌데 그 이상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책이 없다. 어떤 책에서는 <시학> 이후 연극에 대한 최고의 책이 <비극의 탄생>이라고 하는데, 다른 책에서는 언급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나? 읽어봐야 알 수 있다. 광기에 대한 가장 통찰력 있는 책인 동시에, 연극의 기원에 대한 가장 상상적이며 흥미로운 책이다.  

디오니소스는 갈가리 찢겨 죽었다가, 부활한 신이다. 포도주는 포도를 모조리 박살(?)낸 후에야 만들어진다. 포도주를 마시면 취한다. 취하면 혼란스럽다. 만취하면 광기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광기란, 미친 것이 아니라, 과도한 열정이다. 예술이란, 카오스를 형상화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라. 그 혼돈을 형상화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예술가다.  

우리는 굴절된 디오니소스적 체험을 종종 경험한다. 예술은 어디서 출발했나. 니체는 예술의 기원을 제의적으로 고찰한다. 예술 정신이란 <부활>이라는 것.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교가 있었다. 그들은 달이 차는 날 이슥한 밤에, 맨발로 산 위로 올라가, 제일 먼저 마주치는 들짐승을 산 채로 찢어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에 취해 단체로 춤을 추며, 신비제의를 했다. 그것이 디오니소스제의다. 그러다가 제정신이 돌아온다. 제정신이란 아폴론적인 것이다. 광기와 이성의 접점에서, 디오니소스제의는 점점 체계를 잡는다. 그래서 단순히 들짐승을 찢어 죽이고 춤추고 난교를 하는 데서부터, 뒤튀람보스, 즉슨 디오니소스 송가로 발전했다. 디오니소스 찬가는 코러스로 발전, 계승되었다. 연극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한 서적을 접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아이스퀼로스 이전의 연극은 배우가 한 명 뿐이었다. 한 명이 가면을 여러 개 바꿔 가며 연극을 했다. 나머지는 코러스들이었다. 아이스퀼로스가 두 명으로 배우를 늘렸으며, 소포클레스는 세 명 이상으로 늘렸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상상력>을 발동시켜 보자. 왜 하필 한 명이었을까? 디오니소스교의 교주가 배우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무당처럼 별지랄발광을 떨었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의 탄생>이다.

현재까지 아테네에 남아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의 사진을 보면, 극장들은 산 속 깊은 곳에 있다. 무대의 뒤편에는 아폴론 신전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통/광기/몰입을 정기적으로 체험하려 비극을 관람했던 것인데, 좀더 원시적인 디오니소스적 카타르시스를 위해, 산 속에 극장을 만든 것이다. 몰입해서 광기를 일으킬까봐, 무대 뒤에는 아폴론 신전을 마련한 것이다. 아폴론 신전이 세워진 바로 뒷동산에 극장을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비극의 탄생>에서 가면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은 왜 가면을 썼을까? 가면, 그 표정은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표정이다. 생의 진면목을 맞닥뜨릴 때의 경악, 오이디푸스의, 오레스테스의, 비극적인 그러나 장엄한 표정. 비극은 자기 앞의 세상과의 불일치에서 생긴다. 신이 벌인 짓거리를 인간이 책임져야 하는 비논리. 그 고통과 마주하는 인간의 고뇌. <차라투스트라>에서 말하는 수직 상승, 도약하는 자란, 불행을 목전에 두고 긍정으로 전환하는 자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비극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파헤쳐,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책임을 질 때, 우리는 장중한 숭고미를 느낀다. 그 비극정신은 해체와 재결합이다. 감정의 찢김과, 승화. 몰락의 드라마. 그 몰락을 넘어서는, 그것이 비극정신이다.

이 책은 니체의 첫 저서다. 스물여섯에 교수가 된 후 갖은 중상모략을 겪었을 그는, 그가 마땅한 자리에 있음을 보이기라도 하듯, 시대를 넘어서는 글을 썼다. 하지만 젊은 혈기로 인해, 문장은 들 떠 있고, 비약적이다. 번역투로 보더라도 그것은 확연하다. 디오니소스적인 글쓰기라서 그런지, 매우 모호하고, 애매하다. 그러므로 상상을 촉발시킨다. 얻어 가는 건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값진 책이다. 덧붙여, 앙토냉 아르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디오니소스적으로 변형시켜, <잔혹극>을 만들었다. 책의 내용은 문청이 읽기에, 상상력의 보고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 별점으로 매길 수 없지만, 매우 난해하게 읽힌다. 철학, 미학 뿐아니라, 연극에 대한 지식도 탁월한 사람이, <비극의 탄생>의 진면목을 잘 살려 주석도 세심하게 붙여서, 이해가 잘 되도록 번역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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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10-31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광화 희곡집. 을 읽어주고 싶구나. 전에 내가 서문만 쳐서 올린 적 있는데. 기억하는지?

5/

연극은 심장에서 머리로 그리고 이제는 눈으로 옮겨 갔다. 나는 머리의 연극도 감각의 연극도 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연극을 가슴으로 되돌리고 싶다. 그 방법론은 신화시대에 숨어 있는 원형에 대한 탐구다.

이 시대의 연극은 브레히트와 사실적 심리주의에 병들어 있다. 그들에 의해 연극을 보면서 이해하고 생각하려 드는 관성이 생겼다. 모든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속이 편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성으로 연극을 감상하는 것이 힘겨워졌다.

혹자는 감각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을 감성적 작업과 혼동한다. 감각적 연극은 우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정과 유리되게 만든다. 감각적 연극의 효과는 쓸쓸함의 확인이다.

원형적 연극은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욕망과 열정을 드러 내고 자극하는 연극이다. 너의 열정이 시키는 대로 터뜨리라. 원형적 연극의 감상에는 논리나 감각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진다. 뛰는 심장의 박력에 온몸을 맡겨야 한다. 그 태도가 감성적 접근이다.



22/ 96. 11. 12.

생의 열정과 강력함을 억누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도덕과 정의의 기만성이다. 이른바 합리적 사고라 하는 진리들의 폐단. 그것들은 연극에 치명적이다.

도덕과 정의를 폐기하면 이 사회의 혼란을 무엇으로 막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이데올로기들이 강화될수록 혼란은 더욱 늘어만 왔었다. 마치, 법조문이 하나 늘어 갈수록 범죄가 늘어 가듯이. 상식과 금기와 권위의 부정어법은 개인에게 니힐리즘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사회를 위하여 개인의 생명력을 희생하였다. 이제는 생이 보상받아야 한다.

니체에 의지하여, 니힐리즘을 이기는 길은 권력(강함)에의 의지다. 역시 니체에 의지하여, 예술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진리로 망가뜨려지지 않기 위해서다. 이 기만의 세상을 희생시키는 길은, 최소한 멸망의 속도를 늦추는 강력한 제어 수단은, 활동적 생명의 힘이다.

연극은 위기라는 절망감의 유행. 무엇보다 연극에서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야 관객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뤄진다. 배우들의 표출하는 강력한 생의 힘으로 관객들을 충격시켜 그들의 억눌린 생명을 해방시킨다. 그것이 연극의 효용이다.


35/

의지 대 폭력. 정열 대 완력. 의지는 생명 자체다. 폭력은 생명을 위협한다. 정열은 감화시킨다. 완력은 강요한다.

위선적 인간은 위장되고 미화된 폭력에 감동한다. 미화된 폭력은 사실 약한 정열의 증거다. 약한 정열은 폭력을 통해 자신을 강요하고 합법화한다. 그러나 위장을 벗기면 비열한 의도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약한 정열을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위선자들은 폭력적이라고 돌팔매질을 한다. 미화된 폭력에의 감동은 비굴하다.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다. 위장 제거에 경악함은 그들의 비굴을 들켰기 때문이다. 구역질이 난다.

37/ 96. 11. 19

고전적 비극이 정열을 환기시키는 방법. 성격적 결함을 가진 영웅이 강력한 고난을 당한다. 그 힘겨운 짐을 지느라 정열이 불려나온다. 이때 고난은 측량되지 않는 정열을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계측기가 된다. 즉, 고귀한 성품과 고난은 정열을 가리키는 지시문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후세들은 비극의 본질이 성격과 고난인 줄 알았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가짜영웅이라는 괴물을 조제하였다. 이윽고 정열을 보는 감각이 무뎌져 간 관객들은 비극이 따분한 것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비극정신의 삶의 열정 자체에 고양되는 것이다.

쎈연필 2004-11-0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력/힘에의 의지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니체의 <생명에의 의지>를 정열적으로 묘사한 글이군요. 이 분의 작품에서는 고대 비극과 아르토의 체취가 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조광화 희곡집을 읽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