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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바그너의 경우.니체 대 바그너 ㅣ 니체전집 1
프리드리히 니체 / 청하 / 198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구별해 보자. 아폴론은 태양신이다. 영생, 남성적, 정의, 체계, 질서, 바름, 명백, 이성, 예술, 오르페우스, 현악기, 낮, 빛, 주류 등등이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쾌락의 신. 부활, 여성적, 죽음, 혼돈, 모호, 비의, 자연, 예술, 마르시아스, 판악기, 달, 광기, 어둠, 악, 비주류, 도취 등등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상반되는 두 가지 개념을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니체는 동양의 음/양설과 비슷한 논지를 제시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대립하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인간은 소우주다. 아폴론/디오니소스는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한다. 대극; 서로 대립하면서 보충하는 관계, 한쪽이 사라지면 나머지 한쪽도 사라진다. 동어반복하자면, 공생이다. 동양화를 예로 들자면, 사군자/산수 등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여백에 의해 그것들은 기품을 얻는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적인 것을 공격한다. 예술의 가장 고상한 적, 소크라테스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놓치고 아폴론적인 것을 고착시켰다는 뜻이다. 아폴론의 신화를 살펴 보자. 아폴론은 왕뱀 피톤을 제압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신전을 세운다. 피톤의 딸인 피튀아를 신전의 사제로 삼는다. 이것은 자연을 지배한 인간, 토착 신화를 모조리 올림푸스 신화로 통합했다는 상징이며,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을 지배했다는 상징이다. 현대 문명은 아폴론적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억압되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어마어마한 폭발력이 잠재된 무서운 문명이다. 니체가 찬양한 그리스적 정신이란, 아폴론/디오니소스의 조화다. 우리는 아폴론적인 것이 너무나 강한 시대에 태어났으므로, 니체의 책을 읽으면 거부감이 심하게 드는 게 당연하다.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상상적 사실은, 연극의 기원에 있다. 무수한 연극개론, 연극사 서적을 뒤적여 보면, 연극은 디오니소스제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헌데 그 이상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책이 없다. 어떤 책에서는 <시학> 이후 연극에 대한 최고의 책이 <비극의 탄생>이라고 하는데, 다른 책에서는 언급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나? 읽어봐야 알 수 있다. 광기에 대한 가장 통찰력 있는 책인 동시에, 연극의 기원에 대한 가장 상상적이며 흥미로운 책이다.
디오니소스는 갈가리 찢겨 죽었다가, 부활한 신이다. 포도주는 포도를 모조리 박살(?)낸 후에야 만들어진다. 포도주를 마시면 취한다. 취하면 혼란스럽다. 만취하면 광기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광기란, 미친 것이 아니라, 과도한 열정이다. 예술이란, 카오스를 형상화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라. 그 혼돈을 형상화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예술가다.
우리는 굴절된 디오니소스적 체험을 종종 경험한다. 예술은 어디서 출발했나. 니체는 예술의 기원을 제의적으로 고찰한다. 예술 정신이란 <부활>이라는 것.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교가 있었다. 그들은 달이 차는 날 이슥한 밤에, 맨발로 산 위로 올라가, 제일 먼저 마주치는 들짐승을 산 채로 찢어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에 취해 단체로 춤을 추며, 신비제의를 했다. 그것이 디오니소스제의다. 그러다가 제정신이 돌아온다. 제정신이란 아폴론적인 것이다. 광기와 이성의 접점에서, 디오니소스제의는 점점 체계를 잡는다. 그래서 단순히 들짐승을 찢어 죽이고 춤추고 난교를 하는 데서부터, 뒤튀람보스, 즉슨 디오니소스 송가로 발전했다. 디오니소스 찬가는 코러스로 발전, 계승되었다. 연극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한 서적을 접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아이스퀼로스 이전의 연극은 배우가 한 명 뿐이었다. 한 명이 가면을 여러 개 바꿔 가며 연극을 했다. 나머지는 코러스들이었다. 아이스퀼로스가 두 명으로 배우를 늘렸으며, 소포클레스는 세 명 이상으로 늘렸다.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상상력>을 발동시켜 보자. 왜 하필 한 명이었을까? 디오니소스교의 교주가 배우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무당처럼 별지랄발광을 떨었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의 탄생>이다.
현재까지 아테네에 남아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의 사진을 보면, 극장들은 산 속 깊은 곳에 있다. 무대의 뒤편에는 아폴론 신전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통/광기/몰입을 정기적으로 체험하려 비극을 관람했던 것인데, 좀더 원시적인 디오니소스적 카타르시스를 위해, 산 속에 극장을 만든 것이다. 몰입해서 광기를 일으킬까봐, 무대 뒤에는 아폴론 신전을 마련한 것이다. 아폴론 신전이 세워진 바로 뒷동산에 극장을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비극의 탄생>에서 가면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은 왜 가면을 썼을까? 가면, 그 표정은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표정이다. 생의 진면목을 맞닥뜨릴 때의 경악, 오이디푸스의, 오레스테스의, 비극적인 그러나 장엄한 표정. 비극은 자기 앞의 세상과의 불일치에서 생긴다. 신이 벌인 짓거리를 인간이 책임져야 하는 비논리. 그 고통과 마주하는 인간의 고뇌. <차라투스트라>에서 말하는 수직 상승, 도약하는 자란, 불행을 목전에 두고 긍정으로 전환하는 자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비극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파헤쳐,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책임을 질 때, 우리는 장중한 숭고미를 느낀다. 그 비극정신은 해체와 재결합이다. 감정의 찢김과, 승화. 몰락의 드라마. 그 몰락을 넘어서는, 그것이 비극정신이다.
이 책은 니체의 첫 저서다. 스물여섯에 교수가 된 후 갖은 중상모략을 겪었을 그는, 그가 마땅한 자리에 있음을 보이기라도 하듯, 시대를 넘어서는 글을 썼다. 하지만 젊은 혈기로 인해, 문장은 들 떠 있고, 비약적이다. 번역투로 보더라도 그것은 확연하다. 디오니소스적인 글쓰기라서 그런지, 매우 모호하고, 애매하다. 그러므로 상상을 촉발시킨다. 얻어 가는 건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값진 책이다. 덧붙여, 앙토냉 아르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디오니소스적으로 변형시켜, <잔혹극>을 만들었다. 책의 내용은 문청이 읽기에, 상상력의 보고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 별점으로 매길 수 없지만, 매우 난해하게 읽힌다. 철학, 미학 뿐아니라, 연극에 대한 지식도 탁월한 사람이, <비극의 탄생>의 진면목을 잘 살려 주석도 세심하게 붙여서, 이해가 잘 되도록 번역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