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에 Historie 1
이와키 히토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고대 그리스적 인간들에 대한 몽상, 헬레니즘 문명에 대한 매혹은 전 세계적으로 유난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만화는 양날의 도끼처럼 이면을 파헤친다. 노예제도와 끔찍한 고문과 살육이 난무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명이란 대지에 피를 뿌려 이루어 낸 것일까. 저자는 그 틈새를 비집는다.

첫장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노예제의 필요성을 설할 뿐아니라, 자신을 구해 준 에우메네스의 은덕을 허허로운 웃음으로 배신한다. 초반부터 저자의 시선은 다소 삐딱하다. 여담인데, 스파르타에서는 약하거나 기형인 아기가 태어나면 절벽에서 던져 버렸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워낙에 마초이즘을 숭상한 동네로 유명하다만, 그 만큼 그 시대가 살벌했으므로 약한 육체로 살아가기가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관습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관습에 찬동했다고 한다(『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참조).

주인공 에우메네스는 칼데아-페르시아(터키)와 마주보는 도시로서 옛 바빌로니아-출신 귀족이다. 트로이 유적지에서 배와 노를 만들어 해협을 건너 고향 칼데아로 간다. 칼데아는 마케도니아의 장창부대에 포위되어 있고, 필리포스 2세로 보이는 남자와 알렉산드로스로 추정되는 젊은 지휘관과 우연히 조우한다. 폐허가 된 옛집터에서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천병희 번역본이 있다)를 발견하며 옛 상념에 잠긴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심하게 훼손되어서 알아보기 힘들다. 에우메네스의 유년 시절 꿈도 그러하다.

스키타이족 여인이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단신으로 싸우는데, 마치 춤추는 것 같은 몸놀림으로 가뿐하게 남자들을 죽이다가, 꿈속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멈춰 버리고, 그 틈에 남자들에게 도륙 당하고, 남자들에게 강간 당하며 온몸이 찢긴다. 에우메네스는 가까이 다가가서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 보지만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궁금증과 슬픔이 너무도 아련하게 꿈속에서 뒤섞여, 에우메네스는 자면서 눈물을 흘린다.

에우메네스는 칼데아의 유력가문 히에로니무스가의 차남이다. 히에로니무스의 부하들은 곧잘 노예사냥을 하며, 유목민이나 야생의 민족들을 끔찍하게 살해하거나 강간한다. 히에로니무스의 저택은 아름다운 그리스풍의 건물이며, 정원에는 꽃이 피어 있고 애완동물이 뛰논다. 아들들은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부인은 예쁘다. 그런 와중에 한 노예상인이 스키타이 노예를 혹심하게 다룬다. 이 만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줄곧 극단의 이미지가 교차한다. 도서실에서 수많은 파피루스 문헌을 섭렵한 어린 에우메네스는 이미 헤로토토스의 『역사』도 통독했을 뿐더러, 호메로스와 에우리피데스, 크세노폰의 저서들도 읽은 독서가다. 스키타이 민족의 일화와 습성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 주는데, 그것은 예언처럼 실현된다(잔인성과 복수).

에우메네스의 형은 늘 동생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우연히 권투 시합을 하게 된다. 1권의 모든 줄거리다. 이건 만화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라는 생각은 않는다. 직접 봐야 그 잔혹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존하는 헬레니즘 문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번역된 문헌은-제대로 읽고 싶은 마음에 뒤져보면-얼마 안 된다. 알렉산더의 서기관이었다는 에우메네스의 궁정일지도 물론 번역본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고대어를 배워서 직접 읽고프다. 주인공인 에우메네스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도 다뤄지는 인물이라는데, 나로선 아직 안 읽어 정보가 없다. 『헬레니즘 세계』라는 책에 따르면 히에로뉴모스는 에우메네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밑에 있던 인물이라고 한다. 에우메네스 사후 통솔권을 쥔 인물이라고. 그리고 에우메네스의 기록이 만화의 결정적 순간에 간간이 나레이션처럼 고딕체 글씨로 등장하는데, 잔존하는 『궁정일지』는 극히 단편이어서 만화의 궁정일지는 작가의 창작인 듯하다. 이로 유추하건대, 작가는 『창천항로』와 비슷한 방식을 취하는 듯하다. 작가의 전작 『기생수』를 중학생 시절 봤던 지라 기억이 희박하지만서도, 무척 디스토피아적인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근래, 서양 고대 신화/문명에 대한 재독해가 부쩍 성황이다. 그런 반면에서 움트는 이 만화-타 장르의 예술은 고대 그리스를 예찬했을 뿐이지만, 상대적으로 멸시 받는 장르이므로 더욱 강렬한 예술-의 삐딱한 전개를 쌍수 들고 환영한다. 덕분에 헌책방에서 헐값에 사 놓고 책장 깊숙이 봉인해 둔 헤로도토스의-본 만화책과 동명인-『역사』를 야금야금 읽고 있다. 왜 이제야 읽나 싶게 황홀한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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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모험 2005-07-0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에서는 흥미의 수위가 높아져서 더욱 즐거워졌답니다. 스키타이 민족을 비롯한 역사적 배경에 살을 잘 붙인 작가와 만화가 이와아키 히토시의 환상적이면서도 체감도가 확실히 높은 그 특유의 재미가 잘 살아 있어서 말이죠. 더구나 『바우돌리노』가 연상되는 전개방식이나 기타 요소들 때문에 더욱 흥분상태가 되고 말았죠. 여담이지만 2권 표지도 정말 원츄~!였답니다. 님글 덕에 저도 헤로도토스를 접할 행운을 잡았네요. 감사합니다.

쎈연필 2005-07-09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덕분에 책장에 모셔 둔 바우돌리노를 읽게 되겠군요. 감사감사.
이 만화 제목이 불한당들의 히스토리에여도 괜찮을 듯합니다(물론 농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