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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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는 1914년생이고, 가토 슈이치는 1919년 생이다. 이 책은 가토가 질문하고 마루야마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된 대담집이다. 1996년 마루야마가 고인이 되면서 대담도 멈췄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결론을 맺지 않고 무뚝 끝난다. 팔순에 이른 노대가들의 박식을 따라가자면 자주 아찔해지다가도, 기품이 흐르는 여유와 농담 덕분에 읽기의 즐거움을 다분히 맛볼 수 있다. 

일제 시대 소설가들, 예컨대 이상 박태원 등의 작품을 읽으면 쓸데없이 서구 작가나 소설들의 이름이 표피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일본 메이지 이후 소설가들의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문화 콤플렉스다(소세키의 일련 소설들이나, 모리 오가이의 『청년』,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등). 일본 식자들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키워드는 언어의 소통, 즉 번역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던 바, 일본 19세기 말은 번역의 홍수였다. 얼마나 많이 번역되는지, 번역서를 읽는 길잡이 역할을 한 『역서독법譯書讀法』(1883년)이란 책도 출간되었는데, 그 책에 따르면  "역서 출판이 성황을 이루어 그 권수가 몇 만"(57p)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일본 입장에서) 선각자인 오규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31p)고 기존의 인식을 뒤엎는 선언을 했는데, 지금식으로 말하면 비교언어학적 시각이랄 수 있다. "일본인이 전통적 한문 독법으로 중국 고전을 숙지하고, 거기다 자신과는 이질적인 것을 번역문으로 읽고 있는 거라고 자각하기만 한다면, 비교라는 방법·의식에 의해서 본가·원조인 중국인보다도 더 깊이 알 수 있다"(31p)는 뜻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중화사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 중국어뿐만 아니라, 유럽 등 다언어가 존재하고 그런 만큼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을 오규 소라이는 의식했다는 뜻이다. 그 당시에 인간의 언어가 여러 개라는 사실을 인식한 건 "의식혁명"(37p)이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진단한다. 

일본이 번역에 주력한 것은 역사를 중시한 유교적 관습이 강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유교는 가계/족보를 중시한다).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경(經), 자(子), 사(史), 집(集) 순으로 가치를 두었다. 天이라고 하는, 역사를 초월한 궁극적/영원한 것에 대한 탐구심이 강했다는 뜻인데, 인도도 마찬가지다. 인도는 훨씬 초역사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어서 형이상학이 발달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에서 경전을 수입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를 알아야만 했고, 서구 문헌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역사서 번역을 주력했다. 때문에 "실증주의는 아주 발달하지만, 형이상학적이랄까, 곧 근본적(fundamental)이랄까, 역사를 초월해서 진정한 것이랄까 그런 데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고 생각돼요. 없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이겠지만,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거지요."(72p) 이른 바 <눈치>가 대단히 발달했다고 보면 된다. 시대가 바뀌면 부화뇌동하고, 대중적 히트 잘 치는 문화상품을 생산해 내는 일본인의 특성이 바로 이러한 근본의식의 엷음(혹은 시대적 감각)과 관련한 건 아닐는지. 그렇다고 역사의식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오규 소라이는 역사야 말로 궁극적인 학문이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지성들이 난관에 봉착하면 옛 그리스-로마를 소환하듯이, 일본의 규범은 중국이라는 것. 일본인은 『논어』『맹자』보다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서를 애독했다는 게 그 예다. 

번역을 한 주역은 선교사들이었다. 1. 우선 외국인 교사가 원작의 대략적인 번역을 원어민에게 구두로 말해 주면, 2. 원어민이 그것을 적합한 모국어로 바꾸고 3. 이 번역문을 외국인이 원작과 비교하여 그 타당성을 검토한 후 4. 최종적으로 원어민이 문장을 다시 손질하여 완성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205p)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의 교육』에서 '영어를 국어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야마토 말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야마토 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차라리 영어를 국어로 채용하자"(50p)였는데, 이는 우리 나라의 복씨와 비슷한 논리다. 그에 대해 바바 다쓰이는 인도를 예로 들어,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번역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여파가 급진적일 수 있다는 지적도 흥미롭다. "그 지적이 틀렸다고만 할 수 없는 예가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사회정학』(社會靜學 Social Statics)이지요. 마쓰시마 쓰요시(1854~1940)가 『사회평권론』(社會平權論)이라 번역했는데, 이 번역은 좀 이상합니다. statics란 표현은 dynamics와 반대되는 말로서 '정태학'(情態學)이라는 의미인데 '평권론'이라고 번역해 놓으면 마치 '평등주의'인 양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래서 스펜서의 Social Statics는 자유민권운동가의 성전(聖典)이 되어 버린 겁니다."(54p) 우스개 소리를 하자면, 이는 책을 읽고 리뷰를 쓸 데도 해당된다. (이 리뷰도 급진적일 수 있다) 중요한 번역어는 민권이다. 가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민권'(民權)이라는 조어에 대해서는 단수와 복수의 문제를 얘기할 때에도 나왔습니다만, 프랑스어 droit civil의 번역으로서는 역시 미쓰쿠리가 1887년의 연설에서 자신의 조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民)에게 권력(權)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논의가 일어 비난을 받았다고 하지만 말입니다."(103)

일본에서 번역한 조어들이 우리 나라에서도 그대로 쓰인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슌다이는 『경제록』에서 물질적인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당시까지 패러다임이던 '도리'의 대립으로 '물리'라는 조어를 내세웠는데, 이는 physics의 번역어다. 그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한 니시 아마네는, philosophy를 희철학(希哲學)이라고 번역했다. 니시 아마네가 희랍어/라틴어에 좀 더 해박했더라면, 철학이라는 딱딱한 어휘보다는 훨씬 적절한 조어를 오늘 날에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지혜(sopia)에 대한 우애(phila)를, 철학이라고 해 버리면 뭔가 단절된 듯한 어감이 든다.  

저자들은 번역 뿐아니라, 종횡무진으로 역사, 관습 등을 논한다. "일본의 정서는 여전히 어르신의 재판입니다. 아직도 이상적인 재판이 오오카 재판의 이미지예요. 윗사람이 동시에 중재자인 셈이죠. 따라서 영미법에 비하면 어르신 재판적인 요소가 있는 대륙법이 더 체질에 맞는 거죠. 영미법은 철저하게 게임의 공정한 심판이라는 사고방식이고요."(133) 이러한 권선징악의 영웅적 이미지는 정치가에 대한 서민들의 희망이 투영된 허상이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당시의 일본인들은 주자학적 원소, 즉 음양오행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 다윈의 진화론, 세계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달턴의 원자설이 유입되면서 세계관이 변하게 되었다.

"한국의 근대는 서구, 중국, 일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triple-translated modernity)라고 할 수 있다."(225p) 우리 나라의 근대는 번역된 것일 뿐아니라, 삼중 번역이란다. 우리 나라의 유구한 전통은 중국의 한자와 함께 했고, 일제 때는 강제로 그 언어와 문화가 이식되었고, 현재는 시대적 패러다임인지 영어 세례가 한창이다. 시기상으로 우리 나라가 근대화 과정에 든 것은 일제 때부터니, 우리 근대를 근원부터 알려면 선행적으로 일본의 근대를 살펴서 참고하는 게 한 방편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찬동하게 되는 셈인가?)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에 대한 긴 대담은 자국의 문화자립을 위한 고찰이다. 그 고찰 속에는 심지어 반성, 회한도 있다. 두 지성은 일본 번역과 근대를 논했지만,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 나라의 상황과도 연관지어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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