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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용기 옮김 / 책사랑(도서출판)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엄청난 흡인력의 이 소설을 단숨에 읽고 몸서리가 쳐져서 시골방 책장 어느 귀퉁이에 봉인하고는, 그 책 대신 다른 책을 가방의 빈 자리에 채워 넣어 귀경했다. 이토록 처절하고도 철저하게 인간의 양심을 불신할 수 있을까.
남편은 한결같은 일상의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일기를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쓴다. 부인과의 성생활을 일기에 노골적으로 쓰고, 또 그 성생활에 자극을 주기 위해, 사위가 될 사람을 이용한다. 일기를 통해. 그 일기장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감춰두지만, 부인의 성품으로 보아 어떻게든 자신의 일기를 훔쳐보리란 것을 안다. 그리고, 훔쳐봤으면서도 모른 척 하리란 것을 안다. 어느 날부턴가는 부인도 일기를 쓴다. 일기로 일기에 대항한다. (어떻게 이런 기상천외한 발상이 가능할까! 그러나 그 형식이 일기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글과 글의 대결이란 다반사다. 다만 다른 점은, 비공개된 대결이란 점이다) 남편은 부인이 자신의 일기를 훔쳐봤을까를 의심하며, 점점 더 대담하게 일기를 쓰고, 부인은 남편이 자신의 일기장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예상하고 남편의 일기처럼, 노골적이고 대담하게 쓴다.
그들이 탐닉하는 것은 주로 성생활이다. 그들의 일상에는 오롯이 성생활만 남고, 그것에 대한 치열한 과정만 부각된다. 그리고 작가는 대가다운 솜씨로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한다. 그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나는 이 작가가 대중소설가 아닌가? 당찮은 의심을 했다. 이를 테면, 대중소설기법을 도용한 순수소설이라고 할까. 게다가 뒤로 갈수록 추리적인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전장을 종횡하는 모사들 간의 계략싸움도 아니고, 무한경쟁시대의 정보전도 아니라, 그저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다. 때문에 독자에겐 더욱 지독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더 강한 자극을 바라는 남편의 일기대로, 부인과 사위는 간통을 하게 되는데, 남편은 옹졸하게도, 최후의 선(?)을 부인이 넘었을까 (그것만 안 하면 순결하다나 뭐라나) 고민하고 부인은 지독히 보수적이기 때문에 그것만은 하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믿고 싶어한다). 부인은 부인대로 일기에, 최후의 선은 넘지 않았고, 갖은 방식으로 최고의 쾌락을 희구하고 있다고 쓴다.
어느 날엔가 남편이 일기장에 표시한 흔적에 변화가 왔고, 남편은 부인이 자신의 일기장을 훔쳐본다고 확신한다. 남편은 부인이 일기를 쓰는 것을 알지만, 자신은 절대로 훔쳐보지 않는다고 일기장에다 쓴다. 부인도 자신의 일기장을 누군가 손 댄 흔적을 발견한다. 남편이 자신의 일기장을 훔쳐본다는 걸 확신한다. 그러나 자신은 남편의 일기장을 훔쳐보지 않는다고 신에게 맹세한다.
남편은 부인과의 과한 성생활 때문에 쓰러지게 된다. 거의 식물인간이 되고, 부인은 계속 일기를 쓴다. "11시, 정원에서 인기척이 났다"는 문장이 거의 매일을 도배하다시피 한다. 그 인기척은 사위의 그것이다. 부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딸이 자신의 일기장을 남편에게 읽어 주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리고 그것을 일기에 쓴다. 이 소설은,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기형식으로 되어 있다. (샨샤의 소설 <바둑 두는 여자>처럼 번갈아 가다가, 뒤로 갈수록 부인의 일기가 많아지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부인이 두 일기장을 정리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처럼, 독자로서는 뭐가 뭔지 헛갈린다.
남편은 죽는다. 그 후 부인이 남편의 일기장을 참조하여 해명하는 방식으로 일기를 쓴다. 부인은 신에게 맹세한다고 일기에 썼었지만, 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의 일기를 훔쳐보았다. 일기에는 사위와 최후의 그것은 안했다고 썼지만, 실은 진작에 했다. 그것을 속이기 위해 그날 일기를 부러 길게 썼다. 이제 자신이 의심스러운 건, 사위와 딸이다.
일기는 말그대로 하루의 기록이다. 그런 일기에 언제부터, 비밀이란 것이 옵션으로 섞이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겪은 것을 언어로 옮길 때, 이미 최소한의 주관성이 첨가되고, 그 자체로 리얼리티는 줄어든다. 모든 일기는, 씌어지는 바,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전제한다는 (김현의 일기에 덧붙인 이인성의 글) 통찰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일기의 암묵적 특이성을 통해 한 남자는 파멸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이용해, 독자를 진저리치게 한다.
p.s 저자의 초기작 <문신>에도 발에 대해 에로틱하게 접근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소설의 남편도 부인의 발에 유난히 집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