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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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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망명한 조셉 콘라드는 십대시절부터 선원이 돼 지구촌 곳곳을 싸다녔다. 그는 22세에 영국 상선에 오르면서 처음 영어를 배웠다. 배운지 6개월만에 소설을 썼다고 한다. (거 참…) 그의 어린 시절 꿈은 “가장 넓고 가장 공허해 보이는 곳에 몹시 가보고 싶어하고 있었어.”(18)였다. 소설 속 말로는 아마도 콘라드의 분신일 것이다.

음산함, 적막… 적막을 깨는 비명 같은 소름, 어스름 강기슭의 세밀화, 주술적 구어체… 이러한 이미지가 <암흑의 핵심>을 읽고 떠오른다. 한자어투의 번역도 한몫했겠지만, 문체는 매우 관념적이며 그러한 관념과 밀림의 풍광을 기묘하게 비유해가며 묘사하는 것이, 흡사 연금술사의 주문 같다. 예전에 좋아하던 블리자드社의 '디아블로'가 떠오른다. 폐허가 된 마을의 성당 지하 일층, 이층, 삼층… 그 그로테스크한 웅웅거림……. 소리, 청각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소설은 시각과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소리가 읽는 내내 떠나질 않는다. 괴기스런 웅웅거림! 아니나다를까, <암흑의 핵심>은 온통 소리의 진동으로 가득차 있다.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일독했으면, 독일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를 추천한다.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꼭 볼 생각이다. 스페인 군대가 아마존의 엘도라도를 점령하러 가면서, 아귀레라는 부대장이 황금에 미쳐, 악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인간의 극악한 모습을 잘 표현한 영화라는데, 원작은 물론 <암흑의 핵심>이다. 이 영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게 유명한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다. 나는 '지옥의 묵시록'을 보면서, <암흑의 핵심>을 보지 않고 영화부터 보았다면, 뭔 내용인지 몰랐을 거란 생각을 했다.

배 위로 화살이 쏟아지는 장면과 기관장이 창에 찔려 죽는 것, 소설에서 매혹적인 여성이 나와 춤을 추는 대목이 영화에선 플레이 걸들과의 섹스로 대신되고, 커츠의 추종자인 주재원(?)이 영화에선 종군기자로 나와서 호들갑을 떠는 것, 등등등을 비교하는 것 역시 영화 보는 재미다. 영화는 무척 긴데, 소설은 더 오랜 시간을 잡아 먹는다. 영화는 무척 재밌긴 한데, 커츠가 나오는 부분에선 별로였고 결말도 별로였다. 컬트영화로 化하면서 끝이 나버린다. 말론 브란도가 대머리에 파리를 앉히고 하는 연기는 가히 압권이다.

참, 소설을 읽으며 웅웅거리는 괴기스런 소리들은, 영화에서 고스란히 소환된다. 환각적인 문체가 영화에서 몽롱한 영상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콩고(암흑의 핵심), 엘도라도(아귀레, 신의 분노), 베트남(지옥의 묵시록). 고스란히 관통하는 것이 물론 주된 서사이겠지만, '암흑의 심장'을 파헤치는 면모 역시 대단하며, 그를 받쳐주는 묘사 또한 일품이다. 무조건 강력추천한다.

p.s/
영화에서 커츠는 죽으면서 'horror, horror' 뇌까리며 죽는다. 영화에선 '공포, 공포' 라고 자막이 뜬다. 소설에서 역자는 '무서워라! 무서워라!'(157-158)로 번역했다. 너무나 어색하고 게다가 경박스런 뉘앙스다. '무서워!'면 됐지 '라'는 왜 붙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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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합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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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문체는 살아 팔딱팔딱 뛰는 것 같다. 결코 지적이거나 감미롭거나 하지 않다. 싱싱하다. 따라 읽는 맛이 솔솔하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 같이 힘없고 약하거나 혹은 거칠거나 소박하다. 그네들을 돌보는 한창훈의 시선은 익살스러우면서도 따스하다. 한창훈의 소설을 읽을때면 늘 드는 생각인데, 꼭 한 번 만나서 거하게 술먹고 같이 주정도 부리고 했음 싶다.

한창훈의 단편집들도 모두 좋은데, 장편인 <홍합>은 제목 그대로 홍합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한 소설이다. 나는 벌써 3년 전에 한창훈의 소설을 처음 읽었었는데(현대문학 홈페이지에 회원가입하면 <99년 올해의 좋은 소설>이란 책을 무료로 보내준다. 아직도 하려나..), 당시에는 임꺽정이 맹키로 수염이 더부룩한 그의 몰골을 보고 '흉하다'는 인상을 받았던 듯싶다.

인상과는 달리 필치는 세밀화를 그리는 듯 유려하다가도, 아낙의 한(恨)이며, 정(情)이며, 뚝뚝한 심성까지 못내는 독자로하여 울렁울렁거리게 할 정도로, 은근히 보여준다. 뿐아니라 임꺽정이가 연상되는 듯한 거칠고 투박한 입심도 발칵 까내보여주기도 한다. 요즘에 이런 작가가 있다는 건 정말이지 얼마나 위안되고 소박하게나마 기쁜 사실인지.

촌에 아부지 엄마는 한 철 농사를 하는 덕에 이 맘 때는 이런저런 부업도 할 때가 있는데, 작년만 해도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는 장바닥에서, 손수 재미삼아 심은 상추며 부추며 오이 그리고 집에 오리새끼가 낳은 오리알이며를 팔고 있다고 콜콜히 '아, 바쁘다'고 짜증내는 아들놈에게 얘기하곤 했었다. 또 어떤 날은 장바닥에 앉아 있는 엄마를 알아 본 아부지의 친구분이 허연 봉투를 던져주고 가서 쫓아가 한동안 실갱이를 벌이다가, 져서 결국 받고는 내게 전화를 걸어 '으메 쪽시렵다. 근데 오늘 들어갈 때 고기라도 좀 사가야겠다'라며 기뻐했던 적도 있다. 나는 이러한 소리가 정말 '사는 소리'로 들린다.

한창훈의 소설들엔 살아있는 소리로 가득하다. 내 아부지며 엄마 같은 촌부들이 대거 나온다. 소읍에서 주정부리며, 에고야 새깽이들만 아니면 고마 팍 디져뿔낀데, 하며 살아가는 이름없는 잡초같은 그네들이 '주인공'이다. 유례없이 많은 여성들이 주인공임에도 그 질펀한 욕설하며, 쏘주 같은 '캬~'하는 성격이며 심뽀를 가진 촌의 아낙들은, 아아, 고작해야 백면서생인 나를, 정말이지 울게 한다.

살아온 게 하도 잊고 싶은 거 투성이라 술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는 김씨 아저씨, 일찍이 남편 잃고 늙은 시부모에 줄줄이 자식들까지 바락바락 키우는 승희네, 그 승희네를 보며 '아, 내가 어쩌자고, 저 여인네를 바라는가' 번뇌하는 대학까지 나온 노총각 문기사, 그리고 무수한 아낙들. 나는 내가 떠나온 동네 풍경을 보는 것 같아, 과연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건지 이 사람들의 말을 직접 듣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가족중심주의의 틀에 묶여 노예처럼 혹사하면서도 그것이 여자의 팔자다고 생각하는(촌에는 아직도 이런 여자들이 많다) 승희엄마와 문기사와의 애절한 눈빛 로맨스는, 내가 본 그 어느 로맨스에 못잖은 애절한 사랑이야기였다. 이토록 우리네 민중들의 정서를 잘 솎아내는 작가가 있다는 게 독자로서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소설읽기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해주는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픈 그러한 작품이다. 사는 소리란 걸, 이 소설을 읽으며 귀기울여 들어보길 당신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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