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세르크 1
미우라 켄타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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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만화를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거의 볼 일이 없다. 하지만 생각날 때마다 만화방에 가서 꼭 챙겨 보는 만화가 셋 있다. 『창천항로』『무한의 주인』, 그리고 『베르세르크』이다. 『불멸의 용병』이라는 해적판으로 이 만화를 접했던 게 십 년 전쯤이다. 현재는 정상 판권 계약에 따라 무삭제로 꾸준히 나오는 중이다. 더딘 만큼 고대하는 재미도 솔솔해서, 기다리는 맛이 싫증나진 않을 정도로, 아끼는 만화.

이 만화는 여타 영웅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여정>의 서사다. 길은 한자로 道. 정의의 사내가 온갖 고난을 이기고 마지막에 귀환(가령, 누명을 벗고 정의를 찾는)한다는 둥의 (오디세이아 같은) 고색창연한 서사가 뇌리를 스치지 않는가? 그러나 작가는 신화와 기독교 바이블과 동화적 판타지를 작신작신 비틂으로써 신선함을 이끌어 낸다. 뿐아니라, 시간적 구성도 전복한다. 현재 - 회상 - 진행 순이다. 현재의 절정인 상태를 아무런 원인 없이 보여주어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방식인데, 과거의 서사가 너무나 길어서, 초반부에 절정의 장면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복잡한 서사를 싫어하는 만화 독자(나의 편견?)들이 계속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 에둘러서 초반부의 시점을 거친 이 만화는, 현재, 진행 중이다.

전복의 미학을 집중 연구한 서적, 어디 없나? 이 만화는 그리스/로마/북유럽/켈트족 신화를 채용하지만, 기독교 바이블을 전복시킨다. 작품 속, 예언서에 의해 흰 매로 상징되는 그리피스는 예수의 알레고리일 테고, 어둠의 매로 상징되지만 제대로 혐의가 씌워지지 않은 가츠는 아하르 페르츠(적그리스도)의 알레고리인 듯하다. 그리피스는 밑바닥 삶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치에 뛰어들어 세상을 자신의 정의(?)로 구원하려는 노모스적인 인물이지만, 가츠는 세계가 체계와 믿음에 의해 다루어지는 게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알고 부딪어 가는 아노미적인 인물이다. 기독교 바이블이 박애로 구원을 이룬다면, 중세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의 인물들은 칼로써 구원을 하려 한다. 기독교 바이블이 말(진술)이라면, 이 작품은 스크린(묘사)이다. 가츠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여정을 지속하는 게 아니라, 그리피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간다. 공적(구원) 자아보다 사적(복수) 자아가 더 부각된 영웅이 있던가? 여정 서사에 대한 안티이면서, 기법은 여정이다(제대로 된 풍자!).   

이 만화는 반지의 제왕에서부터 시작된 동화적 판타지를 무시했다. 마법사, 드래곤, 전설의 무기, 여정을 위한 구성원, 공적을 세우는 모험, 멋진 친구와의 조우 등 동화적인 판타지의 일반 소재가 철저히 배제돼 있다. 대신에 듣도 보도 못한 괴물,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검, 외로운 여정, 살육, 강간, 오로지 적들만이 난무한다. 여정의 중심인물인 가츠는 그냥 전사가 아니라 미친(berserk) 전사이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그리피스)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강간 당하는 것을 목도 당했고, 그 순간에 괴물의 발톱에 의해 한쪽 눈이 실명했고, 외눈은 절대로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외곬 여정의 암시일 것이다. 또한 한쪽 팔이 잘려서 대포가 달린 철제 의수를 달고 다닌다. 괴물보다 더 괴물같다. 미소년 엘프 사내도 아니고, 애들이 좋아할 자그마한 호비트 주인공도 아니다. 거대한 칼을 차고, 괴물들ㅡ아마도 왜곡된 또 다른 가츠의 자아를 상징하는ㅡ을 살육하고 다니는 인물이다. 일반적인 동화 판타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20여권쯤에는 요정이 변이된 괴물이 나온다. 요정 괴물은, 옛적 소녀였고, 요정을 꿈꾸었고, 요정들에게 틈입했지만, 꿈과는 달리 모습만 아름다운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살육을 일삼다가, 가츠에게 무참히 도륙당하고 대포 맞아 죽는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사티로스의 모습을 한 사탄과 마녀들의 디오니소스적인 향연을 일컫는다. 괴테의 『파우스트』1, 2부에 걸쳐 묘사되는 게 유명한데, 이 만화의 20권쯤에 발푸르기스의 밤을 알레고리화 한 장면이 등장한다. 고야의 판화를 연상시킨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마녀 화형도 등장한다. 마녀로 몰려서 화형을 당하는 여자는 작품의 중심인물인 (가츠의 애인이자 그리피스의 추종자이며 강간 당해서 백치가 된) 캐스커인데, 가츠가 구해냈을 때, 화형식 장소인 탑이 무너진다. 그 탑은 대주교가 기거하는 곳이며, 고문의 난장이던 곳이다. 가츠에 의해 대주교와 고문단들이 죽고 탑이 무너진 것은, 신이 어쩌구…… 따위의 관념을 상징적으로 파괴한 것일 테다.

동료들을 제물로 삼아 강림한 그리피스는 국가를 만들고, 마치 아더왕의 전설처럼 주변에 전사들과 민중들이 들끓는다. 그 반대편의 가츠는 그저 괴물들을 살육하며 복수를 위해, 민중들의 빛이며 전사들의 왕을 죽이러 여정을 진행한다. 너무 강한 동화 판타지(그리피스)에 맞서는 카니발리즘적 판타지(가츠)의 묘한 알레고리. 나는 그간, 이 꿋꿋한 냉소로 점철된 만화를 사랑해 왔다. 헌데,

초반부터 요정이 여정에 동참한 것은, 이야기의 전달자적인 역할을 맡기기 위함이라고 여기고 그러려니 했었지만, 20권을 넘어서면서부터, 꼬마 도둑이 여정에 합류하고, 24권인가부터는 소녀 마법사가 동료로 합류하고, 가츠를 영웅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여사제와 그 친위기사가 합류한다. 게다가 미친 전사인 가츠는 점점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어이없는 전개에 나는 이 만화가 미워질 지경이다. 정말이지 너무나 강한 동화 판타지에, 이 작가마저 굴복한 것인가? 대세를 어쩔 수 없다는 듯, 지조를 버린 것일까?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아무리 잘 해 봤자 잡종 판타지 밖에 안 된다. 작가가 어서 빨리 이성을 되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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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이란 무엇인가 - 일상 생활과 문학 속에서 사용되는 수사법 67가지
김욱동 지음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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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글을 쓰려면 사전이 항상 옆에 있어야 한다.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편리하다. 근거 없는 인용이나 틀린 의미를 쓰는 일을 줄이려면 사전과 벗해야 한다. 김욱동의 본 저서도 수사학의 기초 지식에 대한 사전적인 역할을 해 준다. 수사학 관련 책 중에서 가장 쉽게 씌어졌으며 풍부한 예시문과 친절한 설명으로 잘 정리돼 있다.

동양에선 전통적으로 말을 기교라고 폄하하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노자도 공자도 달마도 수사를 비판할 때 수사를 썼다. 플라톤도 소피스트들의 기교가 사회에 혼란을 준다해서 시인추방론을 펼쳤다. 그러나 플라톤은 비유적인 수사술의 대가였다. 수사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수사학에 기대지 아니할 수가 없다. 오죽하면 비트겐슈타인이 말놀이판에 뛰어들었겠는가.

   "주자학의 체계를 세운 주희는 <물건을 싣지 않는 수레나 도(道)를 싣지 않는 문(文)은 비록 아름답게 꾸며졌다 할지라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라고 수사적 물음을 던진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러한 글은 아무 데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주희의 말을 한 발 더 밀고 나가 도가 없는 문을 두고 빈 수레가 요란한 소리만 내는 것에 빗댄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주희나 정약용도 수사법에 기대지 않고서는 수사학을 비판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언어에서 수사학이 얼마나 중요한 몫을 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반증이다."(30)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22장에서 시를 쓸 때 은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비유를 기교로 보았다. 그러나 언어 자체가 삶과 세계의 비유다. 생각, 감각, 행동, 사물, 시간, 공간의 비유이며 상징이다. 단순히 기교만으로 인식될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수사학의 정의와 역사와 기능 그리고 정의된 수사법들에 대해서, 의미 전이와 문장 구조와 실생활적인 수사법의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시적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차지하는 직유, 은유, 환유, 제유는 물론이고 그외 기상천외(?)한 이름의 수사법들에 대해서 개론적이면서도 풍부한 예문과 함께 쉽게 익힐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수사학에 많이 의존하면 형식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되,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며 언어의 외부에 존재하기 보다는 언어의 내부에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언어는 <존재의 집>인 것이다.  

"수사학은 예로부터 가르치고(로고스) 감동시키고(에토스) 즐겁게(파토스)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왔고, 그것은 수사학의 3대 요소다."(42) 가르침, 감동, 즐거움은 삶에도 중요한 요소다. 수사를 삶과 동일선상에 두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수사를 단순 기교만으로 폄하하는 삐딱한 관념은 고쳐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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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5-14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수업시간에 썼던 교재네요.^^ 도서관 검색해보니, 수사법들을 분류하고 풍부하게 예시를 든 것은 이 책 이외에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되는군요.

2004-05-17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05-1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몽상자님, 축하드려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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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김깜모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노래가 한창 티브이에서 흘러나왔다. 한 상 위에서 저녁을 잡수시던 아부지는 채널을 돌렸다. 나는 큰 맘 먹고 김깜모의 노래를 들으려 채널을 돌렸다. 불현듯 아부지는 숟가락을 던졌다. 일어섰고, 곧 아부지의 체중 실린 발바닥이 내 뺨을 짓이겼다. 나는 카멜레온처럼 태도를 바꾸어서 울고 빌었다. 엎디어서 바닥에 파편으로 알알이 내팽겨진 밥풀들을 바라보며 자꾸만 울고 빌었다. 아부지는 쓰러진 나를 오른 검지손가락으로 찌르듯이 가리키며, "네 놈이 감히 내 권위에 도전해!!" 라고 말했다. 아부지는 허리띠를 뽑으러 과장된 몸짓으로 달려갔고 나는 지랄처럼 떨었다, 울었다. 입 안의 밥풀들, 그 끈질긴 일상의 연속을, 나는 뱉어내지 못했다.

일찍 죽은 박제가 된 천재 李箱은 『오감도 2호』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탄식했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아버지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이상은 수사적 카오스를 동원했다. 동원?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무규칙하며 단단하고 그래서 기화시켜야 할 그 무엇. 그것을 이상도 나도 지상의 모든 자식들도 말로, 글로, 몸짓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

"저는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분명 저 역시 여느 아이들처럼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였지요."(22) "아버지께서는 아이를 아버지 자신이 겪으신 대로만 다룰 줄 아시지요. 완력을 쓰시고, 고함을 지르시고, 버럭 화를 내시면서 말이에요. 더군다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한테는 또한 매우 합당한 것으로 보이셨겠지요. 왜냐하면 아버지는 저를 강하고 용감한 소년으로 키우려고 하셨으니까요."(23)

소심한 아이는, 강하게 키우려는 아버지의 <권위> 때문에, "벙어리처럼 완전히 입을 다물었고 아버지 앞에선 설설 기었"(47)다. 아이는 너무나 두려운 권위 앞에서 저항감을 침묵으로 감내해야만 했고, 그 고통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변이된다. 그 변이된 고통은 『변신』이라는 소설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레고르 잠자가 되어 가정 내에서 고통받고 소외당하던 아이는 『단식 광대』로 변해서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세상의 음식(비이성, 부조리)을 거부한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드린 편지의 한 부분에서 그 직접적인 트라우마를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에 길게 인용한다.  

"아버지는 왕성한 식욕과 특별한 식성을 지니셔서 모든 음식을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정신없이 드셨기 때문에 아이들도 함께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식탁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고 그 정적은 아버지가 간간이 던지시는 경고와 재촉의 말들, "먼저 먹기나 하고, 이야기는 나중에 해!" "자 빨리빨리, 더 빨리!" 혹은 "자 봐라, 난 벌써 다 먹었다"와 같은 말들로 깨어지곤 해습니다. 뼈다귀는 깨물어 먹어서는 안 되었는데 아버지는 아니셨죠. 식초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며 먹어서는 안 되었지만 아버지는 역시 예외였습니다. 빵을 똑바로 자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소스가 잔뜩 묻은 칼로 빵을 자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음식 부스러기를 바닥에 흘리지 않도록 다들 주의해야 했지만 결국에 가장 지저분한 곳은 바로 아버지의 의자 밑이었지요. 식탁에선 오직 식사에만 열중해야 했으나 아버지는 손톱을 자르시거나 연필을 깎으셨고 이쑤시개로 귀를 청소하셨지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아버지, 제 말을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전혀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들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들은 아버지가 제게 내리신 계율을 아버지 스스로가 지키시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저를 짓누르는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그토록 엄청난 권위로 여겨지던 분이셨으니까요. 그로 인해 세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지요. 그 하나는 제가 살고 있는 노예의 세계로 나를 위해서만 제정된, 그러나 왠지 모르게 나로서는 결코 온전히 따를 수가 없는 법칙들이 지배하는 세계였고, 두번째로는 내 세계와는 무한히 멀리 떨어진 세계로 아버지가 살고 계신 세계였는데 그곳에서 아버지는 통치하는 일에 열중하여 수시로 명령을 내리셨고 그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 때면 크게 역정을 내셨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세계는 나머지 사람들이 사는 세계였는데 그들은 명령과 복종의 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저는 줄곧 치욕 속에서만 살았지요. 아버지의 명령에 따랐으나 그건 치욕이었습니다. (……) 제가 감히 아버지한테 거역할 수는 없었으니까요."(38-40) 

그래서 아이는 굶는 광대가 되어 치욕적인 굴종을 거부했다. 가족들에게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던 카프카의 부친은 가정 밖에서는 수완가였고 아첨꾼이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강한 것을, 정의로운 것을 가르치려 했지만 아이가 아버지를 보면서 알게 된 것은 이중성이다. 가르침 보다 강요를 받았고, 정의로움 이면의 간교함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침묵으로 삼켜야만 했던 아이는, 가정 속의 자신을 벌레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름도 특징도 없이 단지 이니셜 K로 전락하게 되고, 성이 뻔히 보이는데도 헤매게 되고, 결국 성에 닿지 못한다. 카프카가 죽기 오 년 전에 쓴 이 편지는 결국 아버지에게 닿지 않는다. 카프카의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 그의 문학 그 미궁, 그 비밀은 카프카의 편지에 있는 게 확실하다. 카프카의 아류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작가들 중 한 사람인 정영문은 연작 소설 『검은 이야기 사슬』에서 「카프카와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썼다. 

   내게는 조국 · 고향 · 가족과 같은,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만큼 기이한 사랑의 형태는 없어, 나로 하여금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끝없는, 근본적인 배반을 꿈꾸게 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의 강요에 실린 중압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에 전제된 당위에 대한 혐오감이지, 그것들에 대해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다름아닌 나의 진정한 사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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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1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글들은 독자를 카프카化(변신)시켜 글 속에서 퐁당 젖게 하거나 혹은 먼 말인지 전혀 이해 할 수 없어 헤매게 하지요. 다시 읽을 수록 새롭게 눈 뜨게 하는 작가가 카프카이군요. 잘 읽고 갑니다.^^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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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재밌게 보려면 <아이러니>에 주목하길 바란다. 아이러니의 난장이다. 비의를 찾아내는 재미가 여간한 게 아니다. 극의 숨은 장치들을 찾아낼 때마다 소포클레스의 치밀함에 치를 떨게 될 것이다. 대표적인 아이러니는 잘 알려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아침엔 네 발, 낮엔 두 발, 밤엔 세 발로 걷는 게 무엇이냐는 스핑크스의 질문에 <사람>이라고 대답한 오이디푸스는 나중에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게 된 후 제 눈을 찔러, 말년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세 발로 산다. 그 답은, 엄밀히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자신이었던 것.

(놀랍게도) 스핑크스와 라이오스는 극의 외부에 배치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18장에서 모든 비극에는 얽힘과 풀림이 있다고 했다. 얽힘은 극의 외부에 존재하고, 풀어가는 과정은 극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극중에 스핑크스와 라이오스가 등장하는 줄 알 것이지만, 등장하지 않는다(^^). 헬라스 비극을 읽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얽힘과 풀림을 유념하면 흥미로울 성싶다.

인물들의 등퇴장과 성격에도 관심을 좀더 기울이면 흥미로울 것이다. 이오카스테는 진실을 이미 예감하고 더 이상 파헤치지 말기를 오이디푸스에게 애원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예감하면서도 끝내 비밀을 밝혀내고 만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다른 비극에서도 등장하는데, 지혜의 신 아테네의 알몸을 훔쳐봐서 눈이 멀었다고 한다.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볼 수 없게 된다>는 패러독스의 현현이다. 그는 자신의 앎으로 인해 박해 당한다. 이오카스테의 오라비인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의 다혈질적이고 완곡한 성격을 드러내는데 일조한다. 크레온과의 대화에서 오이디푸스는 꽉 막힌 성격을 보여준다. 재밌는 것은, 후에 『안티고네』에서 크레온은 오이디푸스가 했던 짓을 그대로 반복한다.

코로스는 원로원과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좌, 우, 코로스장. 그들은 적소에 튀어나와 중재를 하거나, 합창을 해서 극의 분위기를 조율한다. 어조는 영탄법이 과장되게 많이 섞였고, 메타-시적이다. 사료에 의하면 이들은 검은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본래의 역할은 오이디푸스를 재판하는 배심원이었던 것.

헬라스 시대에는 비극이 국가 제전이었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야외극장에서 공연했다(때문에 암전이 없었다). 배우들이 대사를 뱉으면 바람을 타고 몇 킬로미터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배우들은 특수 제작된 가면을 쓰고 연기했다. 그러니 헬라스의 장중한 비극들을 오늘날의 소극장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코로스들의 현란한 시적 수사와 오이디푸스의 장황한 고뇌는 지루하긴 하다. 판에 박힌 <운명의 굴레>는 짜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 도저히 견줄 만한 비극이 없는 『오이디푸스 왕』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모름지기 필독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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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4-04-0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의 제목은 오이디푸스의 대사에서 따왔다.
같은 역자의 『소포클레스 비극』을 강력추천하지만, 비싸다. 본서는 소포클레스의 스승 아이퀼로스의 비극 두 편이 앞에 실렸다. 때문에, 비싸더라도 소포클레스 비극을 추천한다.

chaire 2004-04-06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저히 견줄 만한 비극이 없다는 말에 동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모름지기 필독할 만하다는 말에도 동감! 그리고, 알고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오이디푸스적인 생을 사는 것 같다는..
 
엘리아의 제야
고종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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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라는 필명을 쓴 찰스 램의 '제야'라는 수필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고종석의 소설처럼 잔잔하고 따뜻할 듯싶다. 백과사전에서 램의 간략한 프로필을 읽고 난 연후에야 표제작이 살갑게 다가온다. 누이에 대한 작가의 유난할 것 없으면서도 유난한 생각들은 평화롭고 아늑해서 졸음이 쏟아질 정도다(읽다가 졸았다). 고종석은 정을 끝까지 주는 사람인 것 같다. 백석에 대한 잦은 찬사도 그렇고, 황인숙 시인에 대한 각별한 우정(애정)도 그렇고, 김병익의 해설을 보아도 그렇다(김병익이 워낙 주례사 비평가여도 진심은 느껴지는 법이다). 그래서 여리고 약한 이들을 또한 소설로 어루만지고 있는가 보다.

받아들이는 자세를 그만두면 사람은 단세포가 된다.「피터 버갓 씨의 한국 일기」의 피터 버갓 씨는 세계적인 지식인인데, 매너리즘에 빠져서 상태가 영 안 좋다. 가면 뒤에는 또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어서, 버갓 씨는 세계적 지식인답게 철저한 가면을 가진 모양이다. '지식인' 운운하는 등등 따위의 글을 볼 때마다 나는 역겹다. 남보다 아는 게 좀 많다는 것을 큰 대수라고 여기면 참 곤란하다. 어떤 사람을 박식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건 좋아도, 존경하는 건 곤란하다. 그건 대개 마초들이 하는 짓이다(강자 컴플렉스). 물리력도 자본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요소들을 좀 바르게 써야하는데, 피터 버갓은 참 역겹게 사용한다. 지적 매력을 그대로 성적 매력으로 생각하는 대목은 작가가 참 적나라게 묘사했단 생각도 든다. 바라건대 이런 비판의 예봉은 좀더 다양해야 한다.

「파두」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우리 사회 곳곳에 벌어지는 논쟁도 이 소설의 마무리처럼 화해는 아닐지라도 조짐만이라도 성의있게 보여진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 xx일보의 다수 독자는 그 논조와 풍성한 볼거리에 찬동하는 대중들이겠지만, 영향력 있는 지면이 필요한 '너그러운 자유주의자'들이 더 큰 몫의 독자군을 형성할 거라는 뜨끔한 대목은 각골난망해야 옳다. 소설 속 너그러운 자유주의자인 평론가는, 친구가 그렇게 비판하니까 xx일보에 기고하지 않겠다, 하면서 얼버무린다만, 중요한 건 스스로 각성을 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비판하는 친구보다 더 친한 친구가 기고하라 시키면 할 게 아닌가? '뭘 한다'는 것, 물론 중요하다, 마는 '어떻게 한다'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런 내용의 소설이어서, 고종석의 동인문학상 후보 거부는 놀랄 일이 아니다.

「아빠와 크레파스」와 「카렌」은 작가의 지인들이 보면 참 헛갈릴 것 같다. 「아빠와 크레파스」는 내내 2인칭이어서 (화법이 하소연 하듯) 그 자체로 서글픔이 잘 전달되는데, 주고 받는 서간문이기에 화자가 바뀔 때마다 애절함이 절제가 되어 더욱 애달프고, 그 와중에 돋보이는 인간미가 '정제된 절절함'(이렇게 밖에 표현 못하겠다)이어서 독자로서는 보고 있기 아리다. 많이. 실명해가는 소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돼줄 수 없는 이 나라. 이 나라를 의인화하면 독자, 가 돼버리는 것 같아 괴롭다. 작가의 다른 책 『히스토리아』의 장정에서 동년배 부인과 함께 오손도손 살고 있다는 문구를 보았다. 「카렌」은 마치 부인에게 헌정하기 위해 쓴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작가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멋대로 추측하기란 나름으로 즐겁다.

근래에 보기 드문 따뜻한 소설집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에게 선물하면 퍽 어울릴 책이다.

사족. 나는 그의 문체가 깔끔해서 기자답다는 생각은 들어도 미문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는다. 고종석 문체에 대한 현란한 칭찬들을 나는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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