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n Bear, Brown Bear, What Do You See? (Boardbook + Tape 1개) My Little Library Boardbook Set 43
에릭 칼 그림, 빌 마틴 주니어 글 / 문진미디어(외서)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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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아들냄이의 엄마입니다. 엄마들의 입소문으로 구입하게 되었는데 첫 인상이 무척 강했어요. 아이들의 책은 으레 몇가지 단색으로 단조롭게 이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에릭 칼 만이 독특한 그림기법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첨엔 손가락을 살짝 대보고 '우!'하고 부르르? 겁쟁이 처럼 떨던 건강이 녀석도 책장을 넘기면서 재미나하구요,

무엇보다 얼핏 어떤 색상하면 떠오르는 선입견적인 동물연결이 아니라 약각 쇼킹?했답니다. 하얀색 보라색 파란색 .. 어떤 동물들에게 어울리는 색깔이라고 생각하세요? 맞춰보세요~

단순한 문장이지만 다음장이 궁금해지게 만들기도하고 쉽게 외울수 있는데다가 여러가지 에피소드로 아이와 교감할수 있어서 참 훌륭한 책인거 같아요. 미국에서도 스테디 셀러이지요. 맨 마지막 질문을 아이 눈을 들여다보면서 하게 됩니다. 건강아~ 뭐보고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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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너머의 세계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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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때아니게 스나이퍼의 총구가 우리 동네를 지나갔다. 우리가족이 자주 다니던 마켓과 주유소, 드라이브하며 지나쳤던 골목길에서 네 사람이 갑자기 생사를 달리했다. 꽃이 놓여진 주유소를 지날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내게는 최근이 가장 죽음을 살갑게 느끼게 해주는 때이다.

작년 이맘때 <거울 너머의 세계>를 읽었었다. 그때는 이토록 죽음이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었지만, 헨리 나우웬 만의 독특한 정서가 사선너머를 낯설지 않게 그려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 자기존재에 대한 궁금함. 죽음을 목전에 두고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던 갈등들. 사소함 때문에 잃어버린 내 곁의 사람들.

사람은 죽기 직전이 가장 정직할 때라고한다. 그때서야 내가 정말 가진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단다. 나는 늘 돌아온 탕자같은 이들이 누리는 하늘보화가 시샘이 났었는데 이제서야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 마음껏 누릴수 있는 정서적 자유들 - 의식주같은 기본사항부터 정신적 압박감까지..- 과 누렸어야 마땅한 것들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마리아의 경청에 화를 내곤 했었는데 이제서야 내가 이생에서 가장 갈구해야 할것이 무엇인지 발견한듯한 느낌이다.

나는 한이나 복수심으로 세상을 살고싶지 않다. 그래서 어서어서 '이주왕'이 '은아리영'에게 사랑의 힘을 알게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사랑으로 살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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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헨리 나우웬 지음, 김명희 옮김 / IVP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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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수만 있다면 다시 주일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착한일을 하는 어린이를 하나님이 사랑해주시겠죠?'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께 정면으로 반항하고싶다. '그렇게 안해도 하나님은 이미 나를 사랑하시는걸요!'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지칭이기도 한 제목인지라 그저 예수님의 모습을 헨리 나우웬만의 독특한 서필로 쓴 책이라 여겼었다. 전혀 아닌것은 아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예수님의 삶보단 헨리 나우웬의 삶이 훨씬 더 많이 연상되어졌다. 그가 왜 난민촌이나 장애인공동체로 갔는지에 대해선 나로선 알길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애타게 찾는 지혜의 선생이요 청강하고싶은 유명한 대학교수로 자리매김하는것보다 자기 지혜와 묵상이 <전혀> 필요치 않은 사람들에게로 내려?갈수 있었던 용기의 이유는 알수있을것 같았다.

흔히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능력>의 이름으로 편견되이 불러지기 쉽다. 그러나 책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 예수님의 사역의 근원이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항상 공허감을 간직할수밖에 없는 우리 내면을 꽉 채우시는 누군가의 <함께 하심>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또한 회당이든 교회이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속에서든 동질감보다 이질감을 훨씬 많이 느끼는 '때묻은' 주의 자녀들에게, 저자는 애써 공동체로 돌아올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하루하루를 연명하듯이 살아가는 우리 삶의 근간이 결국 온갖 더러움 다 보시고도 나와 함께 있기로 결정하신, 나를 오직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기로 결정하신 그분에게 있음을 확증해준다. 그러면서 나만이 아니라, 이미 그분이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신 다른 사람들과 , 세상에서 형성된 <나의 신분>으로는 어울릴수 없는 그 사람들과 , 오직 하나 <내가 사랑하는 자다>라고 인치심받은 동질성 하나로 어울릴수 있음을 넌지시 제시해준다.

나는 이제껏 예수님만이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는 그것이 사실이다. 그분만이 완벽했고 하나님앞에 완벽히 행하고 순종한 그분만이 그런 놀라운 칭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 책을 접으며 그 고정관념도 함께 접을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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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의 심장
송길원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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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명성도 있고 강한 제목에도 끌려 책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기대한것은 최소한 세가지였다. 하나는, <사모의 심장>이란 제목이하에, 정말 사모를 갑갑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이나 리스트, 공감대 또하나는, 많은 사모님들을 접해보았을 저자의 풍부한 경험담. 그거라도 안되면, 기독교계의 휴머리스트이시기도 한 저자의 시원하고 통쾌한 예화.

불행히도... 아무것도 없었다. 다 읽고난뒤에 책을 서재에 꼽으며 씩씩거렸을뿐. 어떠냐고 묻는 남편한테 딱 두가지로 답해주었다. 제목을 바꾸시던지, 이건 결국 보수적인 경상도 가장 목회자가 거는 사모에의 소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물론 소소한 얻음들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책 잘 펴내시는 <규장>과 <저자>의 명성과 강한 <책명>에 걸었던 기대가 너무 높았던건지, 다른 분들께 별로 추천하고싶지가 않다.

언제였던가 김남준목사님의 사모론을 읽었었다. 그것 역시 목회자가 바라본 이상적인 사모론 이었을뿐 김남준 목사님 특유의 목소리외에 별로 공감되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번역서들이 훨씬 경탄이 된다. 아마도 한국목회자들안에는 사모를 사모로 보는 객관적인 시선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남성들 안에있는 여성관이 사모를 기술하는 책에서도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모론을 기술하려면 몇가지 점들을 유의해야하지 않을까.
하나는, <사모>는 직분이 아니다.

둘, 그럼에도 직분자나 사역자이상의 높고 다양한 기대를 충족시켜야하는 자리이다. 심지어 목회자들에게는 별로 고려되지 않는 여성 특유의 기대심리들이 사모에게 쏠린다. 따라서 결국 사모이야기는 남성의 입장이 아니라 여성들의 입장에서 쓰여져야 할 것같다.

셋, 최근에야 시선이 바뀌어가고있지만, 사모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은사로 세우시는> 한 인격체이다. 따라서 사모라는 직책?으로 사람을 틀안에 가두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한 인격체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고귀한 자존감과 은사를 가지고 자신의 생을 헌신할수있도록 열려진 시선, 성경적인 시각을 가지고 다루어야한다.

넷, 남편이 거는 아내상은 한 부분으로만 국한되었으면 한다. 목회자입장에서 아내에게 이런 사모가 되어달라고 기술되는 책은 개인적 소망일뿐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다섯, 귀결의 문제다. 사모들은 기본?적으로 의지할곳이 하나님밖에 없다. 우스개도 있지 않은가, 사모에게 없는 다섯가지. 남편-자식-친구-취향-시간(과거와 미래포함). 그런 사모에게 기도만이 살길이요 <홀로서기>를 잘 하라는 책 속의 당부는 물위에 들뜬 기름같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오늘날 평신도나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방대한 규모, 다양한 주제의 기독교서적은 왜 존재하는가? 기도귀결의 당위성이야 말할것이 없지만 종료전까지 지속되는 일관되고 공감대는 글의 맥도 없이 내려지는 허무한 결론에 어이가 없다.

결혼<식>에서부터 사모는, 다른 여성들과 차별받는다.
결혼은 두 인격이 하나로 모아지는 특별한 곳이다. 그러나 그때 듣는 말씀부터 사모니까.. 순종하고.. 사모니까.. 기도하고.. 라는 전통적인 당위성에 기울인 권면을 사모혼자 들어야 한다. 뭇 여성들은 적어도 결혼때 받는 서적이 결혼 자체에 관련된 가정도서인데 나는 한권도 그런책을 못받아보았다. 대신 <사모>이야기를 그린 갑갑한 책 다섯권을 받았다. 그런것이 싫고 버거워 그런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번역서에서 느꼈던 객관적이고 통찰깊은 내용들을 한국 목회자들속에서 조금이나마 느껴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저서라는 것이 어차피 개인의 시각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서구기독교를 따라가기는 힘들다. 사모에대한 고찰도 한국에서는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거론되는 사모론이, 외국문화에 사대적인 성향도 띄지 말고, 그렇다고 성경에도 없는 한국전통윤리측면만 강조하지도 말고, 말씀안에서 한국문화를 널리 수용한후 내려지는 슬기로운 지혜담이었으면 좋겠다. 너무... 기대가 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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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elnail 2021-02-04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모님 글 감사해요. 사모님이 쓰신 이 댓글을 저장하였어요. 나중에 저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이런 마음으로 사랑하고 다가가는 남편이 되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담 -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
헨리 나우웬 지음, 김명희 옮김 / IVP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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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조수미의 목소리에 빠져있을때, 아, 이제 지겨워, 다른 음반을 들어야겠다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한달여간 그야말로 다양한 장르와 목소리들속에 데이트?를 즐겼다. 그런데 우연히 길을 걷다가 스피커를 통해 듣게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오우 매력적인 목소리. 누구지? 한장 사가야겠는걸 하고보니 결국 그게 또 조수미님의 새음반이었다.

<아담>을 쥐었을때 느낌이 그것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헨리 헨리 할때 아 지겨워(?) 이제 나우웬 책은 그만 읽어야겠다 하고 한동안 애써(?) 피했었다. 그런데 또 헨리 나우웬이었다. 아직도 낯설고 외면당할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신체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더이상 소외지역에 머무는 시대는 아닌것 같다. 또한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도 그다지 눈에띄지 않는 정신적인 지체(?)를 가진 나같은 사람에게 서서히 치료 동기가 부여되는 때이기도 하다(^^;)

헨리나우웬의 <아담>은 이런 시대상을 충분히 반영한다. 흔히 신체정상인이 신체장애인을 돕는다는 선입견을 훌륭히 뒤집으면서 말이다. 오히려 <아담>과 그의 동료들을 통해 경험하는 치유와 회복에 기꺼이 모든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자아를 묵상하도록 도와주는 <아담>의 생을, 역시 하나님과 자아를 묵상하도록 도와주셨던 <예수님>의 삶에 접붙임해준다. 첨엔 이 이상한 접근방식에 무척 당황히 되었지만, 결국 자신의 길을 걷도록 그때 그 제자들과 지금 우리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본다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가교역할을 해준 <아담>에 대한 저자의 통찰에 동의하지 않을수가 없다.

또한가지, 아담과 더불어 아담의 부모에게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나또한 임신과 출산, 육아의 경험을 가지면서 끊임없이 우리아이의 정상여부?에 신경이 곤두서곤했다. 임신기간중안의 수많은 검사가 오히려 촉각을 세우는 부작용을 나았고, 내가 자라면서 보아온 수많은 부정적인 가능성에 우리 아들을 맞추어보곤 했던 것이다. 하루중 아이에게 사용하는 가장 많은 단어가 <조심해>라는 것을 발견한것도 최근의 일이니까.

그런데 아담의 부모님은 나와 달랐다. 나라면 극악해할 아담의 일탈적인 행위-청소기를 계단 난간으로 던지는-까지도 그분들은 사랑했고 아담의 정서적인 만족을 위해 기꺼이 청소기를 다시사는 수고를 아끼지않으셨다. 새차에 흥건히 소변을 보는 아담을 보고서도 그분들을 '새차에 소변'보다 병원에서 받는 모진 재활훈련의 고통을 감수한 아담의 하루를 더 생각하셨다.

결국 나에게 다가온 아담은, 하나님을 묵상케해주는 그의 본분과 더불어, 부모로서 내 아이를 안아야 하는 수많은 순간에도 멋진 교훈을 남겨준 셈이다. 전자와 후자가 연결된 것이기는 해도.

수많은 낙태와 버려지고 입양되는 아이들을 본다. 무엇이 그들을 생명에서 떼어내고 품에서 떼어내는 기준이 되는 것일까? 입양아를 들이고난 후에야 친자를 얻게되는 가족 케이스들을 접하면서,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저 입양아에게 부모를 주시기위해서 우리들의 태를 잠시 닫으시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자신들이 누려야할 장미빛 인생(어쩌면 그것은 TV가 제시한 목록일뿐일지도 모른다)을 하나님을 묵상케하는 장애아들둘을 섬기는 것으로 대체해버린 아담의 부모님들과 그들에게서 동일한 의미를 발견해낸 라르쉬공동체의 도우미분들에게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또한 나를 다시 헨리 나우웬의 영성으로 젖게해준 <아담>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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