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프라시압 이야기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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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학동네가 가끔 이렇게 신선한 문화권의 소설을 소개시켜주니 참으로 고맙다.
주말을 맞아 아내와 함께 멀리 지방으로 이사 간 처제네 집을 다녀오면서 고속버스 안에서 읽었는데. 난독증에라도 걸린 듯 읽고 또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으나 그냥 대충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글들이 많았다. 이 소설이 내게 어떤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이 한결 풍요로워진 기분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리얼리즘의 테두리 안으로 자꾸 나를 속박해 가던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좋은 책을 만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목숨이 마냥 아까웠던 어느 건달이 죽음 앞에서 노름과 같은 생명 구걸을 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매우 비현실적임에도 내게는 현실의 교훈처럼 다가왔다.

"난 자네가 내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 남자 대 남자로 게임 한판 하는게 어때? 박진감을 높이기 위해 뭘 걸고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만약 내가 이기면 내게 백 년의 수명을 더 줘, 어때?" (15쪽)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으뜸패 게임으로 백 년 수명 연장의 게임이 시작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건달의 오랜 친구는 단순 내기에 말려 들었다가 진실을 알고서 분노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게임에 강한 죽음 앞에서 서로에게 총을 쏘아대며 죽어 간 두 건달... 어차피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던 노인 젯잘 데데(데데=할아버지)는 죽음과 한 편에서 의연하게 으뜸패 게임을 나섰다가 두 건달이 죽은 뒤, 죽음의 제안으로 이야기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 자체가 주는 즐거움 이외에는 그 어떤 목적, 규칙 그리고 조건이 없는 게임, 그러니까 진짜 게임을 하지. 난 자네가 손자 손녀들에게 전설, 동화 그리고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을 봤기 때문에, 자넨 이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해. 한 주제를 택해서 서로에게 이야기를 해주기로 하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야기를 하는 즐거움 자체를 위해서 말일세. 이야기 한 편당 자네에게 한 시간의 목숨을 더 허락하겠네. 어떤가?" (23쪽)

죽음이 찾아 왔을 때, 손자 손녀들과 함께 있었던 젯잘 데데는 할아버지와 헤어지는 것을 마냥 싫어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거인 에프라시압의 보물을 찾아가게 되었노라며, 아이들의 두려움을 잠재웠었다. 그리고, 죽음과 젯잘 노인의 생명 연장의 핑퐁 게임은 공포, 종교, 사랑, 천국 등 다양한 주제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와 데카메론 풍의 이야기 게임이 포스트모던 하게 전개되는 동안 죽음은 또 다른 표적 '우준 이흐산'을 찾아 한 걸음씩 나아가고, 노인은 별다른 불만 없이 죽음과 동행하며 독자들을 충족시켜 주고 있었다.

흡혈귀 교장과 천재 소년 화가의 섬뜩한 이야기 '화창한 날', 마이다스의 손을 연상시키는'비다즈의 저주'로 공포 이야기를 끝내고, 이슬람 마을의 종교 지도자 이맘의 성지 순례에 동행한 노망난 노인과 상사병에 걸린 늑대 소년의 '어느 성지 방문', 부유한 상인 압튈제야트가 꿈에서 만난 살리흐 노인의 훈계를 듣고 떠나는 이야기 '세계사'로 종교 이야기를 끝내고, 자식들을 결혼시키기 위한 홀아비와 과부의 네 자매 이야기 '에지네의 괴물', 그림 동화 '빨간 모자'를 패러디한 '포도주와 빵'에서 사랑을 이야기 한다. 입장이 정리되지 않는 소년 슈퍼맨의 '하늘에서 온 아이' 등 끝없이 펼쳐지는 그들의 주제... 다음 이야기의 주제를 묻는 죽음에게 그만 끝내고 싶다고 의연하게 대답하는 젯잘 데데의 선언은 죽음을 당혹스럽게 한다. 

"다음 주제는 없소. 이제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게임은 끝났소. 내게서 가져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져가시오."
- 중략-
"사실 난 당신에게 지금까지 우리가 한 모든 이야기를 포괄하는 한 편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이 이야기는 영원히 지속될 거요. 하지만 이야기꾼이 나인 것으로 보아 당신이 추측하듯 너무 지루할 거요. 나는 이야기에는 끝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오. 우리네 삶도 이러하지. 지금까지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소. 하지만 이제 때가 되었소. 보시오, 잠시 후면 해도 서산으로 넘어가겠소." (305쪽)


하지만 노인의 살아온 날들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손자 손녀들... 에프라시압의 보물을 할아버지와 함께 찾아 나서고 싶었던 그 순수한 영혼들이 할아버지에게 함께 데려가 달라고 조르다가 죽음을 발견하고는 할아버지를 지켜내고자 한다. 죽음은 그 아이들의 소망에 맞서 또 다른 게임을 제안한다.

"좋아, 정 그렇다면 너희들과 게임을 하자. 봐라, 곧 해가 떨어질 것이다. 너희들에게 해가 지평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간을 주겠다. 그 시간 안에 나를 웃기거나 미소 짓게 한다면 너희 할아버지를 두고 가겠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데리고 갈 테다. 어때, 내기를 하겠느냐?" (314쪽)

마지막 내기는 누구의 승리로 끝날 것인가?
나는 승리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언제가 끝날 수 밖에 없는 삶. 현실의 삶에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또다른 미지의 세계를 마냥 두려워 한다면, 작가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의도와 엇갈리는 행보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번역자인 이난아 선생님이 남긴 후기를 보면 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읽을 수 있는데, 좋은 작품을 번역해 준 이난아 선생님에 대한 내 존경심을 덧붙여 드리고 싶다.

뭐가 딱히 기억에 남는 내용의 독서가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여운이 남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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