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64
신영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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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하늘 보기 보다는 바닥을 보고 걷는 여자였다.
매우 중성적인 이름과 중성적인 콧날... 그러나, 분명한 미인이었다.
표제시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를 읽기 전에 그녀가 매우 긴 여자라는 것도 멋스럽다.
내가 아는 시인의 빈한함은 편견이었다. 그녀에게선 오히려 여유가 느껴졌다. 


옥상에 앉아 있던 태양이
1층 유리창으로 내려온다.
유리 속을 걷는 구두는 반짝인다

귀가 접힌 어떤 사람들은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간다
계단으로는 지상에 없는 음악이 올라온다

작품은 지상에 걸리지 않는다

나의 아름다운 바지는 다리가 하나이다
지퍼 하나, 주머니는 넷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하체가 지하로 빠진 골목은
골반에서 화분을 키운다
지상에 없는 향기가 흙에 덮여 있다

나는 천천히 걸어 여섯 시 꽃에 닿는다

닫히는 문에 손을 찧으며
여섯 시 꽃으로 들어가 여섯 시 꽃에서 나온다

길가에서 아이들이
발끝을 비벼 머리를 지우는 장난을 한다
머리를 지운 아이들은 사라진다

멀리 떨어진 머리를 주우러
나는 길어진 내 그림자 위를 걸어간다
귀가 지하에 잠겨 있을
내 그림자의 끝으로

(10~11쪽,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전문)




A 죽겠을 만큼 길다. A 똑같다. A 계속이다. A 강요한다. A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A 다시없이 밉다. A 왜 소리를 치지 않나? A 떠오르지 않는다. A 건너다 본다. A 사랑하였다. A 푸른 채로 있다. A 실색한다. A 흥분이 없다. A 통하리라. A 익으리라. A 본능이다. A 오고 만다. A 늘어졌다. A 썩는다. A 조용히 썩는다. A 울기나 한다. A 짖지를 않는다. A 이상하다. A 오지 않는다. A 헤어진다. A 먹는다. A 알 길이 없다. A 오지 않는다. A 다름없다. A 열리리라. A 패쇄되었다. A 주저한다. A 귀찮다. A 견디기 어렵다. A 만났다. A 붉고 검다. A 미지근 하다. A 아무것도 없다. A 들여다 본다. A 틀림 없다. A 이동한다. A 어쩔 작정인가. A 응시한다. A 크고 슬프다. A 분간할 수 없다. A 반복한다. A 질러본다. A 5분이다. A 오는 것이다. A 설명할 수 없다. A 어쩌라는 것인가. A 관계없다. A 버티고 서 있다. A 피할 수 없다. A 답답해야 한다. A 끈다. A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A 아무것도 없다.

(100쪽, '점의 구성' 전문) 

이상의 '권태'에서 서술부 가져오기를 했다고 밝힌 이 詩는 에로틱하다. 어느 누구도 정답을 해석할 수 없으며, 각자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 특성은 오로지 시인에게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차분한 목소리로 음의 고저 없이 평이하게 읽는 시인의 목소리가 Envy의 A Warm Room의 리듬과 함께 부드러움으로부터 점점 강렬하게 울려 퍼진다. 시인의 선곡이 귓가를 맴돌며, 읽는 즐거움을 듣는 즐거움으로 발전 시킨다.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창문을 열면
귀에서 귀로 냄새가 퍼졌다

그 발바닥을 보려면
얼굴을 바닥에 붙여야 하지
아무도 공중에 뜬 자국을 보지 못한 때
문자가 내려와 땅을 디디려는데
바람이 그것을 가져왔단 말이지

구더기처럼 그림자가 떨어졌다

한 줄 남기고 다 버려 우리들의 문학수업

시외로 가는 차량 근처에 너를 떼어버리고 오다
멀리멀리 가주렴 문장아, 내가 사랑했던 남자야

살갗 같았던 문장과 이별하고도
아름다운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나는
목만 끊었다 붙였다

태양 아래 서서 혼자 부르는 노래
내 그림자 길이만큼 땅을 판다
내 그림자를 종이에 싼다
내 그림자를 땅에 묻는다
내 그림자 무덤에 두 번의 절
그리고 축문

오늘 나는 그림자 없이 일어선다
흰 눈동자의 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을 완성할 즈음
내 발목을 잡는 검은 손
어제 장례를 치른 그림자가 덜컥 붙는다
발끝을 내려다봐

끊은 목 아래
꿈틀거리는 애벌레들

이별은 계속된다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붙이고 붙인 살덩이를 끊고 끊어
차분히 내려놓을게
공중에 뜬 발바닥 아래로

다 내려 놓을테니 다 가져가란 말이지

(101~103쪽, '발 끝의 노래' 전문)
 

그림자만을 추적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시인이 부럽다. 끝으로 짧으나 충격적이었던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시...

공중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머리카락의 밤 수십 개의 귓구멍으로 둘러싸인 머리통 하늘거리는 귓바퀴들 콧수염 속에서 자라는 눈알 등에 촘촘히 박힌 손톱 배꼽에서 빠져나오는 꼬리 비늘의 반대 방향으로 칼날을 넣고 다리를 긁는 손 바다에서 수족관으로 수족관에서 언덕으로 옮겨진 물고기인간 땅에 머리를 박고 두 다리가 붙은 바지를 입고 지퍼를 올렸다내렸다 내 사랑

기억해봐 나무를

(55쪽, '기억은 기형이다' 전문)




나는 이제 신영배의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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