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염소
김성동 지음, 정준용 그림 / 청년사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빼빼라는 여덟 달 먹은 아질개(어린) 흑염소의 삶이 죽기 직전부터 시작하여 과거의 기억으로 흘러간다.
정준용 선생의 삽화로 더욱 매력적인 어른들의 동화다. 엄동이와 엄순이 남매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련한 내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야기는 염소의 시선을 통해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을 쓸 때가 바로 5.18 직후였고 세상은 암울하지 않았던가...
몇 장의 종이쪽을 받아든 엄돌이 아버지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다음 등을 보였고, 나는 처음보는 사람에게 끌려 정거장으로 갔습니다. (81쪽)
낯선 염소들과 함께 앞날을 궁금해 하고 있는 이 어린 염소 빼빼에게 산전수전 다 겪었을 법한 늙은 염소가 들려주는 잔인한 사람들에게 당하고만 살다 죽는 염소들의 삶을 들려 준다.

"힘이 부족한 사람은 살을,
아기 낳은 여자는 피를,
흉터가 생긴 사람은 뼈를,
뼛속에 바람이 든 늙은이는 머리와 다리를,
살결이 거친 여자는 기름을,
창자가 썩어가는 사람은 젖을,
목이 타고 오줌이 잦은 사람은 허파를,
눈이 나쁜 사람은 뿔을, 그리고
가죽은 찍어 가방과 지갑과 목도리와 귀 가리개를 만들 것이다." (87쪽)
염소 매뉴얼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논하고 있지만, 내가 몰랐던 다양한 염소의 사용 매뉴얼을 본 느낌이다.
책을 읽다가 거실로 고개를 돌려, 허약한 몸을 이겨 내기 위해 흑염소 다섯 마리 반이나 잡아 먹고 성장 했다는 아내의 본질(?)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되었다. 딱히 염소가 불쌍하지는 않고 그저 마누라를 위해 희생한 이름모를 그 어린 염소들에게 감사하다고나 할까.
결국, 어린 염소 빼빼는 늙은 염소의 죽음 순간 절규하는 눈빛을 목도하면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온 사모님의 먹이로 팔려가기 직전에 스스로 자유를 찾아 탈출한다. 탈출하여 자유를 찾은 염소는 "...달라!!", "...하라!!"를 외치는 시위대를 보며 헷갈려 한다.
사람들 또한 우리네 염소처럼 자기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숨탄것에게 모가지가 매여 끌려다니고 있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13쪽)
마치 시집처럼 정갈한 짧은 문구들 속에서 처음 보는 우리 옛말들이 주석과 함께 아주 많이 숨어 있는데, 위에 나온 숨탄것은 이미 80쪽에 먼저 소개되었 듯이 '하늘과 땅한테서 숨을 받은 목숨'이라는 뜻으로 동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행간에 그런 단어들을 만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유익함이었다.
옥에 티라고 해야 하나...
염소를 통해 감정이입 자연스러웠으면서 당황했던 부분은 다음과 같은 개의 한 마디...
"편지해"
삽살이가 쫓아오며 소리쳤습니다. (73쪽)
끌려가는 염소 빼빼에게 편지를 하라니... 모두 허구라지만 특히 그 부분은 풋~ 웃음이 나왔다.
평범한 사람들의 문장을 사용하지 않고 오대산 토굴에서 개정판 후기를 남긴 작가의 프로파일을 봤더니 그 또한 매력이 있었다. 앞쪽 표지 안쪽에 다음과 같이 써져 있었다.
작가 김성동은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3학년 재학중에 입산하여 10여 년 동안 떠돌다가 하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