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시선 304
이선영 지음 / 창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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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앞 주차장에 오색의 큼직한 바람개비가 신나게 돌고 있었다.

주차장을 관리하는 아저씨가 아침에 설치해 놓은 그 바람개비가 여럿을 동심으로 보냈다.
항상 시끌벅적 무미건조하던 그 주차장이 커다란 바람개비 하나로 의미 있는 공간이 되었다.
주차장 바람개비를 바라보면서 그 걸 설치한 아저씨도 시인이라 부르고 싶었다.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바라보며 이틀 전 눈에 담은 시가 떠올랐다.

내 시가 아름답지 못해서
새끼 고양이가 거리 한복판에 버려졌다
내 시가 힘주어 말하지 못해서
한 소녀가 거리에서 싸늘하게 발견되었다.
내 시가 멀리까지 닿지 못해서
소중한 마음의 결들이 상했다
내 시가 커다란 울림을 갖지 못해서
불쌍한 한 사람이 다른 불쌍한 한 사람을 해쳤다.
(120쪽, '21세기 시론'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삭막한 21세기 서울에 살면서...
주차장의 바람개비만으로도 기쁨을 준 그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렸다.

씨 없는 수박에게 미래는...?
씨 없는 포도알이라면 그 또한 미래가 없을 것일까? 맛도 없으리라...
창비시선 304권, 이 시집의 제목은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지만 동제목의 시는 없다. 다만...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 놓는다.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40쪽,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중에서)


아~ 그냥 감탄사!!
포도를 먹으며 포도알 하나하나 마저도 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아이야.
네가 집어든 돌을 물가로 던지는 일은
네 뜻과 다르게 위험선이 될 수도 있고
허사에 그칠지도 모르며
종종 네가 원하는 않는 쪽으로 가야 하거나
아무도 봐주지 않는 외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네 돌은
남을 치는 돌이 될 수도 있고
네 주위에서만 맴도는 자디잔 돌일 수 있으며
때로 멀리 던져보난 너만의 커단 꿈일 수도 있다
(94쪽, '너의 돌팔매' 중에서)


물 가운데 있던 아빠와 돌팔매로 장난을 치는 아이를 차분하게 바라보며 시작된 시는...
조심스럽게 타이르는 듯 하더니만 아이에게 무한한 도전과 희망으로 퍼져 나간다.
내게 마치 물수제비 쇼를 보여 달라고 조르는 듯 싶었다. 

계속해서...
중년의 시인은 여자로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본다.
그리고, 영화 '젊은이의 양지'인 듯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생각하며...
스스로 청춘의 우상이었다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고백하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깨달은 현실을 부르짖는다.

아, 몹쓸 이상과 몸쓸 취향이라니!

내가 두번째로 만난 몸고메리 클리프트 속에도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없다
왜냐하면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영화 밖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니까
영화 밖에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운 어느 새벽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내달리기도 했었다.
(111쪽,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없다' 중에서)
 

포도씨와 같은 희망이 영그는 시집이다.
씨도 좋고 詩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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