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손가락이 뜨겁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61
채호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평점 :
연작시 '수련' 이후로 이미 나는 채호기 시인의 고정팬이 된 사람이고, 지난 며칠간 시간의 여유를 잡지 못해 기록하지 못했을 뿐, 이미 나는 채호기 시인의 새로운 시집을 탐닉하고 있었다.
내 삶의 방향을 바꾸거나
건너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건널목의 순간들.
- 중략 -
복잡하고 어지러운 머리는
발을 따라가지 못하고 당신을,
삶을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지루한 시간의 끈질긴 눈동자처럼
다만 건너편을 바라볼 뿐.
(64쪽, '건널목' 중에서)
나와 생각을 단단하게 붙이는 접착제는 뭘까?
생각하면, 생각은 점점 커지고 무거워질 뿐
생각은 내 몸과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 중략 -
생각이 기생하는 몸은 감각이 무뎌진다.
허나, 이것도 생각이다.
(91쪽, '접착제' 중에서)
암흑은 그림자가 없다.
암흑은 차갑다.
암흑은 찐득찐득하다.
암흑을 벗겨내려 하자
얼굴 살껍질이 벗겨졌다.
- 중략 -
암흑은 암흑이다.
암흑은 그 전체가 암흑일 뿐
암흑은 절대 다른 것일 수 없다.
(96쪽, '암흑' 중에서)
시의 근육은
먹이를 쫓는 사자의 근육보다는
죽음과 경주하는 사슴의 근육이다.
아니 그보다는 사슴에게 꼼짝없이 먹히지만
어느새 초원을 덮어버리는
풀이 시의 근육이다.
(110쪽, '시의 근육' 중에서)

7년 전에 낸 시집 '수련'으로부터 나는 이미 시인의 팬이 되었는데, 시인에게 사업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 자리를 떠나 오로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곧 나오겠구나 싶어 기대했던 바로 그 시집이 출간되어 참으로 기뻤다.
전세계를 광기어린 열정으로 사로잡은 마이클 잭슨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채호기 시인의 따뜻한 손가락이 좋다.
멋지고 아름다운 글이 그 손가락에서 뜨겁게 불타 오르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