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더꿍 3 - 복수의 칼
이두호 지음 / 행복한만화가게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홍윤성의 횡포에 맞서 싸운 가상의 인물 독대의 이야기이다.
수양대군을 양수대군, 김종서를 김서종, 홍윤성을 홍성윤으로 작명하여 허구임을 강조한 이두호 선생은 직접 휘갈겨 쓴 글씨를 이 책의 제호로 사용하였다. 비록 악인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홍성윤이 빛나고, 힘없는 독대가 복수를 하는 과정이 이두호 선생 특유의 섬세한 그림으로 잘 표현되고 있다.   

색주가에 팔려가는 누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첫사랑의 죽음, 재회하기도 전에 접하는 누나의 죽음... 그 모든 죽음 뒤에 감히 넘어설 수 없는 홍성윤의 악행들... 이란투석의 참담한 현실을 참고참고 참으며 결국 극복해 내는 주인공의 삶과 죽음을 통해 권선징악과 정의 실현을 그려낸 작품으로 제법 흥미롭다, 

본디 신문 연재했던 것을 90년에 고려원에서  단행본으로 발간 했었고, 이번에 '행복한 만화가게'에서 애장본으로 재출간한 것이다. 다른 만화책들에 비해 잘 만들어져 있다.




홍윤성(洪允成. 1425-1475)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이 죽으니, 조회를 정지하고 제사를 지내주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홍윤성의 자(字)는 수옹(守翁)이니, 회인현 사람이다. 경태 경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고, 무술실력이 있다하여 특별히 사복직(司僕職)을 겸하였다. 신미년에 한성참군(漢城參軍)을 규정을 뛰어 제배하고,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 사복주부(司僕注簿)를 역임하였으며,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 문종이 (세조에게)명하여 진서(陣書)1)를 찬(撰)하게 하니, 홍윤성은 낭관(郎官)으로 참여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세조는 단종이 젊으므로 나라가 위태함을 근심하였었는데, 홍윤성을 보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은밀한 뜻을 나타내니, 홍윤성이 제일 먼저 권남2)에게 천거되었다.

세조가 (계유)정난 한 뒤 수충협책정난공신의 호를 내려주고, 본시판관(本寺判官)으로 승진하였으며, 갑술년에 또 소윤에 오르고, 얼마 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옮겼다. 을해년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가 되었다가 세조가 즉위하니, 통정대부 예조참의를 제수하고, 또 좌익공신의 호를 내려주었다. 병자년에 가선대부 참판으로 오르고 인산군(仁山君)에 봉해졌으며 얼마 있다가 병조에 옮겼다가 또 가정대부에 올라 다시 예조에 제배 되었다. 천순 정축년에 자헌대부 판서에 오르고, 이 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기복(起復)하여 경상우도 도절제사를 삼았다.

기묘년에 다시 예조판서에 제배되었고, 경진년에 정헌대부를 더하였다. 당시에 (여진족인) 모련위 낭보군(浪甫軍)이 반란하니, 세조께서 신숙주를 장수로 삼고, 홍윤성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으며3), 돌아오자 숭정대부를 더하였다. 갑신년에 인산군(仁山君) 겸 판 예조를, 성화 정해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다. 기축년에 좌의정에 오르고, 예종이 왕위를 이어 받음에, 사은사가 되어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영의정에 올랐다. 경인년에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으로 바꾸어 봉하고, 신묘년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4)의 호를 내려 주었는데, 이에 이르러 발에 종기를 앓다가 사망하니, 나이는 51세이다.

시호는 위평(威平)이니, 용맹하여 강인한 결단력이 있음이 위(威)이며, 능히 세상의 어지러움을 평정함이 평(平)이다. 홍윤성은 용모가 우람하고 훌륭하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젊어서는 가난하였는데 힘써 배워서 급제하니, 사람들이 재능이 있는 뛰어난 호걸로 기대하였다. 세조를 만나게 되자, 총애하여 돌봄이 매우 융숭하였고, 홍윤성이 본시 가난하였음을 알고 기름진 논밭을 많이 내려주었다. 홍윤성이 재화를 늘리는 데 힘써 홍산 농장에 쌓인 곡식은 매우 많았고, 종들도 세도를 믿고 함부로 방자하여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혹 몽둥이로 살인하기도 하였다.

세조가 온양에 거둥하여 목욕할 때, 양반의 부인 윤씨가 임금에게 글을 올려, 그 지아비가 홍윤성의 종에게 살해되었음을 호소하니, 명하여 담당에게 국문하게 하여, 그 종을 환형(轘刑)5)하고 홍윤성은 국문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아뢰기를 “ 홍윤성의 거칠고 미친 것 같은 태도와 교만하고 제 마음대로 날뛰는 형상을 임금께서는 잘 살피소서.” 하니 당시에 이르기를 “ 그의 잘못을 똑바로 맞추었다.”고 하였다. 첩이나 노비가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활이나 칼을 쓰기까지 하였으며, 아내 남씨에게 자식이 없어서 같은 고을의 양반 김자모의 딸을 강제로 취하여 장가들었다. - 조선왕조실록. 성종 6년9월8일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을 보면

홍윤성은 충청도에 살고 있었으므로 과거를 보기위해 도보로 한강에 이르렀다. 그런데 10여인이 배를 잡고 떠나지 못하게 하므로 홍윤성이 배에 뛰어들어 손수 작은 삿대를 꺾어 그 들을 쳐서 모두 물속에 빠트리고는 홀로 배를 저어 건넜다. 때마침 수양대군(세조)이 (마포) 제천정에 나와 놀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홍윤성을 불러와서 두터히 대우하고 남몰래 은혜로서 맺어두었다.

홍윤성이 과거를 치르러 서울에 들어와서 홍계관이 점을 잘 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자기의 운명을 물어보니 홍계관이 꿇어앉아 공손하게 대답하기를 “ 공은 극히 귀한 운명입니다. 모년 모시에 공이 반드시 형조판서가 될 것이요. 그 때 소인의 아들이 죄를 얻어서 죽게 될 것이니 모쪼록 살려주소서.” 하고는 이어 자기 아들에게 이르기를 “ 네가 아무 때에 옥에 갇힐 것이니 그 때 나의 아들이라 하면 될 것이다.”하였다. 홍윤성이 놀래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더니 그 뒤 10년이 아니 되어서 과연 형조판서가 되었다. 어느 날 큰 옥사를 국문하던 중 한 죄수가 소리를 높여서“ 저는 곧 소경 점쟁이 홍계관의 아들입니다.” 하였다. 홍윤성이 깨닫고 석방하였다.

세조가 김종서를 죽이던 날6) 저녁에 먼저 홍윤성으로 하여금 업무보고를 한다 핑계하여 (당시 홍윤성은 훈련원 주부였다.) 김종서를 가서 보게 하였다. 김종서가 안방에서 장침(長枕)에 기대었고 세 첩이 뒤에 있었는데 홍윤성을 불러서 앞에 오게 하고 말하기를“네가 힘이 세다하니 나의 강한 활을 시험조로 당겨보아라.” 하니 홍윤성이 당겨서 잇달아 둘을 꺾었더니 김종서가 이르기를 “번쾌7)라도 이와 같지 못하리라.” 하고 첩으로 하여금 큰 그릇에 술을 부어서 마시게 하니 그가 세 사발을 마시고 나왔다.

홍윤성이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그의 숙부가 찾아와 자기 아들에게 벼슬을 시켜달라고 하니 “ 만일 아무 곳에 있는 논 이십 두락을 나에게 준다면 그렇게 하리라.” 하였더니 숙부가 말하기를 “ 어찌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가. 옛날 네가 곤궁하여 뜻을 얻지 못했을 때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에게 의지한 지 30여년이 되었는데 이제 재상의 몸이 되어서 내 자식 하나 벼슬을 시키지 못한단 말인가?”하니 그 말이 전파될 까 두려워 그 자리에서 숙부를 죽여 뒷마당에 묻었다.

숙모가 소장(訴狀)을 올렸으나 형조나 사헌부가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온천에 거둥할 때 숙모가 미리 밤부터 길가 버드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세조의 행차가 이르니 나무위에서 호소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사람을 시켜 물었더니 그 아내가 이르기를 “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권신(權臣)에 관계되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반드시 그 말이 변경될 것이니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세조가 연(輦)을 멈추고 앞에 나와 대답할 것을 명하여 자세히 듣고는 크게 노하여 홍윤성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공이 컸으므로 곧 그 종 몇십명을 죽이고 행차를 계속하였다.




홍윤성에 관한 자료를 보면 거의가 그의 행패를 기록하고 있는데 자기가 불렀는데 대답을 바로 하지 않는다고 여자 종을 활로 쏴 죽이려고 하는 것을 전림이라는 관리가 보고 자기의 첩으로 삼게 달라고 하여 목숨을 구했다는 내용도 있고 자기 집 앞 냇가에서 말을 씻겼다고 말 주인을 죽이기도 하고 자기 집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갔다고 죽이기도 하는 등 홍윤성 본인과 그 집 종들의 행패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지만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그의 행위가 즉흥적이고 무자비했으며 나라에서도 공신이라고 하여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중국 북송 때에 요사렴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진나라의 사서(史書).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 의 하나로 본기(本紀)6권과 열전 30권으로 이루어 졌다.

2) 1416-1465. 조선 개국에 공이 많은 권근의 손자이고 찬성 권제의 아들로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즉위를 하는데 한명회와 더불어 1급 참모였으며 나중에 길창부원군에 봉해졌다.

3) 1460년(세조6년) 4월 여진족이 침입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므로 신숙주 등을 보내 여진족 약 430명을 죽이고 900여채의 집을 불사르고 소, 말 등 약1천 마리를 빼앗았다.

4) 성종 즉위에 공이 많은 신하들에게 준 공신

5) 두 발을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수레를 끌어서 죄인을 찢어 죽이던 형벌

6) 1453년(단종1년)10월10일

7) 중국 한나라 유방(고조) 휘하의 무사. 힘이 무척 세어 유방을 도와 건국에 공이 많았고 한나라 건국 후 좌승상 등을 역임하였으며 무양후에 봉해졌다.

[출처]
http://blog.naver.com/2008jsl/700338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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